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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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사이에서


'눈먼 자들의 나라'라는 책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먼저 떠올렸다.

이름도, 주제도 너무 닮아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 작품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다른 분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영화로도 제작되고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던 사라마구의 대표작이라서 안 읽어도 이름은 들어본 사람들이 많았을테니까 말이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영국의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가 1904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인데, 사실 조지 웰스의 대표작은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됐던 우주전쟁이다.

SF의 소설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의 단편 작품이라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1995년에 출간된 사라마구의 작품보다 90년이 앞선 작품이라서

실질적으로 따지면 사라마구가 조지 웰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싶다.


​두 작품 모두 시력을 상실한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이야기의 톤과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전염병과 수용소, 인간 본성의 붕괴를 묘사했다면, 웰스는 폭력이나 혼란이 아닌 조용한 공동체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눈이 보이던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실명이라는 질병이 퍼지며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장님이 된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의 혼란과

수 세기 동안 전염병으로 인해 시력이라는 것이 서서히 사라지며 후대로 내려가면서 준비를 하고, 시력이 없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공동체의 모습은

생각해 봐도 다를 수밖에 없긴 할 것이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은 사람들이 세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가 된 외딴 협곡 속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수 세기 동안 자신들만의 질서를 세우고 조용히 살아가던 이들 사이에, 산에서 추락해 마을에 들어오게 된 한 남자 누네즈가 등장하면서 사건이 시작되는데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식의 충돌, 이방인의 시선을 통해 다시 조명되는 공동체의 논리, 이 모든 것이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전개된다.

특히 누네즈가 자신의 '시력'을 우월함으로 믿고 그것을 통해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며 독자에게 반전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공동체의 사람들은 시력을 잃었지만, 나름의 질서와 문화를 만들어내며 살아간다. 그들에겐 보는 것이 필요 없는 세계가 있다.

오히려 보이는 자인 누네즈가 점점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리감을 느끼며, 그들에게 미개한 자로 낙인찍힌 지점에서

웰스의 질문은 명확해진다. 보는 것만이 우월하며, 그것만이 정상적인 것인가?


​누네즈는 그 공동체에서 정상이 아니며, 그의 시각은 이 사회에서는 아무런 우위도 갖지 못한다. 이런 설정은 오히려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나 상식은 과연 보편적인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협의와 질서일 뿐일까?


내가 접한 '눈먼 자들의 나라'는 '내로라' 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영어 원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원문을 참고하거나 비교하며 읽기에도 유용하다.

본문 자체는 비교적 짧아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책 후반부에 실린 편집자의 말과 독후 활동,

그리고 네 편의 해설은 이 짧은 이야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깊이 있게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각 해설은 인식론적 시각, 문학적 맥락, 사회적 풍자, 심리적 상징 등 서로 다른 키워드를 통해 이야기를 파헤친다.

이를 읽으며 하나의 글을 읽고 다양한 생각으로 갈라지는 것이야말로 독서가 가진 가장 깊은 힘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이야기 하나가 이처럼 다채로운 독해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은, 고전 문학이 가진 지속적인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짧지만 깊다. 이야기 자체의 메시지도 강렬하지만, 그 이후 펼쳐지는 해석의 무대는 더 넓고 흥미롭다.

고전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금 소환된 이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단지 소설을 읽는 경험이 아니라, 독서를 매개로 더 깊은 사유와 성찰로 나아가는 여정을 선물한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한참 동안 생각이 멈추지 않는 독서를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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