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동네에 짝꿍씨와 즐겨 찾는 좋아하는 음식점이 있다. 밤늦게까지 음식을 팔기 때문에 야밤에 갑자기 출출해지는 경우, 천천히 마실을 나가서 볶음밥과 탕수육 같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오곤 하는 곳이다. 어느 날 그 음식점 앞을 지나가다가 매장에 불이 났었는지 시커멓게 타고 남은 재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운영하던 음식점이 새카맣게 탔으니 주인장은 얼마나 마음이 탔을까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얼마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모습으로 같은 가게가 재오픈 했다. 예전엔 좀 올드 한 구조였다면, 새로 오픈한 가게는 훨씬 깔끔하고 밝아진 인테리어였다. 혹시 리모델링 하려고 일부러 불을 낸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활기차게 영업하는 가게를 보며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더랬다.

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서운 존재다. 산이든 집이든, 어딘가에 불이 난다는 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말과 동의어다. 하지만 무서운 불도 타고나면 무언가를 남긴다.

들불을 본 적 있어?
세상이 끝날 듯 모두 타버리고 나면 
땅은 더 비옥해지고 새로운 것들이 자라지. 

그에 걸맞게 책은 시작부터 활활 불타는 모습과 함께 시작된다. 깨끗하고 부유한 마을에 사는 완벽한 리처드슨 가족의 집이 활활 불타고 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세상이 끝난 듯 무섭게. 그걸 지켜보는 리처드슨 부인과 자식들은 분명 막내 이지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불타는 집을 바라볼 뿐이다. 도대체 왜 이런 난리가 일어난 걸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 그 순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리처드슨가의 집에 세 들어 사는 미아와 펄은 조용히 자동차를 타고 이 도시를 떠난다. 소설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처음 시작은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고 조용한 마을 셰이커 하이츠의 셋집에 미아와 펄 모녀가 이사 오면서 시작되었다. 사진을 찍어 예술을 행하는 미아는 자신의 딸 펄과 함께 언제든 원하면 간단하게 짐을 싸서 주거지를 옮겨 다니는 집시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지금껏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고, 무언가 불편해지거나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즉시 그곳을 떠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셰이커 하이츠에서는 뿌리내리고 살아보고자 했다. 지금껏 엄마와 방랑하는 삶을 살아온 펄은 이번엔 정말로 한 곳에 정을 붙이고 살 수 있다는 것에, 언제 떠날지 몰라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도 못했던 것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리처드슨 가족과 미아 모녀는 지금껏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다. 셰이커하이츠에서 오랫동안 부유하고 안정적인 삶을 뿌리내리고 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이들 부부는 참으로 완벽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엄마와 함께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펄과 리처드슨 가의 아이들은 너무도 다른 서로에게 매혹되었다. 렉시, 트립, 무디, 이지는 각각 다른 개성을 지닌 리처드슨 가의 아이들이다. 펄과 각각의 아이들이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변화시켜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작은 불씨는 어디에서나>에서는 일일이 줄거리를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책을 읽다 보면 인종, 모성애, 평등, 행복, 사랑,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에피소드들이 많다. 이야기들이 세밀하게 서로 연관되어 다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조라서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지겨울 틈 없이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또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해 꽤 정성스럽게 많은 페이지를 들여 설명하고 있으므로 각 등장인물에 대해 잘 아는 상태에서 전체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단연 미아다. 자신만의 색다른 시선으로 사진을 찍고 그것의 예술적 변형을 통해 마음과 메시지를 전할 줄 아는 진정한 예술가다. 그녀가 왜 남편도 없이 딸과 함께 전국을 떠돌면서 가난하게 방랑하는지에 대한 스토리가 흥미로웠다. 또한 비슷한 의미를 지닌 사건들이 소설 속에서 거미줄처럼 엮이면서 같은 사건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 구조가 꽤 치밀하고 재밌다. 

「 "가끔은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 길을 찾기도 하거든." 
미아는 마땅한 설명을 찾으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들불이 일어난 뒤처럼. 몇 년 전 네브래스카에 있었을 때 들불을 봤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보여. 땅이 전부 타서 까매지고 초록빛을 가진 모든 것은 사라지지. 하지만 그 뒤 토양은 더 비옥해져서 새로운 것들이 자라날 수 있게 돼."」 
<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p.436>

모든 것이 불속에 사라진 리처드슨 가족은 과연 새롭게, 좀 더 비옥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을까? 
우리 동네 음식점이 화재에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환골탈퇴하여 더 멋진 음식점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혀 조용히 스파크를 튀기는 불꽃같은 소설을 만나고 싶다면,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를 읽어보시길. 
차가운 것, 뜨거운 것, 타고 남은 재와 같은 것이 여기에 다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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