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중간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나는 선한 자인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이냐, 그 허울만 벗어 던지면 내 본성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궁금증이 더해간다. 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반대로 악하지 않은 것은 모두 선한 것인가? 천사들은 언제나 선하고, 악마들은 항상 악한 존재일까?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코엘료는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해 대가다운 힌트를 던진다.
유다의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다. "선하신 스승님, 영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가 그에게 대답했다. " 왜 날 선하다고 하느냐? 오로지 하느님만이 선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18~19절.
가족의 비참한 죽음을 겪고 인간의 선한 본성에 회의를 품게 된 부자 이방인이 금괴자루를 짊어지고 베스코스라는 궁벽하고 퇴락한 시골마을로 들어온다. 샹탈이라는 동네 호텔바의 여급이 그를 기다린다. 그녀는 외지사람을 만나 그 지긋지긋한 동네를 뜨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이방인은 제안한다. 이 금괴를 동네사람들이 나눠가질 수 있는 행운을 주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신이나 동네 사람들 모두 행복해지겠지. 단 일주일안에 아무나 한사람이 살해당해야 한다. 즉 금을 갖기 위해 아주 사소한 악을 감수하면 된다.
그는 금 한자루를 놓고 인간이 과연 선한 존재인가 아닌가, (이방인은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판별하려고 한다.
마치 예수가 최후의 만찬이 있던 날, 유다에게 자신의 위치를 로마인들에게 알리라고 천추에 씻지못할 악행을 유도했듯이 이방인은 동네사람들을 유혹한다. 예수는 알고 있었나? 유다가 아니라도 은화 한주먹에 자신을 팔아넘길 자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왜 그는 하필이면 유다를 지목했을까. 물론 지금에 이르러유다는 베드로처럼 아이콘으로만 존재할 뿐이니, 욕된 운명도 그의 목숨이 지면 그 뿐일 것이라고 자위한 것일까.
이 소설에서 악마는 이방인, 천사는 늙은 베르타, 그리고 샹탈과 동네 사람들은 시험에 든 인간군상으로 상징된다. 하지만 베르타를 빼고, 나머지 사람들은 끝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한다. 마침내 대파국이 있던 날 밤, 베르타는 기괴한 포즈로 돌에 기대어있고, 저마다 손에 총을 든 주민들은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돼있었다. 심지어 그녀를 죽였다는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핑계거리까지 만들어놓았다. (마을 신부가 그 대안을 내놓았다는 것이 놀랍다. 코엘료는 신부조차 악마의 거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파국은 역시 코엘료답다. 샹탈은 동네주민들에게 설사 그들이 노파를 죽인다해도 결코 금을 나눠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또박또박 설명함으로써 거사를 무위로 돌린다. 헐거운 성선설이나, 주인공의 눈물겨운 감동적 연설에 의하지 않고, 금을 화폐로 바꾸지 못하는 백한가지 이유를 들어 상황을 반전시킨다. 동네사람들은 <이 불쌍한 노파를 죽여선 안된다>라는 선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기껏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죽여본들 내손엔 결코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라는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결론에 따라 총의 노리쇠를 풀어버린다. 결국 잇속없는 살인으로 야기되는 사회적, 양심적 징벌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든 것이다.
코엘료는 결국 선과 악은 결정돼있는 것이 아니라 통제의 문제, 그리고 선택의 문제일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한때 악의 소굴이었던 베스코스의 지배자 아합은 어느날 산에서 내려온 성 샤뱅을 만나 개과천선하고 동네를 번창한 상업중심지로 만든다. 그때 아합은 하룻밤 묵기를 청하는 샤뱅을 죽이려고 밤새 칼을 갈고 있었다. 아합은 샤뱅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만약 여기에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녀가 갑자기 들어온다면, 그녀가 아름답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소?" 성인은 대답했다. "아니오. 하지만 나 자신을 통제할 수는 있을거요." "내가 엄청난 양의 금화를 주며 산을 떠나 우리와 함께 지내자고 제의한다 해도 그 금화들을 자갈 보듯 바라볼 수 있겠소?" "아니오, 하지만 난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거요."" 두사람이 당신을 만나러 왔는데 한 사람은 당신을 경멸하고, 또 한사람은 당신을 성인으로 우러러 받든다면, 그 둘을 똑같이 대할 수 있겠소?""힘들긴 하겠지만, 나 자신을 통제해 그 둘을 똑같이 대할 수 있을거요."
사람들은 이 대화가 아합을 개종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 했다고 한다. 결국 아합이나 샤뱅이나 선과 악의 중간에서 갈등하고 번뇌하는 것은 똑같다. 다만 자신을 통제하고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일뿐이다. 인간의 통제와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코엘료는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지금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두려움을 갖고 있는가. 신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인간은 선해지려하고, 권력과 돈과 사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간은 악해진다. 원죄가 있는한 모종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성 샤뱅도, 예수도 쉽지 않았다. 인간을 영원히 조종하려면 두렵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확실히 옳다. 신은 그렇게 인간들을 조종해왔다.
코엘료의 3부작 <그리고 일곱번째 날~>시리즈를 모두 읽었다. 세권 모두 일주일에 일어난 세가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일주일이면 사람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세권의 주인공 모두 그러했다. 지난 일주일동안 나는 조금이라도 변했을까 가만히 뒤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