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4월 논산훈련소에서 박박기던 고참 훈련병은 급기야 사십도에 육박하는 고열로 외래진찰까지 받게 됐다. 고문관에 약골인 주제에 군대생활을 민중적으로 해보겠다는 거창한 뜻을 품고 온갖 청소와 궂은 일을 도맡아 하다가 그만 뻗어버린 것이었다. 모포와 식판을 들고 의무대 앞마당에서 벌벌 떨며 트럭을 기다리던 그 불쌍한 인생은 논산병원 침상에 눕자마자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내 팔뚝엔 링거주사가 꽂혀있었다. 생전 처음 맞아보는 영양제아닌가. 이 무슨 호강이람.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링거와 영양제라는 걸 도통 구분할 줄 모른다.) 뿌듯한 마음에 이젠 살았다 싶어 편한 잠을 청했다. <야, 누가 얘한테 페니실린 꽂은 거야> 잠결에 가물가물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온몸의 머리털이 쭈뼛서며 공포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에이 씨X, 내 이럴 줄 알았다. 군대가 그럼 그렇지.> 훈련병들이 후송나오는 이유는 두가지, 안맞는 워커를 신고 훈련받다 군화독이 올라 발등이 썩는 병이거나 나처럼 과로에 감기몸살이 겹쳐서 오는 부류였다. 하필 내 옆자리에 있는 녀석이 전자였던 모양이다. 그 놈은 내가 맞을 링거를 꽂고 있고, 나는 그녀석의 항생제 페니실린은 얼추 한병 다 맞은 것이었다.
그들은 내게 <혹시 페니실린 알레르기같은 게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조차 생략하고 바늘을 쑥 빼서 소독의 절차도 없이 서로의 팔뚝에 푹 꽂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갔다. 그때 나는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위협당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의사를 비롯한 의료계 종사자들에게 뿌리깊은 불신을 갖게 됐다.
친한 사람들은 내가 의사의 말을 누구보다 경청하고 정확하게 지키려고 애쓴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내 얄팍한 의학지식에 비추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은 매우 공손하게 질문해서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한다는 것도 눈치챘을 것이다. 의사를 존경해서도, 의학지식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 이유는 병원에 정말 가기 싫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의사가 하라는대로 로보트처럼 해야하는 신세가 되는게 정말 싫기 때문이다. 어차피 오게 됐으니 할 수없고 다음에 또 와야 하는 일은 결단코 만들지 않겠노라는 독한 마음이 담겨있다.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아툴 가완디-라는 책을 사놓고 오랜만에 들추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지난 연말에 여기저기서 발표한 <올해의 책>중에 끼어있었기 때문일까. 펼쳐보니 앞에 수십페이지는 나름대로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용은 전혀 생소하다. 보나마나 몇년후에 이 책을 다시 보게되면 197페이지까지 읽었군하면서 역시 내용은 처음 읽는 것 같을게 뻔하다. 솔직히 이 책이 <올해의 책>으로 각광받았던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도 몇가지 수확을 얻는데 성공했다. 이상한 이름의 필자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수확일지도 모른다.
1.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연구 <팀워크가 최고의 학습시스템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실습대상이 되는 것은 싫어하면서 숙련된 의사를 우너한다. 하지만 만일 미래를 위해 누군가를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모두의 몫이다. 따라서 환자는 전문성과 진보를 모두 원하지만 사실은 그 둘은 상호모순되는 바람이 아닐 수 없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팀이 최근 외과의사들의 학습곡선에 관한 연구를 시도했다. 18명의 심장 외과의와 수술팀을 따라다니며 최소 침습 심장수술법이라는 신기술 습득과정을 추적했다. 이 연구의 흥미로운 결과는 팀들간에 학습속도에 현저한 차이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모든 팀은 똑같이 3일간의 강습을 받았으며, 모두 신기술 수용경험이 있는 유명병원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50여건의 수술과정에서 어떤 팀들은 수술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는가 하면, 전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팀들도 있었다. 실습만 한다고 기술이 숙달되는 것은 아니었다. 연구팀은 반복실습을 통한 숙달정도는 의사와 팀구성원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음을 알아냈다.
학습속도가 빠른 팀의 집도의는 느린 팀의 의사에 비해 훨씬 경험이 적었으며, 레지던트 딱지를 뗀 지 불과 몇 년 밖에 안된 의사였다. 하지만 그는 가장 호흡이 잘 맞는 사람들로 팀을 구성했으며, 처음 15건의 수술 동안은 새 팀원을 받지 않고 처음 멤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첫 수술전에 예행연습을 했으며, 집중적인 학습을 위해 의도적으로 첫 주에 6건의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그는 매 건마다 사전에 수술팀을 소집해 각 케이스를 세심하게 검토했으며, 수술 후 다시 브리핑시간을 가졌다. 또한 각각의 수술결과를 꼼꼼하게 추적하도록 했다. 그는 저돌적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진부하지만 성공의 비결인 얘기를 남겼다. "외과의사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도록 (다른 팀원들과)적극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느린 팀의 의사는 수술팀을 거의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뽑았으며 그 팀을 계속해서 끌고 가지도 않았다. 처음 7건의 수술을 하는 동안 매번 구성원이 바뀌었으므로 사실상 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사전 브리핑은 물론 수술후 브리핑도 갖지 않았으며 수술 결과를 추적하지도 않았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연구는 상당히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의대실습생이든 레지던트든 고나록있는 전문의든 간호사든 간에 실습과정에 좀더 계획적으로 접근하고 경과를 면밀히 관찰기록하는 등 잘만 하면 학습곡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2. 반복과 일상화로서 최고의 생산성을 올릴 수 있다.
서양의학의 지상명령은 의료행위에서 기계적 완벽성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완벽에 이르는 비결은 <반복>과 <일상화>이다. 모든 수술에서 수술생존율은 집도의의 수술 횟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대부분 병원에서 시술하는 탈장교정수술은 90분가령 걸리며, 4천달러를 웃도는 수술비가 들고 재발률은 10~15%. 그러나 토론다 외고가에 있는 작은 의료센터 숄다이스병원에서는 30~45분, 재발률은 1% 미만, 게다가 수술비도 다른 곳의 절반 수준이다. 이 병원의 성공비결은? 간단하다. 거기선 탈장수술만 한다. 이 병원에 근무하는 12명의 의사들은 1인당 연 600~800건의 탈장수술을 한다.
병원설립자의 아들이며 자신도 탈장수술 전문의인 바이언즈 숄다이스씨는 하루종일 지겹지않느냐고 묻자, "아뇨. 완벽은 희열을 주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병원의 상당수 의사는 일반 외과 전공의 수련과정을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일반병원에서는 시술을 할 수 없다. 하지만 1년 견습만 거친 후 그들은 세계최고의 탈장수술 전문가가 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류의 초전문화는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위해 과연 수련과정을 마친 의사가 필요할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3. 나쁜 의사는 과거에 아주 좋은 의사였다. 마치 악마가 예전엔 천사였던 것 처럼.
의료사고을 자주 일으키는 세칭 <나쁜 의사>중의 한 사람인 행크 굿맨은 한때 인근에서 가장 솜씨좋은 정형외과 의사였다. 훌륭한 의과대학출신이며 레지던트과정때도 매우 뛰어났다. 날마다 녹초가 되는 일과에도 그는 정형외과 일에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이 가고 싶었던 병원에 들어간 굿맨은 그 몇년후 한두번의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을 즐겨했디만 서서히 어떻게 하면 빨리 끝낼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료들중에서 가장 바빴고 그 사실은 그에게 점차 자신의 가치를 말해주는 주요 척도가 되어버렸다. 그는 농담반으로 자신을 <흥행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예약환자수 1위 타이틀에 집착하게 됐다는 얘기를 여러명이 해주었다. 게다가 그는 전문가로서의 직업의식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돌려보내질 못했다. 그는 10년이 넘게 주당 90~100시간씩 일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수술을 해야했기 때문에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수술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조그만 이상이나 변동도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 때가 진짜 위험한 때다. 의학은 뭐든 닥치는 대로 해내는 불굴의 의지를 요한다. 스케줄이 빡빡하건, 시간이 늦어지건, 아이가 수영연습 끝나고 데리러 와주길 기다리고 있건 간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할 일은 해내야 한다. 그런데 굿맨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꾸 실패를 거듭했다. 그는 자신이 일 욕심이 지나쳤다고 느끼고 있으며 때로 감당하기 벅찰 때도 있다고 고백했다. 이제부터 달라지겠다는 맹세도 했다. 부끄러워 얼굴도 못들 지경이라고 했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신나는아이들주식회사에게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들이다. 교육사업은 끊임없는 프로그램의 개발과 교사 재교육의 연속이다. 교사들이 가장 빠른 시간에 새 프로그램을 숙달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번 사례는 팀원의 개인적 역량보다 팀워크, 즉 주의깊은 팀구성, 멤버들의 유지결속, 사례 전후에 배치되는 준비와 정리작업, 초기 집중적인 훈련 등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말해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팀장의 지도력과 최고의 실력자로 구성된 드림팀, 팀원과의 경쟁 등이 성공요소라는 이론을 무색케하는 사례연구다.
2번 사례 역시 경쟁력이 떨어지는 집단이라도 한두가지 일에 집중하면 전문성이 생기게 되고 구성원들이 희열을 느끼며, 어떤 우수한 팀보다 좋은 성과를 내게된다는 것이다. 전체를 조망하는 기능도 분명히 존재해야겠지만, 각각의 전문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가지 일에 매달릴 경우 그 비전과 장기적 전망을 만들어주는 일이 필요하겠지만.
3번 사례는 교사 관리시 반드시 유념해야할 사항이다. 교육도 의료 못지않게 해야할 것은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고 그냥 건너뛰거나, 맡아야할 수업이 많아서 제대로 준비를 못했다면 그건 핑계가 될 수 없다. 처음엔 <잘나가는 교사>가 막판에 <나쁜 교사>로 전락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하를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때는 보직을 바꾸거나 교육현장에서 나와 전국 순회교육을 하는 등 현장에 책임질 일은 가급적 피하는게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