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마침내 일 하나가 끝났다. 일년도 넘었나 보다. 여러 사람이 엮인 일에 관계한 것이 벌써 그리 됐다. 오늘 코치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밤 늦도록 이어진 뒷풀이에서 부족했던 칭찬도, 묻어둔 비판도 얼추 쏟아냈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와서 성공했다. 행사를 해보면 예상보다 많은 참가자들이 오는 예는 극히 드물다. 그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오늘 아침 개회사부터 오후 축하행사까지 무려 열대여섯개 코너가 쉴새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신기할 만큼 시간이 딱딱 맞는다. 정확히 오전 9시 3분에 시작해서 공식 종료선언을 오후 4시 10분에 했다. 시간표 그대로 진행된 최초의 이벤트다.
아침 6시반에 눈이 떠졌다. 머리 한켠이 지끈지끈 아프다. 요 며칠 잠을 못잔 탓이다. 후후. 기껏해야 2~3백명 오는 이벤트갖고 쪼는건가. 그건 아니고... 앞에 나서서 나를 따르라는 듯 굴어야 한다는 부담이 계속 쳇기처럼 심중에 걸려 있었다. 샤워를 하고 가리마를 다시 바꿨다. 얼마전에 사십년동안 고집하던 가리마를 바꿔봤는데 자꾸 앞가리마가 생긴다. 이발도 안해서 부스스한데 괜히 신경 쓰이길래 복고하기로 결정했다. 넥타이를 밝은 회색으로 맸다가 윤기나는 짙은 회색으로 바꿨다. 이런 변덕도 흔치 않다. 거울에 비춰보니 오랜만에 입은 양복차림이 괜찮다. 자 이제 가자.
코칭센터 친구들이 이른 아침부터 열심히 일한다. 이벤트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라 행동이 자연스럽고 다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이 했다. 나나 그 친구들이나 이런 일을 굳이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젊어서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이 되면 군말없이 그냥 한다. 일을 대하는 그런 자세가 마음에 든다. 나도 한때는 그랬는데. 일 무서운 걸 몰랐다. 지금은 솔직히 겁부터 난다. <꼭 해야되는 일>이란 것도 감당하기 싫고, 그 일 때문에 사람들이 짜증내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싫다. 내가 뭘 해야하는지도 헷갈린다. 어울려 밤새긴 어색하고 곁에서 빙빙 돌긴 무색한 나이가 된 것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이런 과정을 거쳤다. 다들 힘들었다고 한다. 성과가 좋아서 대충 넘어간다.
행사 시작 십분전. 이미 좌석이 3분의 1쯤 찼다. 이만하면 썩 괜찮다. 시작 시간이 지나도 앞줄만 간신히 차는 경우가 다반사 아닌가. 대박 조짐이 느껴진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를 이 자리에 서게 한 K씨가 지나가며 눈인사를 한다. <정각에 시작해보세요. 그게 좋아. 좀 늦은 사람들도 벌써 시작했다는 걸 알면 더 서두르게 되거든요.> 어디 한번 그래볼까. 아홉시에서 일분, 이분 넘어가니 거의 객석이 찼다. 아홉시 삼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큰 박수와 휘파람소리가 터져나와 장내를 흔든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10시반에 기조연설이 끝나고 십분간 휴식. 아는 분들이 와서 격려를 해준다. 처음 보는 분들과 인사를 하고 오늘 아침에 받은 코치 명함을 건넸다. 다들 오늘 행사가 너무 좋다고 즐거워 한다. 그런데 이 분들은 뭐가 좋다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문득 생겼다. 나중에 따져보자. 그러나 저러나 패널토의가 걱정이었다. 원래 패널에서 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사회를 맡은 부회장님이 매끄럽고 유연하게 리드한다. 무슨 말들을 하는지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원래 잔칫날 주인은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게 당연하다. 정확히 자로 잰듯 순서를 끝내주셨다. 훌륭한 분들이다.
조선일보 친구가 와서 코칭 공동캠페인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간단히 했다. 이 친구도 암초의 가능성이 높았는데 웬걸 제법이다. 짧은 시간에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역시 미디어업계에 있어서 그런지, 간단 명료하고 몇마디 키워드로 정리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잘했다.
오후 세션 2시 50분에서 3시 20분까지 강의 하나를 맡았다. 건넌방에서 코칭센터 친구들이 준비한 강의가 진행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쪽에 사람을 몰아줘야 한다. 처음엔 열댓명이 앉아 계신다. 다들 친숙한 면면의 어른들이다. 과연 오실만한 분들만 딱 오셨다. 그중 한 분께서 <세션 내용과는 상관없이 당신 팬이라서 온거요>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분들이 와 웃으며 서로 자신이 팬클럽 회장이라고 농담을 주고 받는다. 유쾌한 박수들이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다. 금방 30분이 지나서 질의응답을 충분히 나눌 시간도 없었지만 보람있고 즐거웠다.
마지막 산이 남았다. 경품추첨과 매직쇼등 피날레 행사를 진행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점잖은 행사 진행과는 분위기가 확 달라져야 한다. 단상에 수십명이 들락날락하며 상품을 주고받았다. CTT에서 배운대로 뽑힌 사람들이 그 다음사람들을 뽑고, 또 그들이 다음을 뽑는 형태로 진행했다. 모두 즐거워했다. 처음엔 불안불안했던 마술쇼도 막판에 태극기를 흔들며 멋있게 마무리되었다. 이제 폐회사만 끝나면 된다. 심호흡을 하고 <코칭이 위대한 산업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을 때 수많은 후배들과 고객들이 오늘 첫 대회, 그리고 여기 참여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하고 악수하고 서로 칭찬과 격려를 나누며 작별했다.
코엑스 밖으로 나오니까 벌써 어둑어둑하다. 코발트색 하늘엔 반달까지 떠있다. 그제서야 홑양복 사이로 찬 바람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제법 춥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운데 머리는 저 밤하늘 처럼 맑고 푸르다. 오늘 일을 뒤돌아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밀려든다. 모종의 계시같은 게 아닐까? 아무 결정도 없이 그저 방황으로 시간을 보냈던 내게 오늘은 과분한 성과임에 분명하다. 그동안 몇가지 시도했던 일들이 내가 미쳐 손쓰기도 전에 물거품이 된 반면 이 일만큼은 유독 내 노력보다 훨씬 넘치는 과실을 안겨 주는 까닭이 무엇일까? 나는 어제 저녁까지도 마음에 걸려 있던 말들을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앞에서 신 들린 듯 외쳤던 것일까? 나를 믿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 나를 격려하고 축하해주었던 사람들, 나를 믿어주고 함께 하려는 사람들. 이제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걸까? 오늘의 이런 생각들이 그동안의 내 고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뒷풀이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입으로 무슨 술이 들어가는지,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의식하지 못했다. 문득 교회를 한번 나가볼까 싶었다. 여러 종류의 술을 마셨더니 머리도 무겁고 속이 불편하다. 모든 걸 내일 맑은 정신에 생각하기로 하고 모처럼 편한 잠자리에 들었다. 긴 하루였다. 지난 일년만큼이나 아주 길었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