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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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행복한 시간은 가장 짧다. 눈에 오랫동안 담아두고 싶은 아름다운 가을 풍경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시간도. 그럴 땐 문득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채로, 행복한 채로 영원히 멈출 수는 없을까.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영원할 것 같던 젊음도 천천히 저물어간다.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웃을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이들과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시대를 공감하고, 함께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혼자 이 세상에 태어나 고독한 인간에게 주어진 작은 축복일지 모른다. 
얼마 전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라는 일본 영화를 봤다. 막 사랑을 시작하는 아름다운 커플 이야기 같았는데 알고 보니 그들의 시간은 완전히 맞물려 거꾸로 돌아간다는 설정이었다. 남자는 정상대로 나이 먹어 가는데 여자는 거꾸로 어려지는 세계에 산다. 두 사람이 동시에 20살이 되는 시기에 딱 30일 동안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남자의 첫 키스, 첫 데이트가 여자에겐 모두 마지막 키스, 마지막 데이트가 된다는 설정이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다가 영화 끝에 가서는 마음 아파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함께하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슬픈 일인지 미처 몰랐다. 

《시간을 멈추는 법》의 주인공 톰 해저드는 나이가 많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아주 많다. 무려 439살이나 먹었으니.  그는 드라마 <도깨비>의 공유나 <별에서 온 그대>의 김수현처럼 죽지 않는 불사의 캐릭터는 아니다. 다만 '애너 제리아'라는 병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노화가 15배 정도 느리게 진행된다. 겉보기엔 40대 초반의 모습이지만, 그는 1500년대에 태어난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그것 말고 그에게 다른 능력은 없다. 평범하고 고독한 인간일 뿐인 것이다. 다행히 그와 같은 병을 가진 이가 톰 한 명만은 아니어서 그들은 앨버트로스 소사이어티라는 조직에 속해 서로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숨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앨버트로스 소사이어티의 보스 핸드릭이 톰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첫 번째 규칙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거야."
그는 말했다. 
"다른 규칙도 있지만 이게 가장 중요해.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 사랑에 계속 빠져있으면 안 된다는 것. 백일몽 속에서도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 이 규칙만 잘 지켜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p.7>

앨버트로스들에게 사랑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은 기본적이고도 당연한 욕구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 아닐까. 톰은 4세기 전 여인 로즈와 사랑에 빠졌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도 낳고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나이 들어가는 로즈의 시간을 톰은 잡을 수 없었다. 거기다 오랫동안 전혀 나이 들지 않는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그마저도 떨어져 지내야 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녀라고 몰아붙이는 미신이 유행했던 그 시절, 톰은 자신의 어머니를 마녀재판으로 잃은 것처럼 로즈도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 이후 400년 넘는 시간을 톰은 불면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그의 유일한 삶의 희망은 딸 매리언을 찾는 것이다. 그녀도 톰처럼 '애너 제리아'에 걸렸는데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이후 4세기 이상 만나지 못하고 있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톰의 인생을 보여준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살며 인연을 맺었었고, 작가 피츠 제럴드와 우연히 술집에서 마주치기도 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시절이 톰과 함께 생생한 현재처럼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현재 톰은 런던에서 역사 선생님으로 새 인생을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자꾸 그의 맘을 흔드는 여인 카미유가 나타났다. 그는 앨버트로스의 규칙을 과연 잘 지켜낼 수 있을지.

《시간을 멈추는 법》은 이미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으로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얼굴을 톰에 덮어씌워 상상하며 읽었다. 컴버배치 외에 다른 배우는 상상이 안될 정도로 너무나 딱 맞는 배역이 아닐까 싶다. 소설은 SF 적인 소재를 가져다 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철학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는 작가 매트 헤이그는 400년이라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그물처럼 흥미롭게 이야기를 짜내면서도 인간과 사랑에 대한 다양한 철학도 잘 녹여놓았다.  

난 개인적으로 재미난 책을 읽을 때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더라. 
천년을 살면서 수많은 책들을 다 읽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행복하려나.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늙어갈 수 없는 고독함은 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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