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체인 아르테 오리지널 12
에이드리언 매킨티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가지를 기억해라. 첫째, 네가 처음도 아니고 분명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둘째, 명심해라, 이건 돈 때문이 아니라 체인 때문이라는 걸."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은 범죄의 사슬에 몰입하게 된다. <체인>을 여는 첫 장부터 읽는이는 주인공 레이철 가족과 함께 사슬을 풀어 마침내 탈출하고, 기어이 사슬을 끊어내고자 하는 목숨 건 전투를 이어나갈 것이다. 에이드리언 매킨티의 <더 체인>이 가진 흡입력이 대단하다.



착실히 암을 이겨내며 딸 카일리와 자신을 위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이어가던 레이철에게 악랄한 장난같은 사건이 발생한다. 카일리의 납치, 그리고 거액을 요구하는 협박 전화. 그것 뿐이 아니다. 자신과 카일리마저 범죄에 개입토록 만드는 잔인한 지시가 이어진다. '체인'에 걸려든, 혹은 '체인'과 하나가 되버린 레이철. 딸을 구하기 위한 엄마의 피말리는 투쟁이 시작된다.


저자 에이드리언 매킨티는 2012년 멕시코시티에서 발생한 '피해자 교환 납치'라는 개념을 접하고 난 뒤 <더 체인>을 구상했다고 한다. 책에서 '체인'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감정인 사랑을 이용해 돈을 버는 끔찍한 장치로 작용한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 형제자매간의 사랑, 또는 연인의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는 먹히지 않을 수단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전혀 없거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시오패스만이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체인'이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 때문에 자식이 위험에 처하는 일을 당해봐야 비로소 공포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체리철의 말은 옳다. 부모에게 인생 최악의 일이란 것은 죽음이 아니라 자식에게 변고가 생기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마저 부조리에 빠져들게 하는 '체인'에 몸서리치면서도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레이철의 노력이 고단하다.



<더 체인>은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실종된 소녀들'에서는 '체인'에 걸려든 레이철의 딸을 구하기 위한 분투가, '미궁 속 괴물'에서는 '체인'을 만든 이들의 전모와 맞서 싸우는 과정이 그려진다. '마약과 섹스 컬트 대학살'의 주인공 문빔과 머쉬룸에서, 올리버와 마거릿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는 쌍둥이 남매는 존재 그 자체로 섬뜩하다.


'당신은 벌판에서 여우 세 마리를 죽이고 노란 화살을 받게 됩니다.'

역경(易經)을 펼쳐 든 레이철. 육효 중 뇌수 해(雷水解) 해방 부분의 점괘는 중요한 암시가 된다.


한 번 '체인'에 들어오면 영원히 소속된다는 무시무시한 협박, 어느 때고 자신과 가족을 지켜보고 있는 '체인'의 지배자들은 마지막장까지 레이철을 옭아맨다. 마치 낙하산에서 내리니까 지뢰밭인데 심지어 출구도 없는 형국이다. 누군가를 미끼로 잠재적 배신자마저 가려내는 '체인'의 치밀함은 레이철을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도록 만든다. 그녀를 갉아먹고 있는 몸속의 'C'는 암(Cancer)이 아니라 체인(Chain)이다.


그러나 레이철을 절망에서 구하는 것은 역시 삶에서 필요한 바로 그것-가족, 친구, 응원-이란 점을 <더 체인>은 강조한다.



개방과 공유라는 허울 속에 무방비 상태로 SNS에 빠져 있는 실태에 대해서도 <더 체인>은 적절한 비판을 가한다. 인스타그램에 빠져있다 납치당하는 장면, 새로운 희생자를 찾기 위해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탐색하는 모습, SNS를 통한 과도한 정보 노출로 '체인'에 걸려드는 가족 등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지적이다.


"레이철은 차츰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의 인기 주제에서 밀려난다. 어떤 불쌍한 다른 인간이 나타나 그녀의 자리를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불쌍한 인간은 그 후에 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아주 흔해빠진 상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쿄의 마야 Maya in Tokyo K-픽션 27
장류진 지음, 채선이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국에 살고 있을, 특히 일본에 살고 있을 많은 한국인이 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정체성, 그것과 관계없이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른 시각. 장류진의 <도쿄의 마야>는 바로 이 시각에 대해 담백하게 풀어 놨다. 몇 장 되지 않는 단편 속에 많은 행간을 넣어두면서, 독자로 하여금 더욱 깊은 생각으로 이끄는 공간을 열어 뒀다.


<도쿄의 마야>는 '경구형'에 대한 이야기이자, '경구형'의 딸 '마야'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속 화자 '나'는 결혼 후 처음 맞는 아내의 생일을 맞아 도쿄 여행을 떠난다. 항공권 사이트에서 저렴한 도쿄행 티켓을 발견하고, 도쿄에 가보고 싶다던 아내의 말을 떠올랐으며, 부부가 낸 연가에 주말을 끼워 '생일 여행'이라고 이름 붙인 여행에 나서면서 책은 시작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내가 도쿄에 있는 '경구형'을 떠올린 것은 거의 마지막 단계다.



'경구형', 한국이름 '안경구'는 나의 나이많은 대학동기다. 자신의 이름을 비롯해 우리말을 거의 하지 못하는 재일교포 경구형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에 대한 시선은 '다른 동기들'과는 다르게 출발한다. 해외교포라는데서 오는 선입견, 우리와는 다른 옷차림과 말투. 


'저 사람은 한국 사람에 가까울까, 일본 사람에 가까울까'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시작된다.


'경구형'이 보여주는 모습역시 일관적(?)이지 않다. '씨발'이라는 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모습에서 친근감을 주다가도, 위화감을 가질만큼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면을 기습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냥 발음 좋은 '도쿄'가 아니라 진짜 일본사람의 '도쿄'가 입에서 나올 때면 한참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러다가도 어눌한 말투로 "나카타 좆밥, 박지성 짱짱."이라며 웃어보일 때는 '울트라 닛폰'이 아닌 '붉은 악마'다.


현지인들이 찾을 법한 스시집에 데려간 경구형과의 대화.


"여기가 진짜 맛집이야. 아베의 입맛이 있는 집이거든."

"아베가 단골인가봐?"

"아닌데."

"총리 세프인가?"

"아닌데."


몇 차례 '아닌데'가 이어진 후에야 내려진 결론은 '총리가 먹는 좋은 김을 쓰는 스시집'이라는 뜻이란다. 이 간단한 말조차 재일교포와의 대화는 어렵다. 스시를 손으로 집어 먹는 일본 사람들, 그 속에 젓가락을 쓰는 나는 이유없을 위화감을 갖는다. 아내처럼 그냥 일본 사람을 따라 손으로 먹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말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입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경구형'의 아내역시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의 사이에 놓여 있다. 이름은 분명 한국 사람이지만, 나와 아내에게 먼저 다가오는 모습은 '거의 일본 사람'이다. <도쿄의 마야>는 마지막 부분 의외의 메시지를 갑자기 툭 던져 놓는다.


"일본 사람들은 듣던 대로 정말 친철하네요."라는 아내의 말에 '경구형'은 "원래 일본놈들이 겉으론 친절해요."라고 답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일본놈'이라는 말은 '거의 일본사람'이라는 오해를 벗어놓기에 충분할 지 모르지만, 반대로 '거의 한국사람'과 사이에 놓인 '경구형'의 위치가 그대로 드러난다.


경구형이 안고 있던 아기 '마야'. 마야역시 경구형의 사촌 누나처럼 일본 성, 일본 이름 모두 따로 갖고 있다. '거의 경구형'의 얼굴을 하고 있는 조그만 생명체, 지금은 '마야'라고 불리고 있는 아기에게 나는 질문한다.


"아가야, 이름이 뭐라고?"

뺨에 눈물자욱이 말라 있던 마야는 이제 말없이 웃기만 한다.


서울에, 도쿄에, 그리고 그 어딘가에 많은 '경구형'이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 조차 누구에겐 또 다른 '경구형'으로 비쳐지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거의 어디 사람'이 아닌 그냥 '경구형'이길, 마야역시 그저 '마야'로 존재하길 <도쿄의 마야>는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스벨트 게임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라운드에서 하나가 되자."


루스벨트 게임. '야구에서 가장 재미있는 스코어는 7대8'이라는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말에서 따왔다. 양팀이 호쾌한 타격전을 통해 점수를 주고 받으며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응원하는 이로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야구 경기. 여기에 대역전극이 벌어진다면 흥분의 정도는 더욱 커지리라. 


이케이도 준(池井戸潤)의 <루스벨트 게임(원제:ルーズヴェルト・ゲーム)>은 꿈을 쫓는 야구인, 직장을 잃을 수 없는 사회인, 회사를 살려야하는 기업인들이 섞여 마침내 '하나'가 되는 감동을 그렸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맞아 도산 위기에 몰린 회사의 존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마치 양보할 수 없는 승리를 놓고 격돌하는 한 판 야구 경기와 같다.



예기치않은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전자부품을 생산해 대기업인 제조업체에 납품하는 아오시마제작소는 가격인하 요구와 주문 물량 감소라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여기에 과거의 명성과는 달리 맥빠진 경기력으로 연패를 거듭하면서 회사 이미지에 도움은 커녕, 오히려 짐이 돼버린 야구팀이 있다.


<루스벨트 게임>은 아오시마제작소, 아오시마야구팀, 그리고 여기에 속한 한 명 한 명 구성원들이 생존을 놓고 벌이는 사투를 그려냈다.


"회사의 숫자에는 사람의 숫자와 물건의 숫자가 있지. 매입 단가를 줄이는 물건의 숫자라면 아무리 줄여도 상관없어. 하지만 해고가 따르는 사람의 숫자를 줄일 때에는 경영자의 '이즘(ism)'이 필요하네." 


늘어가는 적자의 폭을 줄이기 위해 부득이 구조조정을 선택한 아오시마제작소의 호소카와 사장에게 설립자 아오시마 회장은 태연하게 충고한다. 경영자가 가져야할 '사람'과 '물건'을 보는 가치관에 대해, 그리고 무엇을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아야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둘 해고자가 발생하고, 막대한 운영비를 소모하는 야구팀마저 유지하기 힘든 상황. 그 속에서 '그라운드에서 하나가 되자'는 설립자 아오시마 회장의 구호가 호소카와 사장을 포함한 모든 직원의 가슴 한 가운데 자리잡기 시작한다.


"각각 1점씩 점수를 얻어 4대4가 된 게 아니라, 처음에 4점을 빼앗기고 쫓아간 덕분에 이 경기가 더욱 재미있지 않나? 절망과 환희는 종이 한 장 차이일세. 뭔가와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루스벨트 게임>이 주는 메시지는 목숨을 건 결투를 치러내야 하는 아오시마제작소와 아오시마야구팀 모두에게 통한다. 회사로서도, 야구팀으로서도 절대로 질 수 없는 상대 미쓰와전기와의 승부에 읽는이는 점점 빠져든다. 게다가 아오시마야구팀의 마지막 경기가 될 지도 모르는 이 승부는 <루스벨트 게임>의 하이라이트다.


흔히 스포츠를 두고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부르지 않나. 아오시마 회장도, 호소카와 사장도, 과거의 아픔을 딛고 새롭게 꿈을 던지는 투수 오키하라도 치열하기 때문에 빛이 난다. <루스벨트 게임>이 재미있는 까닭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플러 수용소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죄가 무슨 죄야? 나쁜 짓하는 사람이 죄지, 인마!"


한 영화에서 나온 대사다. 범죄자를 옹호하는 듯한 말에 검사로 나온 최민식의 일갈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고호의 <악플러수용소>를 넘기며 이 영화의 장면이 다시금 떠오른다. 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가차없는 응징이 잘못된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고, 제대로 된 내일을 만든다는 신념이 <악플러수용소>에 가득하다. 어쩌면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극도로 갈라진 사회, 이를 이용해먹으며 더욱 분열과 혼돈을 꾀하는 정치권력이 득세하는 요즘 세상에 절실한 가치일 수도 있겠다.


<악플러수용소>는 서기 2024년, 그러니까 머지않은 미래에 벌어지는 상황을 그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더 이상 사이버 윤리교육은 허울에 불과하며, 법이란 것역시 제 입맛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고장난 저울로 전락한 지 오래. 세계 IT강국이라는 보기 좋은 훈장만 달았을 뿐 그 배설물을 처리할 자정능력을 상실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그대로 나타낸다.



"정부는 오늘 2024년 1월 1일12시를 기점으로 인터넷 악플러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온라인 범죄행위자 교정수용소, 이른바 '악플러수용소'가 설치되고, '바퀴벌레는 완전박멸은 불가능하지만 개체수는 줄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경찰, 정신의학과 교수 등이 전국에서 잡혀온 악플러들에게 심판을 내린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는 과정에 대해 <악플러수용소>는 묘사한다.


역경을 딛고 국민배우로 성장한 고혜나의 자살 사건, 그 이면에 바퀴벌레처럼 숨어있던 악플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최고의 인기를 얻었음에도 익을 수록 고개 숙이는 벼처럼 오히려 겸손하고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배우, 끊임없는 역사 공부를 통해 제대로 된 가치관을 정립해가는 연기자, '백마를 살 돈이 있는 여자는 백마 탄 왕자를 꿈꾸지 않는다'는 소신을 피력하는 여성이었던 고혜나는 역으로 악플러들에게는 '짓밟고 싶고, 상처 주고 싶은 피사체'의 모든 조건을 갖춘 대상으로 비쳐진다. 완벽할 수록, 도저히 범접할 수 없을 수록 그들에겐 더욱 악랄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로 말이다.


전국에서 잡혀 온 악플러의 모습은 현실이 그렇듯 전혀 특이할 게 없다. 곧 시집갈 딸을 둔 인테리어 업자.정식 간호사를 꿈꾸며 상경한 간호조무사, 사법고시 1차 합격생, 누구나 부러워할 엄친딸 여중생, 피시방을 전전하는 백수, 평범한 누군가의 며느리 등.



"제 딸은 그저 평범한 아이입니다."

"원래 죄라는 건 평범한 사람이 짓습니다. 악마도 죄 짓기 전에는 평범했어요."


수용소에 갇힌 어린 딸을 둔 아버지의 항변에 수용소장은 최민식의 대사처럼 단칼에 잘라낸다. 속절없이 당하는 피해자를 막기 위해 더욱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 이러다 사회 전체를 범죄자로 만들 것이라는 온건론자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장면은 우리 시대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회가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관용을 베풀 때는 세 가지가 동시 발현됩니다. 거지 같은 법, 거지 같은 법관, 거지 같은 논리." 수용소장이 지적이 따끔하다. 수용소 옥상에 씌여진 'L.O.V.E'. 그 뜻은 사랑으로 교화한다는 따위가 아니다. "여기 들어온 자여, 희망은 버려라(Lasciate Ogni spetanza, Voich'Entfrate!)"


'악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무료법률상담게시판에 올라오는 많은 글이 '피해자의 고민'이 아닌 '가해자의 방패'에 관한 것이라는 현실은 독자를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별똥별에게 소원을 비는 모습을 두고 고혜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별은 죽으러 가는데, 사람들은 왜 죽으러 가는 별한테 소원을 빌어요? 명복을 빌어야지." 그냥 웃자고 한 말이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장례식장 직원입니다
다스슝 지음, 오하나 옮김 / 마시멜로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장례식장에는 '제일' 비참한 사연이란 없다. '더욱' 비참한 사연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그 누구도 자신이 제일 비참하다는 말 같은 걸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실제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절차를 돕는 다스슝(大師兄)이 쓴 <나는 장례식장 직원입니다>. 죽음을 가까이 둔 직업을 가진 저자가 실제 겪고 느낀 에피소드를 엮었다. '작은 뚱보'라는 별명을 지닌 다스슝이 장례식장에서 일하게 된 사연, 그곳 직원들과의 체험담, 망자와 이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마음으로 덤덤하게 풀어냈다.



고약한 아버지를 둔 덕에 요양보호사와 장례식장 직원이라는 일을 하게 된 다스슝은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은 '그저 그런' 삶을 살아 간다. 대단한 꿈은 커녕 결혼 생각도 없다. 그냥 지나가는 대로 살다 평안히 세상을 떠나길 바란다. 이같은 생각을 지닌 그가 쓴 <나는 장례식장 직원입니다>는 오히려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모순을 가졌다.


'어쩌다 장례식장', '매일 시체를 보는 사람들', '남겨진 자들의 얼굴', '무서운 이야기',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등 각 장의 제목에서 읽히듯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서 일하는 저자의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 진다. 무서운 귀신이 등장하기도 하며, 애절한 스토리를 지닌 가족이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피식 웃음이 나게 만드는 '사람 사는' 이야기다.


동거 중이던 남녀의 죽음. 남자의 가족, 여자의 가족 그 누구도 별로 슬퍼하지 않는 장례식 속에서 유일하게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을 발견한 다스슝. 누가 저리 슬퍼할까 알아보니 바로 집주인이었다는 웃픈 사연이 있는가 하면, 모든 가족을 죽기 위해 목을 매는 동그라미 너머로 떠나보낸 할머니의 가슴 아픈 삶역시 잔잔하게 전해진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기 위해 걸려온 전화에 "기쁘게 모시겠습니다!"를 외치고, 기독교 신자였던 시신을 싣고 오며 줄곧 불경을 틀어놓았던 다스슝의 실수담도 <나는 장례식장 직원입니다>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거나 무연고인 시신, 혹은 유가족이 거부하여 냉동고에서 몇 달 심지어 몇 년 동안 남겨진 시신을 뜻하는 '장라오(長老)'. 누군가는 곧 냉동고를 나가고, 누군가는 공문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억울해하고, 누군가는 아직도 가족들이 찾아와주길 기다리고, 누군가는 이도 저도 다 상관없다는 듯 그 자리에 있다. 냉동고 속 장라오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특히나 인상적이다.


특히 삶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회피하면서, 자신의 생명마저 가볍게 여기는 요즘 일부 행태에 대한 작가의 신랄한 지적은 새겨 들을 만하다. "정신 차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거야. 힘들어지는 건 널 아끼는 사람들뿐이라고!"


여러 형태의 죽음을 목도한 다스슝, 그러니까 장례식장 직원은 결국 이렇게 충고한다. "사랑하는 이들과 즐겁게 어울리라"고. 우리가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때, 그 '다음'이 언제일지, 또 어디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그렇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