놀러 가자고요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렇게 무방비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듯 읽게 되는 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갈등 요소나 결말 따위 중요하지 않은 채 그냥 이야기 자체에 흠뻑 젖어들어 읽게 되는 소설, 그는 진정 소설가보다는 만담꾼이 아닌가 싶다. 소설을 읽는 느낌이 아니라 시골에 놀러 가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주변 어른들이 하시는 재미난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랄까. 농촌 특유의 순수한 듯 투박한 생활과 우악스러운 욕설과 사투리가 난무하지만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욕쟁이 할머니의 맛깔난 욕을 구경하는 것처럼 신기하다. 내가 읽은 현대 소설 중에 이런 느낌의 소설이 있었던가, 읽다 보면 소설 <토지>나 염상섭의 <삼대>같은 전근대 소설이 떠오른다. 하지만 무심하게 툭툭 튀어나오는 세월호, 천안함, 스마트폰, 자가용 같은 낱말에 역시나 배경이 현대지, 하며 다시 무릎을 치며 읽게 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단편 『장기 호랑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농촌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집이라고 하여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이 엮인 단편집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처럼 각각 발표한 단편소설들이 모여 #연작소설 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범골이라는 같은 배경 아래 살아가는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그 중심에는 노인회장 김사또와 오지랖 댁, 그의 아들 소판돈 이 있는 듯하다. 첫 단편 『장기 호랑이』에 등장하는 아빠와 아들은 아마도 소판돈과 그의 아들이 아닐까 싶다. 그 소판돈은 아마도 작가 자신을 오마주한 인물인 것 같고 말이다. 그렇다면 김사또와 오지랖 댁의 모습이 아마도 작가 부모님의 모습을 본뜬 캐릭터인 걸까. 작가의 말에서 그는 시골에서 아직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시는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집착적으로 남기고 싶었단다. 시골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의 역사들을, 이제는 도시인의 고독에 묻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농촌 노인들의 고독과 삶의 이야기를 자기라도 꼭 남겨야겠다는 책임감이 아니었을까. 

표제작 『놀러 가자고요』는 마을 사람들의 단체 여행을 앞두고 참석 여부를 묻기 위해 노인회장인 남편 김사또를 대신해 오지랖댁이 마을 사람들에게 2~300통의 전화를 대신 돌리는 이야기가 전부다. 여행에 참석할 것인지 묻는 질문과 짧은 대답이 전부인 대화지만 각기 다른 성격과 사연,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도 페이지가 획획 넘어간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현재를 쿡 찌르는 대답이 나와 움찔하게 만들기도 한다. 

「- 아줌마, 4월 16일이 무슨 날이지 모르죠?
노인회 놀러 가는 날이라니까요. 어라, 잠깐만요, 달력에 뭐라고 적혀있네. '국민 안전의 날'? 이런 날도 다 있었나. 
- 세월호가 가라앉았던 날이라고요, 4월 16일이. 그 슬픈 날에 놀러 가는 건 아니죠. 국민 안전의 날, 그것도 세월호 같은 일이 다시 생기면 안 되겠다 해서 만들어진 날이라고요.
- 그럼, ..... 그날은 뭐 하고 있어야 해요?
- 뭐......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암튼 놀러 가는 것은.... 그러니까 뭘 해야 하냐면......
그러니까 못 가신다는 얘기죠?
-잘들 다녀오세요.」
< 놀러 가자고요 p. 126>

단편 『산후조리』에서는 새끼를 낳는 소 '얼간년'과 소를 돌보는 오지랖댁의 눈물겨운 사투를 자못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는 농촌 사람들의 큰 자산임이 분명하긴 하지만 팔아서 돈이 되는 재산이기 이전에 소중한 생명인 것이다. 다리가 아파 잘 걷지도 못하는 오지랖댁은 아픈 엄마 소 '얼간년'과 새끼소가 둘 다 밥도 안 먹고 시름시름 앓자 투덜투덜하면서도 그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새끼에게는 젖병에 우유를 담아 물리고, 엄마소를 위해 힘들게 여물죽을 끓여 먹이는 등 지극정성이다. 얼간년과 새끼소는 오지랖댁의 정성에 과연 건강해질 수 있을는지. 
소설 이야기 곳곳에선 구제역에 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소 키우는 시골에선 구제역이 제일 무서운 존재이긴 한가보다. 가까운 동네에 구제역이 발생하면 그 동네 모든 소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살처분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전국에 구제역이 돌기 시작하면 시골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자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식들도 명절에 못 오게 한단다. 

점점 현대 소설에서 순수한 농촌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사건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닌,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중심이 되어 농촌 생활 전반을 자연스럽게 녹여 끌고 가는 이야기는 정말 드문 방식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농촌을 마냥 미화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순수한 건 순수하게, 우악스러운 건 우악스럽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다 글이 유쾌하고 흥겨운 느낌이라 축축 처지는 느낌 없이 술술 읽힌다. 사실은 처음에 나온 단편 2개 정도를 읽다가 '대체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다.(소곤) 작가 또한 자신의 책이 중쇄된건 작가정신에서 나온 책  1권 밖에 없다며, 자신의 책을 읽어주는 소수 정예 독자들 덕에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다는 소리를 해대고 있어 별 기대 없이 읽었다. 하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마냥 무방비로 훅 빠져든다. 

맛있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먹게 되는 과자처럼, 자극적이지 않은데 마냥 넋 놓고 읽게 되는 이야기랄까. 
이 소설은 뻥튀기를 닮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자꾸만 먹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