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책 (100쇄 기념판) 웅진 세계그림책 1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허은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돼지책>도 역시 가영이의 2002년 베스트 그림책 중 한권입니다. <고릴라>처럼 그림을 보고 줄줄 외울 지경이지요. 사실 <돼지책>은 여성분들이 보면 통쾌할 내용입니다. 엄마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겆이하는 기계쯤으로 아는 삼부자(피곳씨, 패트릭, 사이먼)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밥 줘~!'라고 소리지르는 것 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아 뒹굴대며 텔레비전 보는 것밖에 없죠. 어느날 엄마는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쪽지를 남기고 집을 나갑니다. 그러자 이 삼부자는 정말 돼지로 변해 버립니다.

이제 하루하루가 지옥같죠. 식사는 대충 때우지만 집안꼴은 엉망이 됩니다. 그야말로 돼지우리가 되는거죠. 어느 날 밤, 먹을 게 다 떨어져 삼부자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 음식 찌꺼기라도 찾고 있을 때, '구세주' 엄마가 나타납니다. 삼부자는 '제발, 돌아와 주세요!'라고 빌고 개과천선하게 됩니다. 남편은 이제 설겆이도 하고 다림질도 하며, 아이들은 침대 정리도 하고 아빠와 함께 음식도 만든답니다. 그래서 '엄마도 행복했습니다.'

남자인 저로서는 우선 뜨끔한 내용이었습니다. 피곳씨의 모습이 대다수 남편들의 모습일 테니까요. 비록 저는 건강때문에 지금 집에서 쉬고 있는 처지라서 아내를 많이 돕는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아내 입장에서 보면 '넌 돼지야!'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사실 집안 일은 온전히 '아내의 몫', '엄마의 몫'으로 치부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니까요. 저도 '같이 한다'는 입장이 아니라 '돕는다'라고 말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한국 남자인가 봅니다. 그런데 영국도 그런 점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돼지책>의 피곳 부인도 직장을 다니는 데도 가사노동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흔히 아줌마를 '이름없는 존재', '얼굴없는 존재'라고 하지 않나요? <돼지책>에 등장하는 피곳 부인도 그렇습니다. 피곳 부인의 얼굴은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제대로 그려지지도 않습니다. 일하는 뒷모습이거나 옆모습, 기껏해야 코와 입의 윤곽이 그려질 뿐입니다. 게다가 삼부자는 이름이 나오지만, 피곳 부인은 그냥 '피곳 부인'일 뿐입니다(이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양식라서 그럴까요?). 피곳 부인 혼자 일하는 장면은 어두운 황색 톤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녀의 등은 집안 일의 부담에 짓눌린 듯 구부정해 보입니다. 빙그레 웃고 있는 삼부자를 덤덤한 표정으로 업고 있는 표지 그림은 피곳 부인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돼지책>은 가족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관계여서는 안되며 가사노동은 나누어 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그런데 <돼지책>의 매력은 이런 메시지를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살과 재치가 담긴 그림과 글로 깨닫게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피곳씨와 아들들이 함께 일할 때 엄마의 얼굴에는 드디어 표정이 생깁니다. 세살박이 제 딸도 내용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빠, 왜 엄마 혼자 일해?', '아빠, 왜 엄마가 없어졌어?', '아빠, 왜 돼지로 변했어?'하고 물어보며 이야기를 따라간답니다.

<돼지책>은 그림이 참 재미있습니다. <고릴라>가 '숨은 고릴라 찾기'라면 <돼지책>은 '숨은 돼지 찾기'랍니다. 그림책 곳곳에 숨겨진 돼지 그림을 찾는 것만으로도 책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침 식탁의 시리얼 상자, 피곳씨가 읽고 있는 신문, 피곳씨의 조끼 단추, 문의 손잡이, 시계, 양념통, 수도꼭지 등등... 읽다보면 '역시 앤서니 브라운이야!'하며 무릎을 치게 될 겁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이 아이 어머니라면, 꼭 이 책을 사셔서 남편보고 아이에게 읽어주라고 하십시오. 남편 분이 깨닫는 게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남자분이라면 돼지로 변하기 전에 '개과천선'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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