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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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 모든 문장에 죽음의 기운이 어려있는 소설집을 만났다. 자살, 종말, 사고, 살인 등 다양한 종류의 죽음이 변주된 이야기들은 소설보다는 '시'같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 천희란은 왜 죽음이라는 테마를 이토록 집요하게 파고들었을까. 신인작가로 데뷔하여 첫 번째로 내는 소설집이 죽음으로 점철된 이야기들이라는 점에서 그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소설을 썼을까, 스토리보다 작가의 정체에 더 호기심이 생겼다. 

첫 번째 소설 <창백한 무영의 정원>에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의 소설은 대부분, 마치 퍼즐 맞추기처럼 쓰였다. 아무렇게나 툭 던져진 퍼즐 조각 하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거기에 조금씩 나머지 조각들이 맞춰진다. 하나하나 조각을 맞춰가다 보면 점차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는 식이다. 어느 날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자다가, 혹은 일하다가 픽 죽어버리기 시작한다.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왜 죽는 건지, 또한 내가 언제 죽을는지. 그런 공포가 파다하게 퍼져가는 세상에서 그럴 바에 차라리 자유의지를 가지고 원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겠다는 젊은이들 A, B, C, D, E가 모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과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누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산다. 하지만 그 죽음이 손에 닿을 듯 말 듯 애매할 땐 차라리 스스로 죽어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일까? 그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떨지. 

「하루가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시작되는 것일까. 돌연 그러한 질문이 떠올랐다.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정확히 12시를 가리켰다. 밖은 어두웠고, 자정이었다. 왜 자정을 0시라고 부르는 걸까. 0은 11의 다음에 오는 숫자가 아니고, 23의 다음에 오는 숫자가 아니며, 0은 12와도 24와도 같지 않다. 0은 1의 앞에 올 수 있으므로, 자정을 하루의 시작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 
< 『영의 기원』 p.80>

영(0)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루가 다 가고 23시 59분 59초가 넘어가는 순간 시계는 다시 00시 00분이 된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기도 하고, 동시에 꽉 찬 어제가 끝나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지나간 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영'이라는 단어는 공교롭게도 숫자 0의 의미도 있지만 영혼을 뜻하기도 한다. 1초 전 살아있던 사람도 숨이 멎는 순간 더 이상 그가 아니다. 한 구의 시체일 뿐인 것이다. 모든 것이 리셋되고, 진실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것이 참 얄짤없다는 생각을 했다. 죽은 자는 왜 절대로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인가. '영'으로 리셋되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작가가 이런 의미까지 의도하고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삼 0시라는 단어가 좀 무참하게 느껴진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는 젊은 작가상 수상집에서 한 번 읽고 난 후 이번에 재독 한 단편인데, 한 번 더 읽으니 비로소 제목의 의미가 확실히 와닿는다. 전주곡이라는 의미의 '프렐류드'와 가장 완전한 형식의 다성음악이라는 '푸가', 처음엔 왜 이런 어려운 제목을 썼을까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아주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효주와 선생님으로 불리는 두 여자의 편지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다. 선생님은 효주 엄마의 죽음을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이다. 효주는 선생님에게 입양되어 자라나 결혼을 앞두고 있고, 엄마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스위스 바젤에 있는 선생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절대로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한 작가에게 쓰고 싶지 않은 것은 곧 쓸 수 없는 것일 테다. 비열한 글쓰기란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팔아 연명하는 것도, 핍진한 허구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 지금까지의 절망이 모두 허위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p.136>

절대로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 그건 반대로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뜻이 아닐까. 선생님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 절대로 쓰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는 다섯 개의 프렐류드 뒤에 숨겨져 있었다. 죽음이 닥쳐왔을 때에야 쓸 수 없던 것을 써 볼 용기를 낸 선생님에게 죽음은 비로소 완성을 뜻하는 거였을까.

단편들은 대체로 읽기에 어렵고 무거웠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테마의 8개 이야기를 읽어내려 가는 동안 자꾸만 내려놓고 싶었고, 때로는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왜 자꾸 이런 얘기를 하는지. 이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내면은 대체 어떤 상태인 건지. 작가의 말에서 '매번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라는 말을 보고 과연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품 해설에서 신샛별 평론가가 남긴 글이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아 대신 전한다. 

「본래 예술가의 숙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작가란 평생 한가지 이야기만을 할 뿐이라는 말을 흔히 듣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면 한 작가의 수많은 작품들이 결국 가장 궁극적인 진실 하나를 말하지 못하고 방황한 흔적들이라는 뜻이 된다. 어쩌면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그 한 가지 진실을 포기하지 않고 말하기 위해 자신을 끝없이 학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이야말로 예술가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화가와 작가를 탄생시키고 그들을 통해서 예술가의 숙명을 응시하고 있는 우리 앞의 이 작가, 천희란은 누구인가.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작품을 향해 나아가는 예술가들을 그려내는 동안 천희란의 내면에는 어떤 직시와 회피의 긴장이 있었을까. 바꿔 말해 천희란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그러나 생이 다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결국 최종적인 버전을 만들어내게 될 그 진실은 무엇일까. 그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혹은 말하지 않기 위해 이토록 죽음으로 가득한 책을 쓴 것일까. 」
< p .329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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