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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고전이 좋았을까 - 오래된 문장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
신은하 지음 / 더케이북스 / 2025년 7월
평점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고전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
- 고전이 스며든 소소한 일상 이야기

최근에 다시 고전 문학에 꽂혀서 읽게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주변에서도 고전 열풍이 부는 모양이다.
고전에 관련된 다양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서 관련된 책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흐름 속에 나도 자연스럽게 편승해서 조금 더 고전에 대한 공부를 해보기로 했고, 이 책도 그런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책을 펼치고 18페이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바로 '케렌시아'라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하는 단어 때문이었는데,
작가님이 케렌시아에 대해서 말하면서 쓰인 문장 중에 하나가 내 마음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 케렌시아가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동네 카페일 수도 있고,
무인 책방이나 뒷산 산책로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채, 차 안에서 한참을 머물다 나온다고도 한다.
바로 이 문장인데, 나도 몇 년 전 답답하고 고단했던 시기가 있었다.
어떤 위로도 와닿지 않고, 누구와 있어도 마음이 쉬지 못하던 날들. 그 시기 내 유일한 안식처는,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한 주차장의 차 안이었다. 일부러 차를 끌고 나가 한적한 곳에 세워두고, 음악도 끄고, 핸드폰도 멀리한 채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없이. 숨을 내쉴 때마다 마음이 가라앉는 그 고요함이, 유일하게 나를 편안하게 해줬다. 그래서였을까. 작가님이 말한 ‘차 안의 케렌시아’에 유난히도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고전이 좋았을까'는 단순히 고전 문학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책이 아니었다.
고전을 좋아하게 된 작가님의 삶과, 그 고전들이 스며든 일상의 기록이었다.
처음엔 고전에 대한 소개하는 게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책장을 넘겼지만, 페이지가 더해질수록 누군가의 다정한 일기장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방과 후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던 기억, 책 속 문장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순간, 그리고 어느 날의 마음을 붙잡아준 이야기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겪어왔기에, 이 책 속 일상과 고전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들어왔다.

책 속의 고전은 단지 위대한 책이 아니다. 누군가의 삶과 함께한 책들이다.
작가님은 문학을 학문처럼 대하지 않고, 마치 친구처럼 곁에 두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더 와닿았다.
고전이 좋았다는 고백은 결국 내 삶이, 나의 감정이, 나의 시간들이 그 책과 함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고전, 자신만의 옛이야기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고전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해외의 작품을 먼저 떠올린다.
이 책 속에 나오는 변신, 호밀밭의 파수꾼, 인간실격, 고리오 영감, 안나 카레니나, 어린 왕자, 세일즈맨의 죽음, 스토너, 야간비행, 이방인, 파리대왕, 모비딕, 달과 6펜스, 월든, 노인과 바다 같은 서양의 고전 문학들은 굉장히 유명하고 깊이 있는 작품들이지만, 이렇게 고전 문학의 기준이 해외에만 머무는 듯한 분위기는 조금 아쉬울 때도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 책에서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가 언급된 것이 유독 반가웠다.
토지는 비교적 근래에 쓰인 작품처럼 느껴지지만, 1969년부터 26년 동안 집필되었고,
시대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은 대하소설이라는 점에서 현대 고전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책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국내에도 충분히 ‘고전’이라 부를 수 있는 훌륭한 현대 문학들이 많다.
조세희 작가님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황석영 작가님의 삼포 가는 길, 채만식 작가님의 태평천하, 최인훈 작가님의 광장, 오정희 작가님의 장마, 이문구 작가님의 관촌수필 등은 각각의 시대를 꿰뚫고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다.
고전이란 결국, 오래도록 살아남는 문장과 감정이 있고,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고, 삶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책이 아닐까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꼭 해외의 고전에만 집중할 필요 없이, 우리의 언어로 쓰인 한국의 현대 고전 문학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책과 멀어지고 있다. 빠르게 소비되는 컨텐츠, 점점 짧아지는 글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책을 읽는다는 건 어쩌면 사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책은 여전히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고, 방향을 바꾸고, 마음을 위로해 주는 존재라고 말이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고전이 아니더라도, 어떤 책이든 그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 책은 충분히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작가님 역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주는 고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었지만, 굳이 고전이라고 특정하지 않더라도, 한 권의 책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그래서 더욱 아쉽다. 지금의 독서 환경이, 더 많은 사람이 그런 경험을 누리기에는 너무 척박하다는 게 말이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너무 지쳐 있다. 책 한 권을 제대로 읽기엔 마음에 여유가 부족하다.
그럴수록 이런 책이 더 소중하다. 고전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책이란 무엇인가, 왜 읽는가를 되묻는 이 책이 말이다.
그리고 나는 텍스트힙이라고 불리는 지금의 현상도 꽤 마음에 든다.
보여주기식 독서라도 누군가의 삶에, 시간에, 책이 함께 할 수 있는 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모든 건 시작이 중요하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한 번 더 지금의 '케렌시아'를 떠올렸다.
한때는 차 안이었던 나의 케렌시아가 지금은 조용한 방 안으로 옮겨졌다.
책으로 둘러싸인 나만의 공간. 어릴 적엔 몰랐던, 지금은 너무도 소중한 이 고요한 시간.
책장을 넘기며 마음을 들여다보고, 과거의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이런 시간이 결국 나를 살게 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따뜻한 선물과 같은 책이다.
그리고 아직 책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고전이나 책에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다정한 손길이다. 누군가의 삶에 책이 어떻게 녹아드는지를 보여주는 너무나 따뜻한 책, 우리 모두 이 책 속의 일상처럼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