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쓸모없는 나무>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내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가죽나무'라 부르네.
몸통은 너무나 뒤틀렸고,
옹이로 가득 차
아무도 곧은 널빤지 한 장 얻어내기 힘들지.
나뭇가지들은 어짜나 굽었는지
아무리 궁리해도
쓸모있게 잘라낼 방법이 없다네.
길가에 서 있는데도
들여다보는 목수조차 없어.
당신의 가르침이 그런 것 같네....
크기만 할 뿐, 쓸모가 없어."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는 들고양이를 본 적이 있는가?
몸을 웅크리고 먹이를 노려보면서
이쪽 저쪽 높고 낮게
펄쩍 뛰다가 마침내
덫에 걸려들지.
그렇지만 들소를 본 적 있는가?
천둥구름처럼 거대하고
위엄있게 서 있지.
크냐고? 물론,
쥐도 잡지 못하네!
자네의 큰 나무도 마찬가지, 쓸모없다고?
그러면 텅 빈 들판,
황야에 그걸 심어봐.
한가로이 주변을 거닐고,
그늘아래에서 쉴 수 있겠지.
아무도 도까나 낫으로 겨냥해
그걸 베려 하지 않겠지.
쓸모없다고? 조금도 걱정할 게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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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신부 토머스 머튼이 쓴 <장자의 도(The Way of Chuang Tzu)>의
첫 장이 이 이야기로 시작된다.
우화는 시와 동기간이다. 특히 장자의 내용은 지극한 비유와 은유로
이어져 있으므로, 전체가 하나의 연작시로 봐도 무방하다.
이솝우화나 안데르센의 동화같은 서양얘기들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없는 무게와 향기가 담겨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자를 읽고 또 읽는다. 코쟁이 신부님도 장자의 팬인 모양이다.
언제였던가. 자괴감에 잠 못들던 어느 날들 중의 하루였을게다.
선배에게 <제가 그렇게 쓸모가 없나요?>라고 물었다.
<무슨 자다가 봉창 터지는 소린가>하고 심드렁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 양반은
이윽고 <지난 십수년동안 너는 꽤 인기가 좋았던 모양인데,
적어도 나한테는 별로 쓸모가 없는 녀석이었어.>라고 말했다.
대학 다닐 때 광화문 등지에서 반독재 가두시위가 있던 날이면
학교나 경찰서에서 집으로 득달같이 연락이 왔다.
댁의 아드님은 밖에서 보이기만 해도 군대에 잡혀가니
알아서 잡아놓으슈.
그날 창문을 따고 담을 넘다가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어머니, 역사가 저를 부릅니다.>라고 중얼거렸다.
훗날 이 얘기를 했더니 다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마치 버스가 급정거해서 운전석까지 굴러간 놈이 무안을 감추려고
<기사 아저씨가 나 안불렀대>라고 했던 것처럼
친구들은 <그때 내가 너 안불렀어>라고 놀렸다. 나도 바보처럼 킬킬 웃었다.
쓸모있다가도 쓸모없어지는게 세상사요, 세상인심인가보다.
세상이 원하는 쓸모를 요리조리 눈치빠르게 따라가지 못했던가..
왜 그랬을까? 나는 세상에 어떻게 쓰이길 바랬던가.
아침이면 바삐 일터로 달려가는 수많은 저 인파는 어떤 쓸모가 있는걸까.
그들은 그 쓸모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가.
아니면 언제 쓸모없다고 내쳐질까 전전긍긍하고 있는건 아닐까.
여태 그 쓸모에 들고 싶어 안달했던 결과는 피폐하고 참담했다.
어쩐지 <이게 그다지 쓸모 없을텐데> 했던 내심의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
내가 확신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따라서 전력하지 않았던 그 쓸모는
내가 손을 놓는 순간, 바닥에 곤두박질 쳐버렸다.
처음엔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지금도 가슴이 가끔 벌렁거리곤 한다. <그러지 말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 다시는 창녀처럼 화장하고 내키지 않는 몸을 팔진 않겠다.
장자는 다시 말한다.
"산봉우리의 나무는 제 자신이 적이요,
불꽃을 일으키는 기름은 제 몸을 사른다.
계피나무는 먹을 수 있기에 베어지고
옻나무는 돈이 되기에 잘린다.
쓸모있다는 것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는 모두들 안다."
그 쓸모라는게 궁극에는 어떤 것인지 모두들 알텐데
다들 줄서서 고뇌와, 이젠 어쩌지도 못하는 궁색한 처지로
스스로를 몰아넣는 까닭은 무엇일까?
세상의 범속함, 그리고 <튀어봐야 별 수 없다>는 부화뇌동은 예수도 넘고 부처도 내쫓는다.
대단한 구속력이 아닌가.
내 쓸모는 한동안 내가 정하는대로 벼려질 것이다.
분칠하고 연지곤지 찍었어도 내가 원하는 신랑이 아니면
장옷 소매를 결코 내리지 않겠다.
그렇게 세상의 쓸모를 뛰어넘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