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자개장
박주원 지음 / 그롱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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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장 안의 시간, 기억, 사랑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마음은 전할 수 있다


SF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외계 행성, 우주선, 사이보그, 초능력 같은 이미지가 가장 강하고,

최근 들어서는 인공지능이나 Cli-fi (기후 재난 SF, 클라이 파이) 쪽이  먼저 떠오르는 나에게 '판타스틱 자개장'은 무척 신기하게 다가왔다.


반지하와 노후 아파트, 자개장 같은 정겨운 한국적 소재들이 SF의 외피를 두르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자개장이 타임머신의 용도로 사용되는 게 특이했다. 이 책은 전형적인 SF의 형태를 따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 가족적인 부분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반짝이는 자개장 안에 담긴 세계, 그 안에 숨어 있는 가족의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써야 할, 그리고 우리만이 쓸 수 있는 한국형 SF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서른아홉 살의 소설가 지망생 자연이 공모전을 기다리던 중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는 데서 시작된다. 병원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췌장암 말기, 그것도 이미 혼수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무심하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대했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응어리진 채 남아 있던 자연은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혼란스럽고 억울하기만 하다. 그런 자연이 자신의 방에 있는 오래된 자개장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시간은 하루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 뒤로도 자개장은 계속해서 과거의 시간으로 자연을 데려간다. 하루 전, 이틀 전, 8일 전, 그리고 2주 전...

시간은 계속 거꾸로 흐르고, 자연은 그 안에서 아버지를 살릴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연은 자신이 아버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누군가를 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판타스틱 자개장이란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간 여행이라는 전형적인 SF 장르의 틀 안에서,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낸다는 거다. 작가는 SF를 스펙터클이 아닌 감정의 장치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미래보다 과거에 닿아 있고, 과학보다는 사람에 가깝다. 자개장은 단순한 판타지적 장치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이 드나드는 포탈이며, 한 가족의 침묵과 단절, 그리고 치유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표현된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핵심인 '자개장'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한국적 정서는 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반지하 방의 오래된 자개장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성장과 상처, 추억이 켜켜이 쌓인 기억의 상자 같다.

문을 열면 반짝이는 은빛 자개 무늬가 보이고, 그 안에는 말하지 못한 미안함과 전하지 못한 사랑이 숨 쉬고 있다.

작가님은 이 익숙하고 오래된 오브제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난 이 책에서 기억을 다루는 방식이 꽤 인상적이었다. SF에서는 종종 기억이 삭제되거나 조작되는 일이 클리셰처럼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회피하거나 지우려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시 마주하고 어루만져야 하는 대상이다. 기억은 간단한 데이터가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이고 서사이며, 누군가를 향한 미련과 사랑의 증표다. 그래서 더욱 따뜻하게 다가온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공감한 건, 바로 자연의 위치였다.

나도 나름 독립을 했다가 다시 돌아온 캥거루족으로서, 자연의 불안과 복잡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독립하지 못한 나약함에 대한 자책,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

이 시대는 나 같은 사람에겐 너무나 버겁고, 그 버거움을 버티다 보면 결국 마음 어딘가가 고장 나 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나름의 위로이자 또 하나의 경고였다. 지금이라도, 아주 늦기 전에 마음을 표현하라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이해해 주길 바라고, 남보다 쉽게 상처를 주고, 너무 늦게 후회하는 존재들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절대 후회하지 말라고 이 이야기가 조용하지만 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가족이란, 어떻게든 시간을 돌려서라도 다시 붙들고 싶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애도'에 관한 이야기다.

미처 표현하지 못했고, 후회는 남았지만 기회는 지나간 되돌릴 수 없는 그 관계에 대한 아프고도 따뜻한 애도.


'판타스틱 자개장'은 그저 신선한 SF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SF라는 장르를 빌려, 한국적인 정서와 감정,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따뜻하게 담아낸 하나의 정서적 시간 여행을 그린 한 편의 성장 소설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누군가에게 문득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 지금 이 순간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들. 이 이야기는 시간을 되돌리는 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마음을 전하는 법을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언제쯤 나도 이 미안함을 보고픈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수많은 기억이 스치고,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수많은 말이 입안에 머물렀으며, 수많은 다짐과 후회를 하게 된 소설이었다.


​한국적인 SF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고, SF보다도 간단한 시간 여행과 가족의 이야기,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가 보고 싶은 분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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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큰 뜻을 품은 자여,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세계철학전집 3
정약용 지음, 이근오 엮음 / 모티브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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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꾸만 멈춰 서는가

-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철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괜히 어려울 것 같고, 당장 내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랬다. 그리고 철학자 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은 대부분 서양의 인물들이다.

플라톤, 칸트, 니체 같은 어려운 서양 철학자들의 이름들은 어쩐지 익숙한데

우리 땅에서 공부했던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어쩐지 말문이 막히고 만다.


동양을 떠올리면 그래도 '공자'나 '맹자'라는 이름이 생각나지만 그들은 또 중국인이 아닌가?

분명 한국에도 수많은 유학자나 실학자들 그리고 성리학자들이 존재했는데 그 사실을 문득 잊고 있었다는 것이 참 부끄러웠다. 이번에 '큰 뜻을 품은 자여,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는 책을 읽게 된 계기 역시 이런 나의 견식이 좁음을 똑똑히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단지 정약용이라는 인물을 조명하는 위인전이나 전기적 기록이 아니다.

그가 생각한 방향과, 그가 살아낸 방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철학을 곱씹게 만들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정약용이라는 인물이 더 이상 역사 교과서에서 나오는 멀기만 한 위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말을 걸고 방향을 알려주는 상담사 같은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이 말은 이 책이 그만큼 나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는 뜻이기도 하다. 옛날 사람이라고 흔히 말해서 이해할 수 없는 꼰대 의식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조선시대 사람이라고 진짜 틀에 박힌 가부장적인 말을 해대는 것도 아니고 진짜 누가 들어도 그렇다 할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책을 엮은 이근오 작가님의 덕분일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을 인용하고 풀어나가려면 얼마나 많이 공부를 해야 가능한 것일까?


​이번 책은 세계철학전집 시리즈의 3권으로 1권은 데카르트, 2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로마의 황제인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고 해서 굉장히 흥미롭다고 느꼈고, 철학이 나의 생각보다 범주가 더 넓다는 것도 알게 된 것 같다. 기회가 되면 나머지 책들도 그리고 앞으로 나올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실학자라는 걸 모두가 알 텐데 실학이 무엇인지 공부하지 않고 실학이라는 말의 뜻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 역시 '실제의 참된 학문'이라는 뜻과 이 실학이라는 말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의 학문은 공리공론이 아닌 늘 현실 속의 진짜 문제에서 출발했고, 그 끝도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는 관념 속 이상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정치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고민했고 실천했다. 정약용은 말 그대로 탄탄한 유학적 기반 위에 인간적인 고뇌와 현실적 문제의식을 동시에 지닌 보기 드문 사상가였다.


책을 읽으면서 자주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나는 항상 꿈만 꾸고, 현실에서 한 발짝 나아가지 못하는가?" 제목과 똑같은... 나 그대로의 고찰이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내게 계속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면서 '큰 뜻을 품은 자여,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라는 제목은 너무나 직접적으로 마음에 꽂혔다.


나는 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지만, 막상 내딛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상을 그리지만, 현실에선 늘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정약용은 다르다. 수백 권의 책을 써냈으며, 유배라는 삶의 큰 벽 앞에서도 글을 쓰고, 제자를 기르고, 수많은 사상을 정리해 냈다. 눈앞에 있는 현실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나는 자주 '지금의 내 방향이 맞는 걸까?'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 걸까?'라고 고민하지만, 이 책은 그 물음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중요한 건 방향보다 움직임이라는걸, 조용히 알려준다. 고민만 하며 늘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움직여야 무언가 달라진다"라는 당연한 말을,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고, 남 탓을 하지 말고,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가장 단단하게, 그러나 절대 다그치지 않고 들려주는 책이었다.


또한 좋은 말을 하는 사람보다 솔직하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것은 나에게도 해당되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진심을 담아 조언을 했지만 그 사람이 그걸 수용하지 못하고, 좋은 말만 듣고 내 말은 배척할 때

그런 행동으로 인해 사람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도 적당히, 봐가면서 받아들이자.


또 하나 좋았던 점은, 이 책이 단지 정약용이라는 인물의 업적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거나 그의 위대함만을 부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그의 철학과 실천이 얼마나 우리에게 유효한지를 조곤조곤,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특히, 정약용의 철학을 현대와 연결해서 우리가 다 같이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인문서나 역사서를 넘어서 철학 입문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이 책이 '한국에도 철학이 있다'는 자긍심을 심어줬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우리는 항상 답을 멀리서만 찾으려 한다. 서양 철학에서, 혹은 유명한 해외 사례에서....

그러나 우리는 잊고 있었다. 이미 우리 땅에도 수많은 답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만 우리가 그것을 너무 무심히 지나쳐 왔다는 사실을....


책을 덮고 나서 가장 오래 남았던 문장은 제목과 같은 그 말이다.

"큰 뜻을 품은 자여,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이 말은 누군가를 꾸짖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조용히 일으키는 말처럼 느껴졌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상과 현실을 잇는 다리를 정약용이 이미 건너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제 정약용이 걸었던 다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아가며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가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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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이름으로 (라울 뒤피 에디션) - 꽃과 함께 떠나는 지적이고 황홀한 여행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라울 뒤피 그림, 위효정 옮김, 이소영 해설 / 문예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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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사이로 피어나는 봄의 얼굴

-글과 그림이 만든 작은 정원​



'봄의 이름으로'는 단순한 식물 에세이나 화집이 아니다. 이 책은 식물이라는 언어로 쓰인 인생의 짧은 기록이며, 동시에 예술가의 시선으로 풀어낸 계절의 감각이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가 남긴 문장 하나하나에는 오랜 관찰과 생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고, 라울 뒤피의 그림은 마치 그 문장에 색을 입히듯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보태니컬 아트에 관심이 많아 식물 그림을 따로 배운 적이 있다.

그리고 평소에도 식물이나 자연과학 분야를 좋아하는 편이라, 이 책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 내게 말 그대로 봄의 선물처럼 다가왔다.



처음에는 솔직히 예쁜 그림과 어우러지는 평범한 에세이겠지 하고 넘길 뻔했지만, 곧 콜레트의 문장이 얼마나 치밀하고 감각적인지를 알게 되었다. 콜레트는 식물을 그저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식물이 자라는 방식, 토양과 날씨, 그리고 생의 조건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문장에 향기가 있다면, 아마도 이 책은 신선한 흙냄새와 꽃잎 사이의 봄바람이 섞인 그런 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피의 그림들. 나는 디자인을 공부하면서도 색채가 갖는 정서적 효과를 항상 중요하게 여겼고, 색감에 꽤 민감하게 생각하는데 이 책 속에 수록된 뒤피의 그림은 정말 독보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선과 색은 식물의 생동감과 자유로움과 감성을 더 잘 드러낸다. 그가 그린 식물들은 땅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람과 햇살에 스치는 기억처럼 책장 사이를 떠다닌다.


콜레트의 글과 뒤피의 그림이 만난 이 책은, 문학과 미술이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고 조율하며 하나의 장면을 완성해 나간다. 마치 작은 정원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서 각자의 방식으로 봄을 기록하는 것처럼.....

책장을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내 기억 속 봄들이 떠올랐다. 시골 마당에서 맡던 풀 내음과 흙냄새,

보태니컬 드로잉 수업 시간에 처음 꽃잎을 따라 그리던 그 손끝의 긴장감,

그리고 우연히 찍은 들풀 사진을 확대해서 보다 줄기의 잔털에 놀랐던 순간들까지....



콜레트는 말한다. "나는 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은 단순히 정원사로서의 고백이 아니다.

그건 자연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과 맺는 정직한 관계에 대한 선언이다.

'봄의 이름으로'는 그런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게 해준다.



이 책은 봄을 상징하거나 이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봄이라는 계절을 통해 삶과 식물의 본질을 함께 들여다보게 만든다.

우리는 바쁘게 걷다 보면 길가에 핀 꽃 하나를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그러나 '봄의 이름으로'는 그 꽃을 잠시 바라보게 하고, 그 잎맥 사이에 인생의 문장을 읽게 해준다.

이 책은 식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물론이고, 삶의 리듬을 잠시 멈추고 싶은 이들에게도 따뜻한 쉼표가 될 것이다.


책장 사이로 봄이 피어난다. 잊고 살았던, 가장 순한 봄의 얼굴이 나를 마주 보며 수줍게 웃었다.

내가 봄을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무심하게 지나쳤던 그 계절이 다시금 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콜레트의 문장과 라울 뒤피의 그림이 한 겨울처럼 차갑게 얼어 있던 내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 넣어 단숨에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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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살인
카라 헌터 지음, 장선하 옮김 / 청미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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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우리가 믿는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 추리를 넘어 심리와 미디어를 이용한 새로운 형식의 소설



가끔, 소설이 아닌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카라 헌터의 '가족 살인'이 딱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단순히 잘 만든 추리소설이라고 표현하기엔 그 틀을 한참이나 넘어섰다고 느꼈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나는 문득문득 "진짜 있었던 일인가?" 하고 착각했다.

그만큼 현실적인 구성과 리얼한 연출, 그리고 정교한 몰입도는 지금껏 경험해 본 어떤 추리소설과도 달랐다.



'가족 살인'은 다큐멘터리 감독인 가이 하워드가 20년 전 자신의 의붓아버지인 '루크 라이더'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서

리얼 크라임쇼 '인퍼머스'를 제작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나는 청미래 까치 북클럽을 통해 이 책을 함께 읽고 추리를 해보는 추리단 활동을 했는데, 실제 범죄 다큐멘터리를 보고 사람들과 추리하고 분석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용의자를 추측하고, 중간중간 드러나는 단서들을 가지고 의견을 나누고, 진실에 다가가는 그 과정 자체가 이 책의 큰 재미 중 하나였다. 마케터님이 던져주는 다양한 질문들도 이 책을 더 꼼꼼하게 읽을 수 있게 도움을 준 것 같다.





책은 전통적인 소설 문체가 아닌, 다양한 형식의 문서와 미디어 조각들로 구성된다.

인터뷰 스크립트, 이메일 내용, 경찰 보고서, 제작 노트, 커뮤니티 포럼의 댓글, SNS 피드백 등등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실제로 접하는 콘텐츠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아니 오히려 더 꼼꼼하고 자세하게 자료들이 정리되어 보여진다.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줄거리’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마치 한 편의 리얼 크라임 쇼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듯한 기분에 빠져드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계속해서 의심하게 된다. 가족들은 과연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저 사람의 말은 진실인가? 다큐 제작자는 중립적인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인가?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서사와 진실을 품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100% 신뢰할 수 없다. 모두가 너무 의심스럽다.


게다가 이야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드러나는 충격적인 반전들은, 그야말로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다.

진짜 계속해서 '헐' 소리를 내뱉게 되고, 가끔은 어이가 없기도 했고, 다시 한번 책을 앞으로 넘기면서 단서를 되짚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묘미는 단순히 범인을 찾는 데 있지 않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거짓과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끝없이 되묻고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이 미디어화가 된다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페이크 다큐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 영상이 그려졌다. 단순한 스릴러 영화가 아니라, 넷플릭스나 HBO에서 방영되는 고퀄리티 페이크 다큐.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된 화면, 관계자의 목소리, 당시 사건 현장을 재현한 영상.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퍼즐을 조립하게끔 만드는 이 구조는 오히려 전통적인 드라마보다도 훨씬 강력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이건 진짜 미디어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물론, 책이 주는 특유의 몰입감은 영상과는 또 다른 맛이겠지만, 이 설정과 구성이라면

충분히 넷플릭스식 다큐 시리즈로 제작해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는 순간, 진실은 또 다른 얼굴을 한다 '가족 살인'은 단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소설이 아니었다. 이 책은 미디어가 진실을 어떻게 비추는지, 우리는 어떤 프레임으로 그것을 소비하는지, 그리고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진실은 늘 하나일까? 아니면 보는 사람의 시선과 믿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까?


책을 덮고 나서도 머릿속을 맴도는 이 질문이야말로, '가족 살인'이 단순한 추리소설을 넘어선 이유다.

지금 이순간에도 이 작품은 나에게 "당신이 믿는 진실은 정말 진실인가요?"라고 되묻는다.


만약 정통 추리소설의 형식을 벗어난 새로운 형식의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넷플릭스의 실제 범죄 다큐멘터리를 즐겨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처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추리하고 이야기하며 함께 읽기를 하는 것도 권하고 싶다. 그 경험은 정말 특별하니까...


이 책은 한 번 읽고 끝날 책이 아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단서가 보이고, 사람들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진실들이 보일 테니까 말이다. 나 역시 아마도 몇 번이고 이 책을 다시 들춰보게 될 것 같다. 마지막의 충격적인 결말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들을 되짚으며 내가 놓쳤던 부분을 다시 바라보고 추리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땐 또 어떤 감정이 들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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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나무 아래의 죽음 캐드펠 수사 시리즈 13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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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는 기억하고 있었다
– 사라진 사람과 꺾인 장미, 그리고 남겨진 진실



장미나무 아래의 죽음은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열세 번째 이야기이지만,

숫자는 이 이야기의 무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마치 독립적인 작은 세계 같아서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그 사람의 삶을 따라 걷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앞선 시리즈를 읽지 않아도 이해하는데에 어려움은 없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는 '주디스'라는 여성이 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도, 그와의 추억이 깃든 집을

수도원에 기부한 젊은 미망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집에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수도원에 집을 기부하는 대신에 매년 성 위니프리드의 축일에

정원에서 자란 장미 한 송이를 받는 조건을 걸었다.

그 한 송이의 장미가 주디스에게는 사랑과 기억, 그리고 삶의 의지였던 것 같다.

그래서 단지 그것만으로 집을 기부하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누군가 장미나무를 훼손하려고 했고,

그 장면을 목격한 수사가 장미나무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잔잔하게 시작되던 이야기가 이 장면을 기점으로 서서히 긴장을 끌어올린다.



사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주디스가 사라지고,

곧이어 또 다른 시신이 강가에서 발견된다.

죽음과 실종,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혼란.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에도

캐드펠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사건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간다.


내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조용하게 진행되는 수사는 있지만

캐드펠을 중심으로 깊게 관여하는 추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사연과 감정,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집중해서 보여주면서,

이 이야기와 사람들이 진짜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사건을 마주한 캐드펠은 주디스를 돕기 위해, 그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만의 방식으로 마을을 누비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한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

오래 묻혀 있던 감정의 파편들이다. 사랑, 시기, 외로움, 그리고 회한.


특히 주디스라는 인물은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상처 입은 여인이지만 연약하지 않고, 고통을 품고 있지만 당당해보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들은 마치 

그녀의 마음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결말에 다다랐을 때, 나는 범인이 누구였는가보다

주디스가 마지막 선택이 더 눈에 보였다.

매번 이 시리즈가 단순한 추리 소설이 아니라고 느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추리 소설과 다르게 범인이 아니라 다른 인물의 선택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장미 한 송이처럼 아름답지만 가시를 품은 이야기.

그 아래엔 때로 말할 수 없는 진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캐드펠은 이번에도 그런 진실을, 침묵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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