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일본 최대의 판매부수를 기록했던 요로 다케시의 <바보의 벽>이 던진 화두는 <왜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나?>이다. 대답은 분명하다. <듣기 싫은 말에는 귀를 막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남편과 아내, 상사와 부하, 미국과 이슬람 등 모두가 그 모양들이다.

이 책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바보의 벽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안다><말해주면 안다><과학과 언론은 사실적이며 객관적이다>의 허구성을 밝힌다. 제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단정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그랬을 때 엄청난 불행의 씨앗을 뿌리게 되는 것이라고 으름장도 놓는다.

인간은 끝없이 유전하는데, 정보로 바뀐 의식중심의 인간은 스스로 달라지지 않겠다고 고집한다.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고 정의를 내리는 순간, 즉 의식과 정보로 자신을 대치하는 순간, 벽이 생기고 대화는 단절된다. 바보의 벽은 이런 역전현상에 기초한다. 유사이래 인류는 공통이해를 통해 문명을 발전시켜왔는데 요즘 개성을 앞세운 자가당착이 판을 치고 있다. 저자는 <개똥같은 개성얘긴 집어치우고 부모와 친구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교육이 우선>이라고 일갈한다.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 두뇌와 몸, 공동체와 기능주의 등 현대인들이 간직해야할 소중한 다원적 실재들을 잊고, 균형적 사고를 무시하며 가치들을 역전시켜왔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일원론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금 세계의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나라와 대다수의 도시, 도시인들은 원리주의적 유일신을 믿고 있다. 그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대뇌를 유지하기 위해 입출력을 자기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근대가 만들어낸 일원론적 유일신을 신봉하면서 사람들은 바보의 벽을 하늘높이 쌓았고 수없이 많은 전쟁과 갈등을 빚었다. 아무리 얘기해도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들으려고 하질 않기 때문이다. 이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원론을 대체할 수 있는 21세기적 보편적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것> 즉 상식이라는 것이 그 원리아닐까라고 저자는 결론을 내린다.

<신나는아이들>에 참고가 될만한 점은

첫째, 성공하는 어린이, 똑똑한 어린이는 영재가 아니라 <사회적 적응성>이 뛰어난 아이라는 점이다. 근거없는 개성과 독창성, 창의력을 강조하기 보다는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부모와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곧 세상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바보의 벽>이라 불리우는 편협성, 몰이해, 선입견, 배타성을 없애는 교육이 필요하다. 경청훈련, 토론훈련, 팀워크 훈련 등의 목표가 바로 그것이다.

둘째, 두뇌개발은 신경세포의 자극전달과정을 일상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전달과정의 단계를 줄이는 것이다. 암산이나 속독은 물론이고, 피카소처럼 독특한 구상훈련을 통해 현란하면서도 정확한 입체구현이 가능하다. 습관이 중요하다는 논지와 일치한다.

다음은 주요대목을 발췌한 것이다.      

동경대 의대 명예교수이며 해부학 전문의인 저자는 몇가지 잘못된 <상식>에 대해 가차없이 메스를 들이댄다. BBC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여인의 임신과 출산>을 남녀 대학생에게 보여주자, 남자들은 <다 아는 내용>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반면, 남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여자들은 시종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저자는 여기서 <안다>또는 <자세히 설명해주면 알 수 있다>라는 것이 착각이라고 단정한다. 이른바 안다의 대상인 세상은 결코 잡다한 지식과 정보로 알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안다고 말하고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신문과 방송의 객관성, 사실성을 믿는다. 과학의 사실성을 신봉한다. 그러나 과학이 추론하는 것과 사실은 분명히 다르다. 그걸 혼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즉 진정한 과학적 태도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서 무조건 절대적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반증될 수 있는 모호한 부분이 남아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확실한 것도, 믿을 것도 하나 없다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매일 일기예보에서 비올 확률이 60%라고 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은 추측일 뿐 진리는 아니라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 왜 그러냐면 뭔가 절대적이라고 맹신하면 그 뒤에는 엄청나게 위험한 결과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필자는 뇌 전문의 답게 모든 감정과 행동을 주관하는 뇌를 y=ax, 즉 출력=계수 곱하기 입력의 일차방정식 계산기로 정의한다.  인간은 뇌를 아주 고차적이고 고급스러운 기관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뇌는 계산기에 불과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인간의 뇌는 수학적 증명이나 과학적 실증을 통해 <이것의 옳다>라고 입증된 것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넓혀가는 방향으로 진보해왔다. 이것을 공통이해라고 하는데 미디어와 언어 덕분에 어떤 사상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의 정보를 갖고 되고 공통이해를 하게 됐으며 문명의 발전방향도 이와같다. 그런데 그런 흐름에 <개성존중>이라는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당착적인 움직임이 있다. <자기중심><독창성><창의력> 등을 함부로 떠들어대는 세력이다. 저자는 <개성도 독창성도 모두 개똥>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이란 철저히 공통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공통성을 철저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언어의 논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이란 것이 존재한다. 인간의 뇌중에서 특히 의식을 관장하는 부분은 개인간의 차이를 드러내기보다 같아지는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언어로부터 추출된 논리는 압도적인 설득력을 가지며 그 논리를 거스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교육현장에서 자신의 개성을 기르라는 바보같은 말은 하지 않는게 좋다. 그보다는 <부모와 친구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는 노숙자나 장애자의 마음이나 생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이찌로나 나카타같은 젊은이들의 개성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들의 운동능력>에 불과하며,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그들처럼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이란 애당초 주어진 것 밖에는 가질 수 없는게 아닐까. 주어진 게 뭔지 모르고 주어진 것도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

만물은 유전하지만,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말은 항상 그대로다. 사람들은 후자를 진리라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정보에 불과하다. (진리는 움직이지 않는 불변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사회는 정보사회, 즉 의식사회, 뇌화사회라고 한다. 의식중심이란 무엇일까. 하루하루 변화하는 생명체인 나 자신이 <정보>로 변해버리는 상태를 가리킨다. 의식은 자기동일성을 추구하므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다>라고 부단히 주장한다. 그러므로 개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나에겐 변치 않는 특성이 있고, 그것은 내일도 모레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개성이다> 라는 주장이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이란 바로 <인간은 유전한다>에 반기를 든 <나는 변하지 않는다>인 셈이다.

이런 역전현상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계가 비뚤어져 버린 것이다. 의식의 세계는 공통적인 무엇인가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개성이 끼어들면 대화는 성립될 수 없다. 현대의 가장 큰 벽은 바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잘못된 대전제가 설정돼있고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참고로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변하는 요인중의 하나로 <안다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고, 안다는것은 자신이 완전히 바뀌고 더불어 세계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이들에게 자꾸 개성적이어야 한다고 얘기해선 안되며 그럴 필요도 없다. 애시당초 <너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위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인데 이는 가장 중요한 <상식>의 문제로 이어진다.

왜 인간은 생각할까. 인간에겐 대뇌라고 하는 거대한 컴퓨터가 있다. 그 덕분에 외부 입력이 없어도 뇌속에서 입출력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다. 입력을 자급자족해서 뇌속에서 마구 돌려대는 것이다. 신체 기관도 안쓰면 퇴화하듯이 인간의 두뇌도 그 크기를 유지하려면 쓸데없는 생각도 많이 해야하며 그러자니 입출력을 자급자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다.<신>으로 대표되는 추상적 개념이란 이처럼 연산장치안에서 빙글빙글 회전시켜 만들어낸 것이다. 개념이란 것도, 이데아란 것도 마찬가지다.

현대사회는큰 테두리의 공동체는 무너지고, 작은 단위의 공동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 공동체는 닫힌 사회이기에, 다른 공동체에서 보면 <하는 짓이 좀 이상한데>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개인과 개안,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상식 즉 옳고 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 작은 공동체들이 자신의 논리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의 육군과 해군의 이권다툼,  최근까지 파란을 일으켰던 일본 외무부의 똘똘뭉쳐 살아남기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현명한 사람과 현명하지 못한 사람의 뇌는 외견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결국 그것은 사회적 적응성으로 측정할 수 밖에 없다. 현재 세계의 삼분의 이가 일원론자라는 점은 반드시 주목돼야 한다. 이슬람, 유대, 기독교는 결국 일원론의 종교이며 원리주의에 기반한다. 지난 150년간 일원론의 폐해를 넌더리나게 봐왔으니 21세기는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바보의 벽이란 어떤 종류의 일원론에서 비롯한다. 건너편은 보이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 

사람은 변한다라는 인식은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고방식이며, 그럴 경우 세상도 어제의 그 세상이 아니라는 인식전환을 동반한다. 이렇게 하루가 멀다고 생각이 바뀌는 교주에게 누가 모여들까. 거꾸로 도시가 생기고 정보사회가 확산되며 일원론적 종교가 그곳에서 세를 넓혀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다.

이런 일원론을 부정하려면,  다른 보편적 원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해야할 것이다>라는, 충분히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상식>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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