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30분. 외출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주섬주섬 외투를 꿰며 나의 모질지 못함에 짜증이 났다. K씨의 전화였다. 전직 고위공무원으로, 햇병아리 사장였던 나와 회사를 좌지우지하던 사람이다. 악연은 아니지만 그다지 좋은 인연이었다고 볼 수 없다. <어디 있냐?><분당 집입니다.><그래? 여기 청담동인데 모범타고 나와라><.........><나도 분당이잖냐. 이따 같이 들어가자구.> 배웅하시는 어머니는 늙은 아들의 엄동설한 밤마실이 걱정되시는지 연신 술마시지 말라는 말씀만 뒤통수에 더깨가 앉도록 하신다.   

불경기를 벗을 기미가 도통 안보인다.  강남에서 잔뼈가 굵어선지 청담동 인근을 획 지나가면 절로 느낀다. 밤 11시면 한참 흥청망청할 때. 그런데 적막강산이다. 조명도 침침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뜸하다. 여기가 이 정도면 딴 데는 보나마나다. 20년을 지켜 본 결과, 강남은 대한민국의 실물 경기를 드러내는 정확한 바로미터다. 현 정권의 청렴한 위정자들이 강남을 4대 개혁대상의 첫손으로 꼽았다더니 숫제 발걸음도 안하는 모양이다. 이동네에 단골집 하나만 있었어도 그렇게 불감하진 않았으리.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있으면 세상이 자기들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게 마련이다. 문득 조금 후에 만나게 될 전직 공무원과 비교해보았다. 둘다 무책임하고 피곤하긴 난형난제요, 민폐의 크기로는 우열을 따지기 힘들다. 아나키스트들에게 존경의 꽃다발을.

K씨 덕택에 평생 안 겪어도 될 일을 치렀다. 결국 내 침잠의 큰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다. 그는 검사앞에서 한사코 비리를 부인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검사도 바보가 아닌데 모를 리 없다. 지금 그가 이렇게 술집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딱 한가지.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돈 준 놈이 외국으로 도망갔는데 입증할 방법있나. 이년여 잠수를 타던 K씨는 <관재수는 없으니 걱정 말라>는 무꾸리 결과를 믿고 검찰에 출두했다. 그는 자기가 무죄라고 떠들었고(진짜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공연한 불똥이 튈까봐 어림없는 그 얘기에 맞장구를 쳤다. 내가 지금 그를 만나러 가는 건, 친해서도, 술이 그리워서도 아니다. 검사 앞에서 나와 웃기는 해프닝을 벌이고 그만 끝이었던 어처구니 없는 한 인연에 대한 맹목적인 애틋함이랄까.

<우선 살이 빠졌고, 둘째, 경제적으로 곤란한 것 같진 않고, 세째, 눈에 독품은 건 변함 없고.> 악수하면서 물끄러미 날 쳐다보더니 대뜸 인상분석부터 한다. (살 빠진 거 보니 부럽죠? 경제적으로 좀 도와주시구요. 눈에 독품은 건 술취한 당신이구마는.) 어찌 지내십니까....그저 이렇게 지내지. 너는?.... 보시다시피 백수 올습니다.... 뭐 할건데?.....아무 생각 없습니다.... 그러지 말구 얘기해봐..... 생각 있으면 이러고 있겠습니까?.... 그럼 너 이거 안해볼래? (주절주절).... 재미없네요.....이거 괜찮은 아이템이야..... (당신도) 하지 마세요.

녹차캔만 네개째 따고 있는 내게 물었다. <너 내가 어떤 놈이라고 생각하니?>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를 악물고 하면 안된다. 어떤 대답도 관계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며,  그 대답에 대한 질문자의 평가는 언제나 부정적이다. 잘 못 봤으면 잘못 봤다고 코웃음칠 것이고,  제대로 봤어도 너절한 변명이나 지어내면서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좋게 얘기해줘도 아니라 하고 나쁘게 얘기하면 죽을 때까지 앙심을 품는다.  따라서 그런 질문을 툭 던지는 자는 무조건 의심해야 한다. 현재의 친소관계에 무관하게 그런 인간들은 치명적인 암살자들이기 십상이다.

<극단적인 가치 때문에 평생 고생할 인간이지요. 한쪽에는 터무니없는 욕심. 다른 한끝에는 나 혼자 잘먹고 잘살려는게 아니다 라는 허위에 찬 공인의식.  한때는 세상을 다 갖고 싶었겠지만 이젠 늙어버린 심신 때문에 갖고 싶은 것을 허둥지둥 다시 찾아봐야 하는 조급한 인생. 사람들은 불신하면서도 자기는 믿어주길 바라는 이기주의자. 그나마 하늘의 보살핌으로 술추렴해주는 몇몇 친구들이 남아있는 인복있는 남자. 시간만 주신다면 더 얘기해 드릴 수도 있는데.>(이상은 속엣말이고 겉으로는 훨씬 부드럽게 돌려서 말했다.) 그는 예상대로 손을 휘저으며 <아냐 아냐> 라고 말했다. 나는 이런 교과서적 인간이 맘에 든다. 어쩌면 이렇게 전형적인지 원. 그는 내게 대답을 원한게 아니었다. 자기가 어떤 놈인가를 들어주길 바랬던 것이다. <네가 비밀을 지켜준다면 얘기할께.>라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그에게 <그럼 그만두시죠.>라고 말했다. 이런 거 보면 내가 꽤 단호한 놈인데 말야. 이런 양반은 동네 방네 자기입으로 얘기하고 돌아다니다가,  누군가 그얘기 알고 있다고 하면 대뜸 내 이름을 떠올리며 육두문자를 끼워넣을 사람이다.

수다는 여성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하지만, 남자들의 비열한 수다는 말도 못한다. 연신 위스키잔을 비우던 K씨는 무슨 얘기 끝에 <엊그제 사람들을 만났는데 다 네가 한 일이라고 알고 있어>라고 했다. 십수년도 더 된 얘긴데, 당사자도 아니고 목격자도 아닌 자들이 바로 엊그제까지 만나 그런 얘길 쏘삭거렸다는게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 닳아지지 않는 혓바닥들과 시궁쥐같은 눈깔들.  한술 더 떠 K씨는 내가 자기를 찾아올 때 무슨 차를 타고 왔는지도 기억하고 있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날 몰아세웠다. <그 자들 총기도 대단하고, 게다가 요즘 신간이 편안한 모양이네요. 모여서 그런 수다나 떨고 앉아있고.>  한참 신이 난 K씨는 나에게 그런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이래저래 해야한다고 훈계(?)까지 했다.  남 걱정할 입장은 아닐 터인데. 여하튼 <그런 RSOB(Real Son of Bitch)들 보기 싫어서 그 동네 발 끊었습니다.><너 뭐할 건지 알면 걔들 글루 쫓아올까봐 말 안하는거지?>  그날의 대화는 이말 끝에 껄껄 웃음으로 끝났다.

자꾸 뒤따라 나오길래 <그냥 계시라>며 계속 주저 앉히고, 또 나오면 <왜 이러시냐>며 떠밀어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마 조금만 더 싱갱이 했으면 필경 그는 오줌을 싸고야 말았을 거다. 현관문 옆에 화장실로 허겁지겁 뛰어들어가는 그를 보면서 나의 눈치없음을 반성했다. 씩 웃고 돌아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가 외쳤다. <난 널 믿는다. 알지? 너는 일어설거야.>  (약주 고만 하십쇼 헹님. 글고 저 이미 일어서 있습니다 헹님.) 어디 포장마차라도 있으면 나발이라도 불겠구만. 이 동네는 포차도 죄다 들어갔네 그려.  빌어먹게 불경기로세. 엇 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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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2 23: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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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3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