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은 입도 뻥긋하기 싫다. 멍할 정도로 피곤하다. 하루종일 밖에서 서성댔기 때문인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홑옷으로 버텼더니 저녁무렵엔 손발이 시리고 얼굴에 열이 올라 화끈거린다. 엊그제까지 선풍기를 틀어놓고 앉아있었는데 변덕과 경박이 죽끓는다.
동네 약방에서 산 쌍화탕(이름이 진광탕. 쩝.) 한병을 들이키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반신욕을 할 때는 대개 졸음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한다. 그래도 꼭 책은 한권 들고 입수한다. 오늘의 책은 토머스 머튼의 <장자의 도>.
장자 3장3절 <외다리 남자와 늪의 꿩>을 비몽사몽간에 읽었다. 장자의 호접몽을 흉내내며 꿈결에 한두줄 읽어내려가다 뒤통수를 땅 얻어맞았다. <어떤 직업이든 그 직업의 비중이 자기 자신보다 커지면 직업의 노예가 됩니다.야망은 필요하지만 자신의 존재보다는 작아야 합니다. >
도교에선 이른바 도사가 되려면 3년동안 천하를 돌아다녀야 하는게 불문율이라고 한다. 낮은 세상도 보고 높은 세상도 보란 뜻이다. 이 여행은 두둑한 노잣돈을 들고다니는 유람이 아니다. 도교식의 탁발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간단한 의술을 익힌다든가, 서당 임시선생 노릇을 한다든가, 길흉화복을 점쳐주는 정도의 생존기술을 준비한다.
장자는 몸에 지닌 것이 가벼울 수록, 등에 진 짐이 가벼울 수록 멀리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언제든지 세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휘적휘적 떠날 수 있는 나그네의 짐은 가볍다. 그의 자유로운 발길을 묶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제 고마운 분이 일자리 하나를 소개해주셨다. 썩 내키진 않았으나 내 생각이 나서 소개하는 것이라 하여 그 마음이 고마왔다. 올해 들어 이런 저런 제의를 딱 잘라 거절해왔는데 혹시 내가 뒷심이 물러진게 아닐까 의심했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그 일이 이만저만한 좋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호의적 희망까지 섞고 있는게 아닌가. 곰곰 생각해보니 나를 가장 흔들었던 포인트는 <그 일의 비중이 나보다 작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전주 이후로 내 어깨가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는 생각하지 않았다. 돈은 말할 것도 없고, 명예 조차도 욕심이 된다 싶으면 저만치 피해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명예로운 자리는 없다. 빛나는 명예가 치욕스러운 불명예로 바뀌는 건 순간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그러했고 대한민국에 이름석자 기억할 만한 이들 대부분이 그 사례가 되고 말았다. 그 일의 비중이 그보다 컸기 때문이다. 즉 분수에 넘친다는 뜻이다. 나는 고작해야(좋은 의미로) 한사람의 기자로 족한 사람이었다. 그보다 더 큰 일은 내 삶에 불을 질러 스스로를 태워대는 꼴에 불과했다. 데스크도 그랬고 대표이사도, 원장도 버거운 일이었다. 그 회한 때문인가 언제부턴지 세칭 잘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내가 앞으로 크게 출세할 일은 아마 없을 것같다.) 다 겪어보았으니 거의 다 알 것 같다. 내 어께에 가상으로 묶어 매달린 부담들을 덜어내는 것이 방법이다.
주변을 돌아본다. 일하는 이들은 그렇다치고 노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분수에 넘는 예가 허다하다. 내 깜냥에 자기 보다 작은 일을 하는 사람은 J형 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일에 대해 물으면 항상 대수롭잖은 노가다 일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그는 그 허접한 일로 집안을 꾸리고, 대학 겸임교수자리까지 얻었다. 다른 이들이 겸임교수를 한다면 내심 비웃지만, J형에게만은 예외다. 그는 작은 일의 완결성을 이루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어렵게 한 걸음을 떼어놓은 것이다.
어렸을 땐 저 양반이 왜 저 짓을 하나 의아했다. 줄을 못잡아서 그런가 싶어 그만 접고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가 솔깃했던 적도 있었나보다. 하지만 그는 용수철처럼 자신의 작은 일로 되돌아갔고 사람들은 그 일에 맞춰 J형을 아래로 보는데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러나 십년의 세월이 지난 후 내 크기만 했던 저금통은 배가 갈라져있었다. 문득 형의 작지만 통통한 저금통을 보니 왈칵 부러웠다. 형은 웃기는 소리 그만 하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그 이후 나의 직업관은 조금씩 변해갔다.
지금도 <어디서 멋진 자리 비워놓고 나 안불러주나>고개를 훼훼 돌리는 때가 아주 가끔 있다. 바랄 걸 바래야지. 나는 사람들의 기억 바깥으로 떠난 지 오래됐다. 그들이 기억하는 나의 잔상은 무엇일까? 어쩌면 내가 사람들을 밀어냈는 지도 모르지. 어쨌든 일로 전화를 주고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만 9개월을 놀았으면 논다는 소문도 날 법한데 이따끔 사람들과 통화할 때면 어김없이 전주 얘기를 물어본다. 빌어먹을. 우습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소개를 받게되어 조금 당황했다. 간단한 이력을 보내달라는데 컴퓨터 앞에서 막막하다. 이력도 어려운데, 간단하게 써보내라니. 소중한 것 먼저 쓰라니까. 그럼 내가 몇년생이란게 중요할까 아니면 학교를 어디 나온게 더 중요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신문사? 회사? 전주? 백수생활 1년도 못가서 아이덴티티가 흔들리는 모양이다. 대충 썼는데 마지막 산이 있다. 2003년 12월31일 이후는 뭐라고 쓰지? 안식년이라 정하고 말그대로 안식(편안히 쉬고 있음)하고 있다고 썼다.
이 일이 어떻게 결론이 나든 나는 한가지 생각만은 분명히 갖기로 했다. <하반생에는 내 직업의 비중이 나보다 작게 느껴지는 일>을 하리라. 남들이 <쟨 저런 일을 하고 앉아있느냐>고 하는 일 이상을 하지 않겠다. 일의 내용을 보지 않고 겉으로 재고 판단하는 속물근성을 다스리겠다. 티끌처럼 작은 일에도 우주처럼 많은 생각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눈을 감고 싶다. 시월이다. 어제까지 여름이었는데 오늘부턴 늦가을이다. 계절조차 별스러운 나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