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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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는 일에 전혀 경험이 없었다.
딱이 더불어 하는게 없어도 사람 소리 곁에서 들리지 않으면 안절부절했다.
별 일 없이도 새벽까지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십여년 버릇이 되니까 정말 혼자 있기가 겁이 났다.

어쩌다가 혼자 있게 됐다.(사실은 내가 결정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홀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독한 고독의 시공간에 나를 집어넣었다. (사실은 사람들은 그냥 보고 있었다.)
아침에 깨는 것부터 밥먹고 운동하고 책 보고 몇 글자 끄적이는 것까지
나 혼자 알아서 해야한다.
물론 그렇게 안해도 누구도 걱정하거나 질책하지 않는 진공상태에 있다.
그랬더니 놀라운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났다.
새벽 3시에 억지로 잤는데 아침 7시면 눈이 딱 떠진다.
예전처럼 침대에서 뒤척이는 법이 절대로 없다.
현관문을 삐긋 열고 신문을 집어다 거실 소파에 가부좌로 앉아
천천히 뒤적거린다.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세상 이야기다.
피곤에 지친 눈은 활자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습관일 뿐. 신문을 마저 끊을까 하다가 북섹션때문에 놔두기로 한다.

삼십년동안 하지 않던 아침식사를 건너뛰면
아무 일도 하는게 없는데도 얼마나 허전한 지 모른다.
그다지 한가한 편은 아닌데도 일상의 아이템이 없어진다는 것은 굉장한 변화요, 충격이다.
정신건강에 별로 좋지 않다.  뱃속이 더부룩해도 그냥 습관처럼 먹어둬야 한다.
저녁에 해질녘 어스름 동네 빵집에 가서 다음날 아침
요기할 빵을 하나 산다. 큰 것을 사거나 두개를 사면 곤란하다.
저지방 우유 한잔과 감귤주스 한잔을 크리스탈 컵에 담아
탁자위에 올려놓고는 물끄러미 쳐다본다. 기구한 인연이다.

보았느냐. 담쟁이들아. 이것이 저 뜨겁던 날
너희들과 살을 섞고 팔을 걸어
이 세상 온갖 벽을 다 푸르게 물들여 보리라 했던 자의 하루다.
이제 너희들 담쟁이식 세계관과는 영영 벽을 쌓게 될 지도 모르겠구나.
고독과 함께 유폐됐던 나는 마치 올드보이처럼
무서운 속도로 적응해가고 있다. 이젠 벽 너머에서
우스꽝스런 공놀이에 정신팔린 너희들이 노골적으로 귀찮아지고 있다.

물론 도종환은 그 벽마저도 담쟁이는 저희들끼리 손을 잡고 이끌어주면서 타넘으리라 그렇게 말했다.
그래. 나는 벽을 쌓을테니 담쟁이야, 너희들이 한번 올라와 보렴.
그렇게 뛰쳐 올라 제발 내 몸을 너희들의 굵은 넝쿨로 휘휘 감아다오.
겨울에 보았던 그 비루하고
노파의 쭉정이 가슴같이 메말랐던 그 담쟁이가 정녕 아니었음을
내게 거칠게 입증해 보여다구. 어서 보여달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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