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거울을 들여다 본다. 낯설다. 매일 보는 거울이지만 맘먹고 보면 그렇게 눈에 설 수 없다. 가죽이 거칠다. 주름도 늘고 깊어졌다. 살을 좀 뺐더니 얼굴부터 빠진다. 늙었다는 징조라고 한다. 턱의 군살이 없어지니 턱선이 살아서 깔끔해보이긴 하지만 좀 가난하게 느껴진다. 눈동자는 흐릿하게 멍해졌다. 그나마 다행이다. 한때는 탐욕스럽게 팽팽하고 찌르듯 모질었던 눈빛이 많이 순해졌으니. 한동안 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뜻밖에도 많은 얘기가 들어있는 것 같다. 지나온 세월만큼 깊은 우물이다.

에곤 실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그림은 슬프다. 수백장을 넘겨보아도 웃는 얼굴이 없다. 고통스러운 몸짓과 공포에 질린 눈, 아니면 깊은 번민을 온 몸에 담고 있다.

그림은 곧 화가의 마음일텐데. 그는 무엇이 그토록 힘들었던 것일까? 누구보다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화실을 옮길 때마다 큰 거울을 애지중지 갖고 다녔다고 한다. 자기 얼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이 그토록 숱한 자아관찰을 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구로이 센지라는 이 전기작가는 그의 내면에 복류하는 번민의 근원을 성(sex)에서 찾는다. 실레의 일기 한쪽을 들여다본다.

'나는 내가 에로틱한 스케치나 수채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작품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으며, 그 작품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내 견해를 지지해줄 것이다. (중략) 아무리 에로틱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상 외설은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비로소 외설이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식으로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에로틱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와같은 그림을 고의로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는 것, 내가 아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타락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어른들은 그들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지, 얼마나 성적 충동에 시달렸는지를 잊어버린 걸일까.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 공포스러운 욕정이 급습하여 괴로웠던 기억을 잊어버린 것같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로 인하여 정말 무섭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성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 한, 성에 대한 번민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에 관한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분명하다. 아이에게 성은 알수없는 욕망이며, 끊어지지 않는 올무다. 돌아보면 중고등학교 시절 내 또래의 모든 남자아이들은 성의 배출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에 비하면 성적이나, 가정형편 따위는 부차적이었다. 아이가 스스로 감당하기에 성, 특히 금지된 성은 엄청난 재난이었던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사회규범에 역시 적당히 맞춰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뜻이다. 전기작가는 <어른이란 내면에 있는 어린아이를 목 졸라 죽여 묻은 땅위에 피어난 살아있는 수꽃은 아닐까>라고 폼나게 말한다. 며칠전에 읽은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을 연상하게 만드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책을 너무 심하게 폄하했던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만일 우리 옆집에 스물두엇된, 이마에 피도 안마른 남녀가 노상  문걸어놓고 야릇한 그림을 그린다고 상정하자. 동네 소녀들이 해멀끔한 그 화가녀석에게 넋이 팔려 두셋씩 그집에 드나드나고 치자. 어느날 어느 아이가 징징 울며 늘어놓는 말에 놀라 동네 어른들이 그 집을 덮쳐보니, 집안 곳곳에 깜짝 놀랄 춘화(백년전이라고 생각해보자)가 즐비하고, 더욱 경악스러운 장면은 소녀들을 빼닮은 그림속 모델들이 너나없이 오렌지빛 음부를 드러내고 있다면 그 녀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구둣발과 포학한 주먹질이 쏟아질 게 틀림없다. 경찰에 줄이 닿는 어른은 "이런 색마는 석삼년은 콩밥을 먹여야 정신이 든다"며 거품을 물고 멱살을 잡아끌 것이고, 소녀들의 아비는 딸 간수를 어떻게 한 거냐고 정신나간 어미들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칠 것이다.

한바탕 난리굿을 벌인 후 사내어른들은 집앞 수퍼 파라솔밑에 모여 골뱅이와 번데기 캔을 까고 병맥주 몇병을 마시며 기염을 토한다.얼근해진 남자들은 길가는 여자들과 딸 또래의 젊은 아이들을 번들거리는 흰자위로 흘긋거리다가 '이왕 한잔 걸쳤으니 지역사회 주민들의 친목도모와 성타락 응징을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한 남자의 속보이는 제안에 너도나도 재청이오를 부르짖는다. 맥주와 싸구려 양주를 뒤섞은 그들은 '남자끼리 무슨 재미냐'며, 이 집도 노래방도우미가 나오느냐고 주인에게 물으면서 '이왕이면 어린애들로 불러달라'고 내놓고 주문한다. 속눈썹도 제대로 붙일 줄 모르는, 기껏해야 열예닐곱된 아이들의 가슴을 지분거리며 음탕한 웃음을 주고받던 그들은 2차를 가야한다고 바람잡다가 동네에서 너무 쎄게 노는거 아닌가 싶어 쩝쩝 입맛을 다시며 뿔뿔이 집으로 돌아간다. 마누라에겐 그런 놈은 아예 물건을 뽑아서 사내구실을 못하게 해야한다며 네 년들도 조심하라고 딸들에게 주독으로 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던 사내는 연신 트림을 하며 잠자리로 기어든다.

이런 얘기가 비단 속물적 소시민들이 집단거주하는 주변도시 서민아파트에서나 일어나란 법 있을까. 우리나라 어딜 가도 이와 비슷하거나 더욱 심한 모순, 이율배반은 아무런 죄의식없이 자행된다.

예술은 예술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용서되는 법이다. 그 범주밖으로 나왔을 때 섣불리 예술의 이름으로 무죄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예술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이 어쩌면 예술의 영원히 아물지 못할 아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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