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킹의 대화의 법칙>(How to Talk to Anyone, Anytime, Anywhere)을 읽으면서, 문득 나의 대화 스타일에 대해 궁금해졌다. 나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인가, 사람들은 나와 대화하고 싶어할까, 나의 대화철학은 무엇일까. 정말 대화를 잘했다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나. 교내웅변대회에 각반마다 한명씩 차출(?)되는데 반장인 내가 뽑혔던가 보다. 아버지가 나를 이층 베란다로 끌고 올라갔다. 거기서 동네사람들한테 아무 얘기나 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아니 꼬마인 제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이러십니까. 깡을 키워주시겠다는 생각엔 충분히 감사하지만 이건 과잉교육이 분명합니다. 그 부작용을 말씀드리자면... <더 크게 소리 못질러. > 뒷통수에 불이 번쩍하자 나는 그때까지의 모든 이성적 견해와 설득력있는 논리구성을 포기한채, 아무 소리나 고래고래 질러대는 미친소년이 돼야 했다. 그때 골목어귀에 모여섰던 아줌마들은 박수로 격려해주셨고, 집집마다 열린 창문에는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이 감나무 홍시 매달리듯 하였더라. 

한껏 탄력 받은 아버지는 급기야 새벽잠 많은 나를 두둘겨 깨워 앞세우고 약수터에 올랐다. 그때까지 외운 원고를  대중앞에서 실연해보임으로써 소심한 아들의 배짱다지기를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철없기에 망정이지 아마 나이든 놈 끌어다 그 일을 시켰으면 거품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이런 극기훈련끝에 나는 결국 일등으로 그 성의를 보답했다. 그리고 1만여명에 달하는 전교생 앞에서 두손을 불끈 쥐고 책상을 연신 두드리며 여러분에게 호소하기를 거듭했다. 어느새 나는 연설잘하고 말잘하는 어린이로 인정받게 되었다. 6학년까지 이런 나의 이미지는 거듭되는 웅변대회 입상으로 별탈없이 유지됐다.

중학생인 나는 반에서 늘 앞줄을 차지하는 땅꼬마에, 대갈장군이며 얼굴에 항상 노랑꽃이 핀 못난이였다. 이제 반장이며, 웅변이며 하는 것들은 일단 몸이 받쳐줘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공부하고는 또 달랐다. 초등학교 시절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던 미술, 붓글씨, 웅변등의 특기와는 영영 이별을 고해야 했다. 그 대신 백일장만은 장원의 타이틀을 내내 놓치지 않았다.  고백하건데 당시 나의 작문은 적당한 베끼기와 윤문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고리짝에서 우연히 발견한 <학생 백일장 당선작 모음집>에는 뻬껴먹기 딱 좋고, 절대 들킬 리 없는 구슬같은 글들로 가득했다. 그중 주제와 어울릴 성 싶은 글 몇개를 짜깁기하고 양심상 내 생각 서너줄 섞어서 제법 그럴싸한 문장을 엮여냈다. 우습게도 당시 주제는 90%가 유신과 새마을운동, 백억불 수출과 천불 국민소득 등 대단히 현실적인 것들이었는데도 나의 이런 위작은 맹위를 떨쳤다. 유난히 백일장이 많았던 그때 나는 무려 십여회의 장원을 거머쥐어 전무후무한 사기 필력을 과시했던 것이었다.  

고등학교시절은 모든 면에서 나에겐 암흑기였다. 아무것도 말할 게 없고 말하고 싶은 것도 없다. 어머니는 큰아들인 내가 그 학교에 가게 된 것이 전적으로 당신의 진학지도 미스라고 책임을 통감하신다. 그때 허세부리지 말고 가까운 동네 고등학교에 보냈어도 아들의 인생이 홱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신다. 그때 얼마나 데었는지 외고나 과학고 같은 특목고에 자기 자손을 보내는 것엔 결사반대하신다. 여하튼 고등학생인 나는 3년동안 학교와 과외를 쉴새없이 줄달음치는 허깨비에 불과했다.

대화하는자로서의 진면목은 고교와 재수, 대학교 1년등 총 5년의 잠복기를 거친 후 화려하게 부활했다. 대학교 2학년때부터 본격적인 학생운동에 나선 나는 우리 과 선후배와 동기생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영문과처럼 토양이 부실한 현장에선 선동이나 섣부른 로직이 먹히질 않는다. 오로지 개별적 인간관계만이 학생대중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금방 깨달았다. 그리고 맹렬하게 실천했다.  수업도 안들어가고 하루종일 과사무실에서 사람들과 대화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경청이 중요하단 것을 알았고, 적절한 질문과 권위있는 메시징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게다가 고민이 많은 나이 아니던가. 사랑의 불장난부터 가정문제, 진학문제 등등 대화의 소재도 무궁무진했다. 나는 굳게 다문 입, 즉 철통같은 비밀보장으로 그  성가를 드높였다. 이를테면 남자쪽과 여자쪽으로부터 각각 얘기를 들었어도 전혀 금시초문인 듯 연기했다가 나중에 저희들끼리 맞춰보고 나의 자물쇠입을 찬탄해마지 않았다는 류의 전설이 횡행했다. 아니할 말로 내가 입벌리면 쌍코피 터질 사람이 오륙십명은 족히 됐지만, 대화의 철학에 흠잡힐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으니 그때가 가장 멋진 놈이었다. .

대학에서 공부는 안했지만 사회가 필요로하는 대화훈련만은 최고로 연마했다. 전자신문에 들어와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과정, 그리고 스물여덟의 나이에 노조위원장이  됐던 것도 모든 그 내공의 덕이었다. 당시 나는 사람들과 무엇이든 같이 하고 싶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누군가 함께 해서 기쁨을 같이하고 싶었고 그가 내 노력에 힘입어 좋은 성과를 얻으면 내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자만한 탓일까. 대화의 달인으로서 갖춰야할 자세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두사람의 측근이 생기면서 그들과 나머지 사람들을 나눠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즉 다른 사람의 얘기를 측근과 나누기 시작하면서 내 판단보다 그들의 판단에 의존하게 됐던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측근들이 이견을 내면 나는 쉽게 그들의 판단을 따랐다. 결과적으로 바보같은 짓이었다. 대화는 지구상에서 그시간에 나와 상대방 두사람만의 세계가 만나는 것이다. 천하의 사기꾼이라도 그때만큼은 솔직할 수 있으며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설사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판단해야 옳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인의 장막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런 장벽이 쳐지면 사람들은 대화할 마음이 사라지고, 정치력은 급격하게 떨어진다. 내 귀가 매우 얇구나하는 생각을 그때 했었다. 

노조일을 그만두고 일선기자로 복귀하면서 나는 취재와 인터뷰라는 방식을 통해서 대화의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전자신문이라는 특수성, 즉 모르는 얘기가 너무 많아서 대충 전화로 때울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 일년동안 전화취재란 없었다. 무조건 만나서 얼굴보고 취재를 했다. 모르는 것은 솔직히 모른다고 했고,  내가 이해할 정도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 전문가라고 협박(?)했다. 덕분에 천부적인 기계치였던 나는 취재 3개월쯤에는 문리를 깨칠 수 있었고 반년이 채 못가서 업계 전문가행세를 했다.  쫓아다니며 교육받기에 급급했던 학생기자인 나는 어느새 기업들을 돌아다니며 가끔 강의도 하는 베테랑이 됐다. 그때 나는 책이나 자료보다 훨씬 효과적인 교육이 대면방식임을 절감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정보를 얻는 기술을 배웠고, 인간적으로 친해지는 기회를 많이 얻었다. 결국 그 덕분에 조선일보로 가게되었다.

조선이후 전주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일을 해야했던 시기의 대화는 거의 명령이었다. 아무리 겉포장을 해도 그것은 명령을 받고, 명령을 하는 관계 그것뿐이었다. 취재를 통해 간신히 복구된 대화의 덕목은 또다시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조선일보 전기에는 취재를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덜했다. 한국에서 디조로 소프트중심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뒤돌아보기도 겁날 만큼 폭압적이고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단절기였다.

그 시기에 나는 터무니없는 일욕심을 부렸다. 사람들은 무조건 내 기준에 맞춰야 했으며, 그렇지 못하면 무능하거나 나태한 자로 낙인찍혔다. 그럴 경우 대화는 형식만 존재할 뿐 내용으로는 전혀 인터액티브하지 않게 된다. 공동의 목표로 만들지 못한다면 대화는 명령을 주고받는 자리에 불과하다. 그때 그랬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했다. 이건 명백한 대화의 포기선언이다. 그가 나를 도와야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리고 그 이유를 내가 설명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나를 돕지 않는다.> 

나는 경청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상대방이 말을 많이 하면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회의시간엔 나의 일방적인 설교가 넘쳐났다. 질문해서 깨우치기 보다 <이해가 안가면 물어보라>고 했다. 질문받기 귀찮아서 한꺼번에 설명하고 끝내는게 낫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자세히 설명했는데도 안되면 <바보같은 것들>이라고 무시했다. 가슴에 못박는 모욕적인 얘기를 서슴지 않았다. 짜증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평생 내 이름에 침을 뱉을 사람들이 생겼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요 악덕이다. 모든 교과서에서 대화성공의 원칙과 세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짓을 줄창 해댔으니 내가 성공했다면 그 책들은 몽땅 반품될 뻔하지 않았나.

그래도 위안을 삼는다면, 디자인중심에 참여하면서 프리젠테이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 두고두고 큰 자산으로 남았다. 컨셉을 잡고, 청중의 생각을 살피는 것, 흥미로운 예시와 설득력있는 논리로 마음을 잡는 기술,  결정적인 한방으로 대세를 결판내는 것, 그리고 확실한 마무리. 나는 커다란 칠판에 수십개의 빈칸을 그려놓고 한시간만에 그것들을 프리젠테이션 내용으로 다 채워넣는 훈련을 거듭했다. 컨셉과 카피와 디자인, 이미지를 가르쳐준 정말 훌륭한 디자인중심의 선수들에게 머리숙여 감사한다.

최근 몇달동안 독을 빼고 있다. 누구에게도 섣부른 주의주장을 하지 않으려 한다. 내 의도대로 상대방을 끌고 가려는 과거의 못된 습관을 버리려고 애쓴다. 이는 내 생각이 옳다거나 논리적이라고 내심 믿어왔던 황당한 자만심을 철저히 포기하는 것이니 내게 참 좋은 일이다. 내가 기대고 있는 코칭방법론은 이런 점에서 매우 파워풀하다. 상대방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우선인 점도 그렇고,  코칭 프로세스도 실험결과 유효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코치의 철학적 포인트, 즉 인간은 항상 좋든 나쁘든 변화한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그 자체로 갖고 있다. 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상대방에 대한 무한 신뢰가 생기고 나의 책임감이 한층 무거워진다. 코칭은 무엇보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커뮤니케이션을 총체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적극적인 계기를 만들어냈다.

30여년의 궤적을 살피다보니 대화의 커브는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의 사이클을 그리며 음지와 양지를 거쳐왔다. 지금은 바닥에서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 신나는아이들의 교육시리즈를 완성하기위해 대화에 관한 책들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이것 또한 내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대화의 장인들을 만나면서 한수씩 배울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유명한 사회자들이 대담이나 좌담에서 던지는 각종 질문들과 자세를 평가해봄으로써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한다. 그렇게 재미없는 프로그램을 이렇게 라도 보지 않으면 아예 눈조차 돌릴 성 싶지 않다. 그나마 이것도 잘 생각한 것 같다.   

래리킹의 말씀대로 <말하지 않고 살수는 없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말하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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