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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매듭
배미주 외 지음 / 사계절 / 2025년 9월
평점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모계 전승, 속박과 연대의 두 얼굴

질긴 매듭은 다섯 명의 여성 작가가 함께 쓴 단편집이다.
배미주, 정보라, 길상효, 구한나리, 오정연. 이름만 들어도 장르와 문학적 개성이 확연히 다른 다섯 작가분들이 모여, 하나의 화두를 각자의 언어로 풀어낸다.
그 화두는 바로 모계 전승이다. 모계 전승이라는 말은 단순히 할머니에서 어머니,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혈연적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대를 가로질러 전해지는 고통이자 억압이고, 동시에 연대이자 생존의 힘이다.
그래서 이 단편집을 읽다 보면, 모녀 관계의 굴레와 애증을 넘어, 더 넓은 사회 속에서 억눌리고 지워진 존재들이 함께 겹쳐진다.
책을 펼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 자신에게로 향했다. 나 역시 엄마의 딸이자, 두 딸을 둔 엄마다.
딸이라는 존재는 내게 기쁨이자 희망이지만, 동시에 불안과 책임을 안겨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질긴 매듭 속 인물들이 직면한 고통과 전승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아이들의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어질지도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이 책은 결국 독자로 하여금 자기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어떤 서사는 환상적이고 미래적인 장면을 끌어오고, 또 다른 서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차별과 폭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읽히는 것은 ‘대물림’이다. 전해지는 것은 꼭 물질적인 유산만이 아니다.
사소해 보이는 편견, 무심코 건네진 상처, 사회 구조 속에 내재된 차별 역시 고스란히 전승된다. 그 질긴 매듭은 쉽게 끊어지지 않고, 때로는 목을 죄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절망만을 말하지 않는다. 고통과 차별의 계승을 직시하면서도, 그 굴레를 끊기 위한 몸부림과 다른 형태로의 전승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때로는 매듭을 거부하고, 때로는 그것을 새롭게 엮어내며, 때로는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간다.
그 다채로운 결말들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우리가 흔히 보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이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순간, 이미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전복이 일어난다.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이 단편집이 단순히 여성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 서사를 중심에 두되, 거기에서 파생되는 소수자, 노동자, 폭력의 희생자, 진화 속에서 스러져가는 존재 등 사회적 약자들이 포착된다.
다수의 질서 속에서 없는 존재로 취급된 이들이 오히려 서사의 중심에 서며, 강렬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것은 단순히 모계 전승의 이야기라기보다, 인간 존재가 겪는 억압과 그것을 넘어서는 연대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작가님들의 개성도 책의 매력이다. 정보라 작가님의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는 환상적 상상력, 배미주 작가님의 세밀한 심리 묘사,
길상효 작가님의 현실 비판적 시선, 구한나리 작가님의 사회적 문제의식, 오정연 작가님의 감각적인 문장이 서로 충돌하고 조화를 이루며 다층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단편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큰 그림처럼 읽히는 이유는, 같은 화두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으며 다시금 두 딸을 생각한다. 나는 어떤 매듭을 이어주게 될까. 혹은 내가 무심히 묶어둔 매듭을 아이들이 힘겹게 풀어야 하는 건 아닐까....
질긴 매듭은 부모로서, 특히 딸을 둔 부모로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동시에 이 책은 이야기가 지닌 힘을 새삼 일깨워준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를 구할 것이다.
고통을 기록하고, 억압을 드러내며,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이야기의 힘. 질긴 매듭은 그 힘을 믿는 다섯 작가들의 선언이자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