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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야 =
에스파냐의 화가.
주요작품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The Family of Charles Ⅳ》(1800)
《옷을 입은 마하 Maja vestida/The Clothed Maja》
《나체의 마하 Maja desnuda/The Naked Maja》(1800∼1805)
펜테토도스 출생하여 프랑스 보르도에서 죽었다.
1766년경 마드리드의 F.바이에우(l734∼1795) 문하에 들어갔고
1798년 궁정 수석화가가 되었다.
작풍은 대체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즉 1771년부터 1794년까지 후기 로코코의 작풍과 그 이후의 것이다.
후기 로코코시대에는 프랑스 18세기의 ‘아연화(雅宴畵)’ 영향으로
왕조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룬 작품이 많다.
그 후 융그스와 티에폴로로부터 다채로운 색채기법을 배웠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보시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인물을 그렸는데, 초상화에서 인물화로 전환하였다.
1800년 《카를로스 4세의 가족 The Family of Charles Ⅳ》에서는
당시 궁정 사회의 인습과 무기력, 허명(虛名)과 퇴폐가 뚜렷하게 나타나있다.
유명한 《옷을 입은 마하 Maja vestida/The Clothed Maja》
《옷을 벗은 마하 Maja desnuda/The Naked Maja》(1800∼1805)에서도
에스파냐의 전통적 여성이 잠자는 비너스라는 고전적 주제에서 벗어나
강한 리얼리티로 표현되어 있다.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 표현 등 고야의 인간관은
차차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에서 일대 전환한 동기는 청각을 잃을 정도의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이었다.
그 결실이 후일 인상파의 마네에게 영향을 준
《1808년 5월 3일 The 3rd of May 1808:
The 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1809)과
연작판화 《전쟁의 참화 Los desastres de la guerra》(1810∼1814)이다.
특히 후자에는 82장의 흑백 에칭에 살육 ·광기 ·허무 ·폭행이 철저히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판화 카로, 피라네지 등에도 열중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표적 연작판화인
《로스 카프리초스(변덕) Los caprichos》(1796∼1798, 80장)와
《디스파라테스(부조리)》(l8l5∼1850, 15장)를 보면
고야의 작품 특유의 암담한 느낌이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러한 니힐리즘 시각화를 시도하여 자신의 별장인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의 벽면을 수수께끼 같은
《검은 그림들 Pinturas negras》(1820~1823) 등의 작품으로 장식하였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고야 만년의 ‘검은 그림’으로 불리는 계열이다.
장르는 정물 ·종교 ·풍속 ·풍경 등 다양하며 환상성이 짙다.
《자화상》《십자가의 그리스도》 2개의 ‘마하’를 비롯한
고야의 대부분의 대표작(유화 114점, 데생 470점)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유해는 그가 그린 《산 안토니오 데 파투아의 기적》(l798)으로
유명한 마드리드의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에 안치되어 있다.
- 고야의 생애 -
1746년 : 프란시스코 고야가 3월30일 사라사고에서 멀지 않은
푸엔테토도스에서 출생하다.
1763년: 호세루산에게서 잠시 화가수업을 거친 다음
미술아카데미에 응시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떠난다.
1770년: 마드리드에서 입학시험에 낙방하자
새로운 운명을 찾아서 이탈리아로 여행하다.
1771년: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아카데미에 입상하자
곧 스페인으로 귀환하다.
1775년: 마드리드 산타바바라에 소재한 왕립 벽걸이 양탄자 공장에서
처음으로 자수 데생을 완성한다.
1781년: 사라고사에서 교회천정 벽화를 그리다가 궁정회가 바예우와 다투다.
그 후 아카데미가 규정한 방식대로 작업을 진행해야하는 수모를 겪는다.
1786년: 왕족의 주문을 받아서 파르도의 사계절 연작에 착수한다.
1789년: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위촉된다.
1792년: 중병을 앓은다음 귀머거리가 되다.
인생의 전기를 맞은 고야는 이후부터 밝고 따뜻한 그림대신
섬뜩하고 공포스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798년: 마드리드에 소재한 작은 교회 산 안토니오 델라 플로리다의
벽화를 완성하다.
1799년 고야의 판화집<변덕>이 출간되다.
처음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판화집이 고야에게 불후의 명성을 선사한다.
같은 해 고야는 스페인에서 화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수석궁정화가의 지위에 오른다.
1800년: 카를로스4세의 왕실 단체 초상화를 완성하다.
이초상화는 왕가의 초상을 가식없이 재현한 대담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1810년: 전쟁의 광기를 주제로 한<전쟁의 참화>작업에 착수하다.
생전에 출간할 용기를 내지 못했으나 고야 사후에 빛을 본다.
1814-1815년: 이단 재판소에 회부된 고야는 <옷벗은 마하>와
<옷입은 마하>의 제작경위에 대한 진술을 남긴다.
1819년; 마드리드를 등진 고야는 만사나레스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구입한다.
그곳에서 <검은그림>을 벽화로 남긴다.
1824년 정치적 탄압을 피해서 프랑스의 보르도로 피신한다.
1828년 : 4월16일 망명지에서 고야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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