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특별판)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금 딱 요맘때처럼 날씨가 그리 덥지도 춥지도 않을 때, 한밤중에 산책 나가서 거니는 걸 좋아한다. 편의점에서 맛있는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핥아먹으며, 짝꿍과 집 주변의 공원을 재잘거리며 거닐다 보면 '아,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싶어진다. 낮의 화창한 느낌과는 또 다른 밤 시간 만이 주는 특별한 느낌이 있다. 제목만으로 그런 느낌을 주는 소설을 꼽아보자니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 또 이 소설 모리미 도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딱 내가 원하는 밤의 정서를 잘 표현해주는 제목인 듯하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이번에 소설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개봉되면서 훨씬 화려한 표지로 돌아온 개정판을 읽게 됐다. <밤의 피크닉>은 정말 마냥 밤새도록 걸으면서 보이는 신선한 풍경을 진짜처럼 보여주는 현실감 있는 소설이라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붕붕 떠있는 듯한 다소 판타스틱 한 소설이다.   


밑도 끝도 없이 천진난만한 검은 머리 소녀와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눈도장 한번 찍겠다며 끝없는 최. 눈. 알(최대한 그녀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기) 작전을 펼치는 찌질한 선배의 일방적 로맨스 이야기이자, 온갖 신기한 괴짜들이 출연하는 괴짜 판타지 소설이기도 하다. 책을 읽기 전에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애니메이션 영화 예고편을 먼저 봤는데, 천연 색상으로 표현된 독특한 느낌의 애니메이션이라 특이하단 느낌이 있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런 이야기라면 그렇게 환상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다 제정신이 아닌 듯 독특한 사람들 천지지만, 그래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매력들을 제각각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밤의 듀오 히구치와 하누키, 돈 많은 괴짜 이백씨, 비단잉어 사업자 도도씨, 빤스 총반장 등등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싶으면서도 그 자체로 존재감을 뽐낸다. 그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것은 선배의 열렬한 짝사랑의 주인공, 청초한 검은 머리 아가씨다. 학교 클럽 선배와 번번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마주치면서도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아! 선배, 또 만났네요!" 하고 지나가버리는 눈치 꽝, 센스 꽝이면서도 술은 미친 듯이 잘 마시는 귀여운 매력의 아가씨다. 

「입에 머금을 때마다 꽃이 피는데 그것은 입안에 아무 맛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뱃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작은 따스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깜찍해서 마치 뱃속이 꽃밭이 되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시고 있는 동안 뱃속에서부터 행복해지는 거예요. 술 마시기 시합을 하는 나와 이백 씨가 계속 싱글벙글 웃었던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아아, 이렇게 좋을 수가. 마시다가 죽어도 좋겠어.
<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p.80>

아, 이 표현을 보면서 진정으로 술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체 뱃속이 꽃밭이 되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 너무 좋아서 마시다가 죽어도 좋겠는 기분은 어떤 건지ㅋ 마냥 착하고 순수해 보이기만 하는 이 검은 머리 아가씨는 술에 있어서 만큼은 일가견이 있어서 그 천하무적 이백씨와의 술 대결에서 이겨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그것도 저렇게 행복한 얼굴로 말이다. 

「"그냥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지."
이백 씨가 그런 말을 한 것 같았습니다. 
"맛있게 술을 마시면 돼.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이 백씨는 행복한가요?"
"물론"
"그건 정말 기쁜 일이에요."
이백 씨는 빙그레 웃고 작게 한마디 속삭였습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p.81>

이 둘의 대화는 늦은 밤 좋은 사람과 술 한잔 기울이며 알딸딸한 기분에 취해 나누는 즐거운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밤은 이런 매력을 지녔다. 낮에 마시는 술은 결코 요런 낭만을 느끼게 하진 못하는 법이니까. 

책을 읽고 나니 애니메이션에서 다양한 장면들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너무 궁금해진다. 헌책 시장에서의 은밀한 불냄비 경매, 대학교 축제에서의 「괴팍왕」 게릴라 연극과 축지법 고타츠 등 짝사랑 로맨스 이야기 위에 얹어진 기상천외하고 이상한 이야기들 말이다. 작가는 평소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넘쳐나 그걸 토대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머릿속 상상을 모두 담아서 쓰자니 이야기가 무한정 길어질 것 같아 고르고 골라서 이런 이야기를 썼단다. 필시 작가가 제정신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ㅋㅋ)

그나저나 선배의 최. 알. 못 작전은 그녀에게 먹혀들었을까? 순수함이라는 무기로 철벽을 친 검은 머리 소녀는 과연 선배의 짝사랑에 응답해줄 것인지. 그건 소설에서 보시길. 

검은 머리 아가씨와 함께 조금은 기상천외하고 판타스틱 한 #밤마실 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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