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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 코펜하겐 삼부작 제1권 ㅣ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평점 :
'어린 시절은 관처럼 좁고 길어서,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거기서 나갈 수 없다.'는 문구에 반해서 덜컥 질러버린 책. 작고 가볍고 얇아서 출퇴근 전철안에서 읽기 좋았다. 나는 보통 첫 페이지를 넘겨서 읽곤 문장이 마음에 들면 책을 구매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인터넷에서 저 문장 한 줄만보고 구매를 하는 모험을 했다. 다행히도 모험이 성공적이라 다음 책도 구매를 완료했다. 간만에 나를 다른 세상으로 쉽게 데려가주는 책을 만나서 매우 만족스럽다.
토베 디틀레우센이라는 덴마크 여성 작가의 자전소설 중 어린시절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가난과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버텨나기엔 너무나 얇고 여린 시인의 감성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였던 토베 디틀레우센. 자신의 섬세한 감성을 지키기 위해 늘 바보처럼 행동하며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던 토베, 가난한 노동자 집에서 태어난 그녀는 늘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 (중략) 각각의 유년기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서 남들보다 나쁜 냄새가 날까 봐 두려워한다.
p.46-47
사람은 퍼즐조각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어린시절, 충격적인 사건, 끔찍했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들이 조각조각 모여서 하나의 사람을 완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에 대한 냄새를 혹여나 남들이 알아차릴까 두려워한다는 저 문장이 공감된다.
어쩌면 그들은 어떤 비밀스러운 지름길을
이용해 예정보다 여러 해 일찍 어른의
겉모습을 걸쳐 입은 게 아닐까, 당신은 생각한다.
어느 날 집에 혼자 있을 때 그들은 그일을 해냈고
그때 그들의 어린시절은 무쇠로 된
세 개의 족쇄처럼 그들의 심장에 채워진 것이다.
(중략)
그런 지름길을 모른다면 당신은 어린 시절을
견뎌야만 한다. 매 시간 그 속을,
그 절대로 끝나지 않을 시절 속을
터덜터덜 걸어가야만 한다.
오직 죽음만이 당신을 거기서 해방시킬 수 있기에
당신은 오랜 시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어느 날 밤에는 죽음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한다.
p.47-48
어린시절의 나도 어른들은 어떻게 이렇게 지루하고 숨막히는 세월을 통과해서 어른이 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오랜 시간 죽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는 문장을 조금은 이해할 것같다.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던, 숨막히는 세월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멍청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견디던 시간이 흐르고 성장한 토베의 주위에는 아버지 모를 아이를 임신하고 버려진 여자, 술과 가난에 찌든 이웃들, 자유를 갈구하기 위해 도망치듯 집을 떠난 오빠가 있다. 끝나지 않을 것같던 지리멸렬한 시간이 지나고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글쓰기를 놓치 않은 토베의 어린시절은 1권에서 끝이 난다.
코펜하겐 3부작 중 첫번 째인 '어린시절'은 유년기의 어둡고 축축했던 기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앗줄같던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작가의 세월이 담겨있다. 부서질 듯 섬세한 언어로 쓰여진 얇은 책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녀의 청춘을 담은 2권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 더불어 번역가가 섬세하게 이 책을 번역했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된다. 역시 번역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