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Rafal Olbinski - 공연포스터


 

 

 

 

 

 

 

 

 

 

 

 

 

 

 

 

 

 

 

 

 

 


 

 

 

 

 

 

 

 

 

 

 

 

 

 

 

 

 

 

 

 

 

 

 


 

 

 

 

 

 

 

 

 

 

 

 

 

 

 

 

 

 

 

 

 

 

 

 


 

 

 

 

 

 

 

 

 

 

 

 

 

 

 

 

 

 

 

 

 


 

 

 

 

 

 

 

 

 

 

 

 

 

 

 

 

 

 

 

 

 


 

 

 

 

 

 

 

 

 

 

 

 

 

 

 

 

 

 

 

 

 

 


 

 

 

 

 

 

 

 

 

 

 

 

 

 

 

 

 

 

 

 

 


 

 

 

 

 

 

 

 

 

 

 

 

 

 

 

 

 

 

 

 

 

 

 

 

                                                                                    
      

 

 

 

 

Rafal Oblinski 

TIME 이나 Newsweek 에서 가끔 표지를 사진이 아닌 일러스트로 할 경우, 그에게

맡길 정도로 최고로 인정받는 일러스트레이터. 

출처: http://blog.naver.com/anec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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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가르쳐본 사람들은 안다. 선생이 얼마나 고달프고 진빠지는 일인지. 안가르쳐 본 사람은 절대로 모른다. 들인 노고에 비해 그 산출물은 턱도없다. 하루종일 목이 쉬게 가르쳐도 똑같은 실수를 끝도없이 반복할 때 가르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회의에 빠지곤 한다. 시간당 수백만원을 받는 초특급 강사나 주 30시간을 가르치고 차비정도 건지는 초짜 강사나 교육의 성과가 느껴지지 않으면 좌절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즉 교육의 대가는 금전이 아니라 피교육생의 성과, 즉 무엇이 달라졌는가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있다. 금전적 보상은 그 후에 따라오는 부수적 결과에 불과하다. (성과는 안중에 없으면서 강사료는 많이 받고자 하는 사람은 교육자가 아니다. 자기 위신이나 시간당 잇속만 따지는 이기주의자에 불과하다. 과연 나는 시간당 만원은 받아도 좋을만큼 아이들을 올바르게 변화시켰을까? 교사들이 초지일관하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교권의 추락이란 있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선생을 오래 하려면 돈보다는 내가 아이들을 어떻게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나에 우선 촛점을 맞춰야 하고, 반드시 그 대목에서 성공을 거두어 꼭 필요한 보람을 느껴야 한다. 이 기본구조가 성립되지 않으면 교직은 결코 오래 갈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내 생애의 아이들>에는 제법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들 대부분은 집이 가난하거나, 몸이 약하거나,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있는 힘겨운 소년시절을 보내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문제아도 있고,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잊혀진 아이들도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수업시간에 창밖의 자연풍광에 넋이 빠져 공상에만 잠겨있는 녀석들도 있다. 가브리엘 루아는 그 한사람 한사람에게 선생님의 눈길과 손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잔잔하게 피력한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그 아이는 지금 행복한 것일까. 그가 생각하고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가르치는 것을 그는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나. 그를 위해 나는 무엇을 매일 준비하고 있나. 혹시 나는 이 아이의 부모가 내게 건네는 월급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만큼만 가르치려 하는 것일까?

많은 부모들이 선생을 존경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대한 만큼 성과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는 그 기대마저 해골밖에 남지 않아 그저 성적이나 올려주면 다행일뿐이라고 바닥수준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았을거다. 사람을 만드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그들은 자식을 어엿한 한 개체로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선생에게 기대했을 것이다. 물론 그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고, 그 책임을 교사에게 전적으로 묻는것도 무의미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간혹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올곧게 자각하는 교사들이 있어, 부모들은 선생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부모에게 설명하기보다,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말하라.  그 아이들에게 지식을 주기 전에 믿음을 확인시켜주라.  이 선생님이 부모보다 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선생님이 내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깨닫게 해야한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참여하게 만들고, 이전보다 나은 성과를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데일리 콜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부가 서비스라기 보다 우리 교육의 본령에 가까운 일이다. 만일 시간문제가 현실적으로 걸린다면 좀 더 효율적인 수단을 찾아봐야 한다. 한달에 한번 부모와 통화하거나, 모이게 해서 개별적인 인터뷰시간을 충분히 갖도록 하자.  그때 참고해야할 몇가지 사항은 다음과같다.

1. 교사가 자기 아이를 주목하고 있다, 즉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모가 확실하게 느껴야 한다. 부모는 그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나? 부모는 선생이 자기 아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시험한다. 인상비평만으로는 부모의 테스트를 통과하기 어렵다. 그래서  PCSI나 MBTI같은 과학적 분석도구가 필요하다. 물론 그 결과만 갖고 얘기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접촉하면서 느끼는 점이 훨씬 중요하다. 두가지를 통해서  아이가 어떤 성격과 가치관, 스타일을 갖고 있는지 파악해두면,  부모를 만났을 때 쉽게 공감대가 생긴다.

2. 합당하지 않은 칭찬이나 대안이 부족한 지적은 부모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칭찬을 해주면 일단 부모들은 좋아한다. 그러나 부모들은 그 칭찬의 근거를 알고 싶어하고,  그 다음엔 뭘 어떻게 해야좋은지 궁금해한다. 나쁜 얘기 하기 싫어서 적당히 입에 발린 얘기를 하면, 오히려 선생에 대한 불신만 생기고, 다음에 정말 칭찬받을 만 한 상황에서도 선생과 아이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칭찬이나 지적 모두 객관적 데이터를 근거로 해야한다. 더 좋은 것은 데이터만 정확히 설명해주고 나머지는 부모가 알아서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칭찬은 한두마디로 족하다. 매일 수업을 하면서 발견하는 아이의 특성과 장단점을 메모해두면 훌륭한 자료가 된다.   (아이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은 교사의 주관성이 너무 많이 개입되는 것이며, 부모가 필요이상으로 민감해지기 쉽다. 자칫 섣부른 메시지는 교사에 대한 불신을 품게 하거나, 혹은 아이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3. 지금 하고 있는 교육, 또는 다음에 받게 될 교육이 아이에게 어떤 성과를 내게 만들 것인지 설명해줘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부모가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협의하는게 중요하다. 이 역시 부모에게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기 보다 교육의 핵심에 해당하는 사항이다. 지금 하고 있는 교육이 아이들 개개인에게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계속 모니터링해야 한다. 당신은 부모에게 그들의 아이가 지금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정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나. 앞으로 몇달 후엔 어떻게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나.  각 선생들이 이런 작업을 일상적으로 하고 회사에선 그 경험치를 축적해자사의 독특한 성과향상 지표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프로그램이나 진행방식을 수정보완해야 한다. 그래야 부모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부모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만든다. 결국 선생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높아지며, 교육의 성공가능성도 더욱 커진다.

이상의 대화원칙은 보통 선생들에게선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 자기 교육프로그램의 장점을 침튀겨늘어놓고, 부모에게 섣부른 훈계나 아첨을 하곤한다. 아이에 대해 피상적인 인상비평과 다분히 감정적인 평가를 적당히 조합해서 늘어놓는다. 신중한 대안이나 향후 계획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아이들이 현재 우리 프로그램을 교육받으면서 어떤 구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가정에서도 이런 점을 꼭 협조해달라고 요청하는 일은 없다. 그만한 애정도 관심도 없다는 증거다.

교육사업은 최고의 서비스사업이다. 한 아이의 인생을 놓고 펼치는 고객감동, 고객만족의 비즈니스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모들은 매우 잘 훈련된 고객이며, 매우 의심이 많고 판단도 정확한 고객이다. 교육의 본령에 집중하는 것만이 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전략이다. 아이들에 대한 더욱 구체적이고 올바른 교육방침 못지 않게 부모를 어떻게 교육에 동참시킬 것인가도 중요한 전략이다. 부모가 참여하는 만큼 우리 교육의 환금성도 높아지고, 지속성도 더욱 강해질 것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정리하고 실험하는 도전정신, 프로근성이 없이 정해진 대로 하루하루 때워나가는 교사는 자연도태돼야한다. 그것이 피차를 위해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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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와 사랑할 수 있는가.  창녀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가. 잘못하면 이 책은 3류 소설로 급전직하할 위험이 큰 소재를 취급하고 있다.  미녀 직업여성들에게 애인이나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보면 답은 한결같다. 이런 직업에 애인이라니 가당찮다. 일 시작하기 전에 깨끗이 정리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애인이 이런 일하는 걸 보겠느냐. 적어도 그녀들은 그 직업을 갖고 있는 동안엔 정상적인 사랑은 할 수 없다고 체념한 듯하다. 가끔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만, 내내 안정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걸 본 적은 없다. 성을 상품으로 파는 그녀들에게 행복한 섹스란 없다. 돈을 받고 말고를 떠나 자기 성에 대한 치명적인 컴플렉스에 사로잡혀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창녀라는 직업을 가진 여자가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고,  행복한 섹스의 절정을 꿈꾼다는 스토리는  억지에 불과하다.     

코엘료는 창녀라는 직업에 대한 편협한 선입관을 처음부터 모른 척한다. 오히려 그 직업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회의하게 만드는 훌륭한 기제로 작동한다. 브라질의 평범한 시골처녀 마리아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적당히 무지한 덕분에 성격까지 용감한 그녀는 스위스까지 흘러왔다. 참 멀리까지 와서 하필 창녀가 됐다. 그러나 그녀에겐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강제로 몸을 버리고 몇날며칠 펑펑 울다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창녀가 된게 아니다. 고향의 부모형제와 이웃들에게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대로 돌아갈 순 없었던게다. 따라서 수입이 뒷받침되지 않는 구멍가게 점원이나 공장 노동자가 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녀는 자기 얼굴과 잘빠진 몸이 돈버는데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을 받고 옷을 벗는 게 두려울 것도, 수치스러울 것도 없다. 적어도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렇다고 평생 이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그만 목장을 살 만한 돈을 모으기로 했다. 일년만 일하면 그 정도는 어려울게 없었다. 물론 몇년 더 일해도 상관없지만, 그러다간 끝도없이 계속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딱잘라 결정했다. 그녀에게 두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한 사람은 마리아처럼 영혼과 육체의 소외때문에 무력감에 빠진 화가 랄프, 다른 사람은 새디스트 취향의 쾌락주의자인 영국인 부자 테렌스. 결국 마리아는 랄프와 사랑에 빠지고, 급기야 헤어지기로 한 마지막 날(브라질로 떠나기 전날) 영혼과 육체의 합일된 사랑을 맛보게 됐다.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와 공항으로 갔지만 그녀의 두리번거리는 마음은 랄프를 찾고 있다. 비행기를 갈아타기위해 파리에 내린 마리아는 꽃다발을 들고 있는 랄프를 만나게 된다.

이제까지 읽었던 코엘료의 작품들에 비하면 밀도가 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이정도 주제와 소재로 이만큼 격을 지켜낸 것이 그가 대가임을 입증해준다. 중간중간 그는 썩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툭 던진다. 마치 '끝까지 들어봐, 혹시 알아? 가끔 이런 얘기를 만나게 될지.'라고 계면쩍은 윙크를 하듯.

'그녀는 서둘러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꽃으로 만들어진 시계를 ,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들과 그 주위에서 뛰노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슬픔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랄프때문도, 스위스가 좋아서도, 모험때문도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그건 바로 돈이었다.  돈! 모든 사람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칙칙한 색깔의 특별한 종이쪽. 그녀는 그것을 믿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믿었다. 산더미처럼 쌓은 그 종이쪽을 가지고 대형 스위스 은행을 찾아가 "이 돈으로 내 인생의 몇시간을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을 때,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는 팔지는 않고 사기만 합니다."라는 답변을 듣게 될때까지는.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행인들은 '난 좀더 기다릴 수 있어. 오늘은 돈을 벌어야 하니가, 당장 내꿈을 실현할 필요는 없어. 오늘을 돈을 벌어야하니까, 당장 내꿈을 실현할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인 채 직장으로, 학교로, 직업 소개소로, 베른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직업은 저주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 역시 모든 사람들이 그러듯이 자신의 시간을 파는 것일 뿌닝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듯이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을 견뎌내는 것, 모든 사람들이 그러듯이 결코 도래하지 않는 미래의 이름으로 자신의 귀중한 육체와 영혼을 내놓는 것, 모든 사람들이 그러듯이 아직 충분히 모으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그러듯이 조금만 더 기다리는 것, 기다리고, 조금 더 벌고, 욕망의 실현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 당장은 몹시 바쁘니까. '

하나 더 찾았다. '명예, 긍지, 나 자신에 대한 존중.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이 세가지 중 어느 것도 가진 적이 없다.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사랑받는데에도 성공하지 못했고, 늘 옳지 않은 결정만 내려왔다. 이제 나는 삶이 나 대신 결정을 내리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그동안 내 운명을 끌고 오느라 모든 힘이 소진됐다. 이젠 무력해졌다는 것을 고백하고 무릎을 꿇을 때가 됐다. 운명의 신이시여. 제 남은 삶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까지 내가 앞장서는 건방은 이제 없을겁니다. 그렇게 반년을 살았다. 운명의 신은 얄미울 정도로 무심했다. 아니 내 고백과 결심이 진정인가를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제안이 들어와도 나는 가지런히 내 운명앞으로 밀쳐놓았다. 그가 아무 말하지 않으면 잠시 서성대다가 잊어버렸다. 이제 생각하면 그 역시 잘한 선택이었다. 방정맞은 내 마음을 누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핀 다음에 생각해도 결코 늦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잡아야하는 기회가 있다면, 아마 나를 기다려줄 것이다. 서두르지 않아 놓친 기회라면 그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고 잊으면 그뿐이다.

오늘 산을 오르면서 복잡한 심사를 가닥가닥 정리했다.  예전보다 좋아진 게 있다면 이런 것이다. 이것저것 닥친 일이 모두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냥 마음 가는대로 하면  결과도 그게 나을 듯 싶다. 어깨에 잔뜩 힘주고 머리굴려봐야 예전처럼 왕따가 되거나 외통수로 몰리기 십상이다. 못난 듯 허허 웃으면 될 일이다. 물론 내 시간을 허투루 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러자면 남의 시간을 갖는데 욕심을 부려선 안될 것이다. 자꾸 내가 마리아 같아서 쑥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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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환상적인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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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퍼온글] 꽃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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