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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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공간이지만, 분명 돈을 벌기 위해 돌아가는 경제조직이다. 환자 한 명 한 명이 그들의 수익이며, 환자 수가 늘어갈수록 또 오랜 기간 입원할수록 그들은 돈을 번다. 병원은 사회에 꼭 필요한 공공재적 조직이면서, 동시에 차가운 자본주의적 존재다. 가족이 아파 병원을 찾아본 사람은 느낄 것이다. 한시가 급해 미칠 것 같은 환자의 가족과 별개로 그 모든 급박한 현실이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병원의 무서운 뒷모습은 차라리 알기가 무섭다. 


현대문학의 핀 pin 시리즈 첫 번째 주자 편혜영의 소설 <죽은 자로 하여금>은 이인 시에 위치한 선도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담았다.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의사들의 메디컬 드라마는 아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음울하고 소름 끼친다. 어떤 커다란 존재가 작은 존재에게 강요하는 순응, 그것을 지켜내려다 보니 어느새 타락하고 있는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인 시는 소설 속 가상의 도시다. 한참 조선업이 활개칠 시절 잘 나가던 이인 시는 조선업의 불황과 함께 도시 전체가 유령 도시화되었다. 가게들은 문을 닫고, 주변의 원룸촌들은 텅텅 비어버렸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도시를 빠져나갔고, 빠져나가지 못한 나머지 노동자들은 매일 술독에 빠져살고 있다. 사람도 거의 남지 않은 유령도시에 덩그러니 남은 선도병원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소설 속 이석과 무주는 선도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원무과 직원이다. 

이석의 아들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몇 년째 의식도 없는 상태다. 이석은 사랑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항상 병원에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모범 직원이다. 이번에 선도병원으로 새로 옮겨온 무주를 살갑게 대해준 이석에게 무주는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어느 날 사무장의 업무 지시로 인해, 병원 내 비리 직원을 찾아내야 한다고 느낀 무주는 서류를 살펴보다가 이석의 오랜 횡령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사무장에게 알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무주는 갑자기 불타오르는 정의 의식에 사로잡혀 은밀한 방식으로 이석을 고발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주를 괴롭히기 시작하는데.....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에게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에 가게 해달라고 하자, 예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영적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예수 자신을 따르는 제자 됨의 상태에 완전히 투신하라는 의미로 쓰인 말이라 한다. 이 말을 작중 이석이 농담처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어쩌면 집단의 관행이라면 인의를 묻지 말고 순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 말일 것이다. 

이석과 무주의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순응과 타락은 작품 전체에 걸쳐 서서히 숨을 조여드는 것 같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문제들, 관행을 따를 것이냐 혹은 나만의 정의를 따를 것이냐 하는 문제는 너무나 어렵다. 특히나 무주가 병원의 명령에 순응하여 몇 달째 입원비를 못 낸 나뭇잎처럼 비쩍 마른 환자를 쫓아내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환자는 입원실에서 매몰차게 쫓겨나면서도 무주에게 "미안합니다" 하고 말한다.  

「다 빼앗길게 분명한데도 이 사람은 왜 사과부터 할까. 뭐가 미안한 걸까. 이렇게까지 하면서 남고 싶은 걸까. 이렇게 악착같이 구는 이유는 뭘까. 왜 어떤 삶은 굴욕과 함께 지켜내야 하는 걸까.」 
< 죽은 자로 하여금 p.166>

어쩌면 편혜영은 굴욕과 함께 지켜내는 삶에 대해 쓰고 싶어 이 긴 이야기를 풀어낸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를 둘러싼 큰 존재에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는 타락한 삶, 그러면서도 자신은 나름의 정의를 위해 행동했다며 위안하는 굴욕적인 삶.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그렇게 답답했나 보다.
모든 삶은 어쩌면, 항상 굴욕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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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4: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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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1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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