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천국의 아이들>을 보면서 착한 누이를 생각했다. 이 영화에 나온 알리의 누이동생 자라처럼 내 누이도 착하고 부지런한 꼬마였다. 위로 두억시니처럼 거친 오래비가 둘이고 누이는 고명딸이었다. 하지만 남아선호로 똘똘 뭉친 어머니 밑에서 누이는 마음고생도 참 많았다.
알리네 집처럼 가난하진 않았지만 우리 집도 궁상맞기는 매 일반이었다. 시골에서 이불짐 하나 이고 올라오신 어머니는 가난을 벗기 위해 모진 고생을 감내하셨다. 노량진 본동 산꼭대기 지붕에 루핑얹은 판자집에서 곁방살이를 하면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하루걸러 집에 들어올 때만 숯불을 피워 밥을 하셨다. 한겨울에도 방에 군불 한번 안때고 밥도 밥먹듯 거르면서 말그대로 안먹고 안입는 원시적 자본축적을 이루어내셨다. 그렇게 석삼년만에 그림같은 양옥집을 사서 이사를 갔고, 십년이 못돼서 고래등같은 이층집을 지었다. 하지만 빛나는 자수성가의 과정은 여전히 처절한 절약과 궁핍의 연속이었다.
나는 지금도 한낮에 누워있으면 세스나 경비행기의 우웅하는 프로펠러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아마 오후 2시쯤일게다. 어머니는 늦은 아침을 먹이고 점심을 건너뛰기 위해 그때쯤 삼남매를 억지로 낮잠재우려 했던 모양이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노라면 어디선가 우웅하는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매일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 빠져들었던 기억때문에 그 후론 있지도 않을 그 소리가 거짓말처럼 들리곤 했다.
배고팠다. 늘 군침이 돌고 눈이 횅했다. 점심을 건너뛴 저녁밥상은 늘 수제비 아니면 떡라면이었다. 지금 라면스프처럼 생긴 것이 미제 깡통에 가득 들어있었는데 그걸 두어숫갈 물에 풀고 수제비를 떠서 한사발씩 먹었다. 삼십년이 넘도록 그 냄새가 잊혀지지 않는다. 떡라면도 정말 징글징글했다.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었다. 아이들이 밀가루 음식에 넌덜머리를 내자 어머니는 드디어 찬밥을 물에 말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은 어째 뜨거운 밥은 없고 양은 밥통 가득히 찬밥만 있느냐 말이다. 여름엔 찬물에, 겨울에는 뜨거운 물에, 반찬은 김치 한보시기가 끝이었다. 나는 지금도 딴건 몰라도 찬밥만큼은 절대 사절이다. 도시락도 찬밥이면 절로 이맛살을 찌푸린다.
동네아이들이 아이스케키나 뽑기 같은 군것질을 할 때면 우리 남매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집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있는게 어린 나이에도 너무 자존심상하는 일이었다. 그거 한번 배터지게 먹어봤으면, 아니 그냥 가끔씩 한입 만 먹을 수 있다면. 참다 못해 어린 동생은 아이들이 먹다 땅에 떨어진 게 있으면 주워먹기도 했다. (그걸 땅그지라고 한다더군.) 어머니는 그런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참상을 짐짓 모르는체 하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면 거지된다>고 가르쳤다. 아이들이 먹을 것을 갖고 잘난체 하는 꼴을 참다못해 <우리엄마가 니네집 망한대, 거지된대>라고 쏘아붙였다가 동네싸움 날 뻔 한 적도 있었다. 우리 남매의 어린 시절은 하루종일 심심하고 배고팠던 기억만이 목욕탕안의 수증기처럼 가득하다.
다들 왜 그렇게 극성맞았는지 우리들은 엄청나게도 싸워댔다. 형제는 하루가 멀다하고 툭탁거렸고 그 바람에 휘말려 막내누이까지 노상 얻어맞고 울곤했다. 어머니는 장남이 잘돼야 집안이 제대로 선다고 생각하는 양반이었기 때문에 동생들은 못난 형이요 큰오빠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야 했다. 좋은 옷 맛난 음식 학용품 과외 등등... 동생들은 옹졸하고 이기적이며 절대로 베풀 줄 모르는 맏이에게 끝없이 양보하고 또 양보했다. 특히 누이의 희생은 절대적이었다. 몇년전 명절이라 다들 집에 모였는데 누이가 옛날 눈물났던 얘기를 우스개소리처럼 꺼냈다. 어느날 밤 자기는 자고 오빠들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뭔가 먹을 것을 사들고 오셨더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지만 얼마나 어머니가 때려잡았는지 도저히 눈치 보여 일어날 수가 없더란다. 그때 어머니가 자기는 깨우지 말라고 하면서 오빠 둘한테만 먹을 것을 나눠주는데 쩝쩝 소리하며 맛있는 냄새하며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단다. 그날 속으로 울면서 얼마나 어머니와 오빠들을 원망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 말끝에 누이는 평생 가장 창피했던 기억이라며 웃지못할 에피소드 하나를 더 꺼냈다. 초등학교때 어느날 갑자기 신체검사를 하게 됐단다. 다들 빤쓰바람으로 한줄로 서라고 하는데 미치겠더란다. 오빠가 입던 남자 삼각빤쓰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 뻥 뚫린 삼각빤쓰, 그것도 너덜너덜 구멍이 난 것을 선생님과 아이들 앞에서 보여야 한다니. 와 하늘이 샛노랗더란다. 누이는 그날 자기가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고 했다. 워낙 당황하고 놀라서 아무 생각이 없었고, 다만 그런 걸 딸에게 입힌 어머니를 지독하게 원망했던 기억만 또렷하다고 했다.
누이는 참 착했다. 어렸을 때 코수술을 여러번 받아야 했다. 한번 수술 받을 때 몇시간씩 전신마취를 해야할 만큼 큰 수술이었다. 누이가 입원치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가방 가득히 맛있는 것을 넣어오곤 했다. 병원에 있을 때 받은 것을 안먹고 가져오는 것이다. 미군부대에 다니던 아저씨가 넣어준 캠벨 양송이스프의 그 고소한 맛을 지금도 잊지못한다. 그때의 감동때문에 지금도 마켓에 가면 꼭 한두개씩 집어 넣지만 입맛이 변했는지 정작 먹지는 않고 냉장고 안쪽에 처박아둔다. 언젠가 누이가 아팠을 때(홍역이었나) 아버지가 약으로 바나나 한덩어리를 사오셨다. 그게 보통 물건이건가. 당시 바나나는 감히 우적우적 베어먹을 수 있는 그런 먹거리가 아니었다. 아 바나나!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아니던가. 그 향긋한 바닐라 맛의 상아색 알맹이를 살짝 깨물면 입안에 착 달라붙던 속살의 그 촉감. 갈갈이처럼 속껍질을 갉아먹은 후에도 하루종일 껍질을 들고다니며 그 이국적인 남양의 잔향에 황홀해하기도 했던 시절. 고작 열살도 안됐을 어린 누이는 자기 약으로 사온 바나나를 내게 주면서 어서 먹으라고 했다. 그 바나나를 빨면서도 지지리 못난 오래비 녀석은 왜 누이한테 한 입 먹어보란 얘기도 못했을까.
어렸을 때 총기가 대단했던 어머니는 시원찮아 빠진 남동생 둘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소학교 졸업으로 학교와 영영 이별을 해야했다. 학교에 보내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렸던 어머니는 끝내 자기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외할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모질고 악착스럽게 돈을 모아야했던 첫번째 이유는 자식들에게 원없이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다. 어머니 말씀대로 무지막지한 돈을 과외비로 쓸어넣었다. 꼭 그렇게 해야 했을까 싶을 정도로 어머니는 다른 집 아이들이 하는 과외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끼워넣었다. 고등학교 3년동안 갖다바친 과외비만해도 집 한채 값이 넘었을 게다. 과외방으로 쓰이던 우리집에 숱하게 드나들던 아이들중에는 정주영씨의 손자들도 있었다. 빗나가는 얘기지만 그 아이들이 국사과외를 하러 왔는데 맨발에 금목걸이를 하고 온 것이 너무 신기해서 내내 곁눈질했었다. 그 아이들을 태워온 자가용들이 좁은 골목길을 빼곡하게 채웠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얼굴은 기억이 안나는데 그중 한 아이가 정세영씨 아들로 현대자동차사장을 했다가 사촌형 몽구한테 뺏기고 현대정공 사장으로 간 친구다. 눈주위가 부석부석한 것이 하나도 안변해서 금방 알아보았다. 어머니는 지금도 현대그룹 손자들하고 과외했던 얘기를 하시면서 내심 당신의 교육열에 흡족해하신다.
그렇게 과외를 하고도 재수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다. 나만큼은 아니어도 역시 어머니의 적잖은 교육투자를 받았던 동생은 무난히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둘을 서울대에 넣고 나서 이제 다 끝났다라고 해방감을 느끼셨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여태 눈에 들어온 적 없던 막내딸이 고2가 된 것을 아시고는 누이에게 한마디 하셨단다. 오빠들한테 다 빨리고 더이상은 못버티겠다. 네가 가겠으면 가거라. 그동안 오빠들 공부하는데 여벌로 끼어 한구석에 앉아있다가 끄덕끄덕 졸면 저 계집애가 오빠들 방해나 한다며 저리가서 자라고 핀잔이나 듣던 누이. 중학교때 반에서 십등 안에는 들었는지 조차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그녀는 주위의 상대적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이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어머니는 그런 누이를 처음으로 대견하다며 칭찬하셨다. 거저 키웠는데 이대를 가네. 남들은 별 난리를 치고도 못가는 이대를 그냥 들어가네 글쎄. 그러다가도 이대가 별거 아닌거 아녀. 그렇게 공부하고도 들어가니 이대가 뭐 그려. 라고 공없는 말씀으로 말끝을 흐리셨다.
착한 그 누이가 이제 마흔의 중년이 됐다. 두 아들의 어머니요, 시부모를 한집에 모시고 사는 외며느리로 집안의 대들보 노릇을 하고 산다. 고등학교 선생을 십수년하면서 학생들한테 가장 인기있고, 선생들 사이에서도 싹삭하다고 인정받을 만큼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다. 그 누이가 지금은 많이 힘들어 하고 있다. 몇년전만해도 집안이 윤기가 반질했는데 얼마전에 어머니가 갔다오시더니 예전같지 않더라고 하셨다. 생활고도 있고, 시부모님과 아이들에 치이는 일도 많은가보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한다고 밖으로 도는 것도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가끔 투정처럼 오빠가 잘되서 좀 도와주라고 하지만, 제 앞가림하기 바쁜 멍충이 오빠는 지금도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여전히 엉거주춤할 뿐이다.
오빠가 구두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그럼 난 어떻해라고 하며 금방 눈물이라도 주루룩 흘러내릴 듯한 눈으로 쳐다보던 자라. 오빠의 큰 운동화를 신고 달려가다 도랑에 한짝을 빠뜨리자 그걸 잡으려고 도랑을 따라 종종걸음치며 연신 헛손질을 해대던 가련한 누이. 늘 설겆이를 하거나 아기동생을 돌보면서도 힘들다고 투정한번 부리지 않는 누이. 커다란 눈망울의 알리는 누이에게 오빠만 믿어 하면서 발이 터지고 찢기도록 달음박질을 했는데 이 오빠는 이날 입때까지 무엇하나 해주는게 없구나. 이렇게라도 몇줄 적으면 반성이라도 될까 싶어서, 혹시 네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좋아질까 해서 한밤중에 쓴다. 내일 전화라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