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욕을 버리라 할 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데>라는 말로 운을 뗀다. 왔가 갈 때 빈손인 것만은 틀림없고, 그걸 모르는 이도 없다. 그런데도 물욕이 세상에 파도처럼 넘치는 걸 보면 그 말의 신빙성이 떨어지는게 분명하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 것과 머슴의 딸로 태어난 것은 태생부터 다르다. 이미 태중에서 얻어 먹은 자양분부터 다르다. 태어나자 마자 비단 강보에 싸여 은수저를 입에 무는 아기가 있는가 하면, 무명홑청에 둘둘 싸여 윗목으로 밀쳐지는 처지가 있다. 빈손으로 나왔을 뿐, 둘의 운명은 천양지차다.
빈손으로 가는 것은 맞지만 죽는 과정도 역시 다르다. 평생 호의호식한 사람이 특별히 힘들게 가는 것도 아니고, 고생만 죽어라 했던 천민이 편하게 뜨는 것만도 아니다. 사람들은 하기 좋은 말로 잘먹어서 생긴 병이 어쩌구, 사실은 악식(惡食)이 보약이라는 둥, 앞뒤를 맞춰 보려고 하지만 궁색할 뿐이다.
생과 멸은 하나로되 그 과정은 결코 같지 않다. 하늘과 땅의 수많은 살아있는 것들의 삶이 멸을 향해 줄지어 가고 있는 장사행렬은 아니다. 그래서 <인생이 다 그런거다>라는 말이 듣기 싫다. 삼십년 면벽수행끝에 깨달았다 하는 것이 고작 인생무상이란 말인가. 도(道)를 깨쳐 얻은 것이 모든게 헛되고 헛되다는 탄식이라면 차라리 깨닫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할 것 같다. 목적지 없이 부유하는 인생도 불쌍하지만, 앞뒤만 잘라 뻔하다고 얘기하는 것도 슬프긴 마찬가지.
없으면 궁하고 추레해지는 것이 범속한 인생사인데 그걸 벗어나 무소유를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갖는다는 것이 곧 집착이요, 그 집착의 뿌리를 잘라내지 않는 한 번뇌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렇다고 버린다는 것 만으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면, 한참 생각해보고 마음을 정해야 옳다.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 어떻게 무소유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소유하되 과한 욕심부리지 말고, 물건때문에 심신을 상하게 하지 말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만약 그정도로 타협을 볼 수 있는 거라면 무소유란 얘기는 꺼낼 필요도 없었을게다. 물욕을 대수롭게 봐선 안된다. 물욕은 마치 술처럼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만 종국에는 나를 마셔버리고 만다. 술싫어하는 놈은 있어도 돈 싫어하는 놈은 없기 때문에 그 중독성은 더욱 맹렬하고 전염성이 강하다.
빌 게이츠는 매년 수십억달러를 기부하고 환원해도 해마다 최고의 갑부가 된다. 아무리 많이 써도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는 하루에 12시간은 돈벌기 위해 일하고, 나머지 12시간은 자기 행복을 위해 돈을 쓴다. 후자보다 전자가 훨씬 맹렬하고 적극적이기 때문에 그의 화수분은 시들줄을 모른다. 물욕이란 기부와 사회환원으로 상쇄될 수도 없으며 미덕으로 대체되지도 않는다. 가끔 신문에 미담으로 등장하는 <시장통 욕쟁이 할머니 평생 억척스레 번돈 10억 장학금으로 쾌척>도 할머니의 물욕을 가려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물욕의 불길을 어떻게 잡을 수 있나부터 따져보자. 첫째, 내가 지향하는 꿈을 가능한 구체적으로 상상하라. 구체적이지 않은 꿈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그 꿈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물건의 양과 쓰임새 역시 가능한 구체적으로 정해놓는다. 세째, 앞의 두가지가 내 분수와 운수에 맞는 일인지 계속 따져본다. 네째, 제대로 맞지 않는다 싶으면 재빨리 축소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어영부영하거나 만용을 부리면 곧바로 보복이 시작된다. 다섯째, 꿈은 작은 것부터 하나씩 이루어가야 한다. 자만을 경계하라. 아홉을 이루었다 해도 열번째로 모든 것을 날릴 수 있는게 인생이다. 여섯째, 자기 자식까지만 신경써라. 그 뒤는 그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다.
무소유의 미덕은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이다. 그 한가지 방법이 내 육신으로부터 정신을 독립시키는게 아닐까. 그동안 나는 나였을 뿐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손가락과 지금 이 글을 불러대고 있는 정신은 언제나 하나라고 생각했다. 정신과 육신이 일체가 되어 더 많은 쾌락과 더많은 만족을 주기 위한 물질들을 움켜쥐려 했다. 문득 내 정신이 원하는 대로 살다보니 불쌍한 육신은 그만큼 고달프고 아파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은 육신에게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하고, 인내를 강요하고, 성취감과 희망을 떼어내 먹이로 던져주었다. 갈때까지 간 뒤에야 정신은 채찍을 놓았고, 자신이 저질러놓은 짓에 대한 뒷감당에 육신은고통스러워했다.
한번 혼이 났으니 정신차렸을 것이다. 육신을 아끼고 돌보되 물욕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정신에게 맡겨진 새로운 임무다. 육신에게 적게 먹이고, 많이 움직이게 할 것이며, 비싼 것을 걸치지 않게 한다. 그러기 위해 정신은 소유에 대한 집착, 터무니없는 욕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부질없는 자격지심부터 들어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능력에 넘친다는 점을 자각해야 하며, 수고로움으로 얻어진 작은 성과에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정신은 육신을, 육신은 정신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나에겐 오늘 하루가 중요하다. 내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사형수의 오늘처럼, 내일 목숨을 건 수술을 앞둔 난치병자의 오늘처럼. 미루지 말고 그렇다고 매달리지도 말고 한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자. 생명의 귀중한 한토막을 희생해 그 댓가로 양에 넘치는 술과 고기를 가지려 버둥거리지 말라, 용서할 일이 있으면 그리하고, 내키지 않으면 잊어버리자. 법정스님은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 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라고 했다.
물욕을 비롯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라. 무소유의 말씀은 생멸의 화두라기 보다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라 내겐 더 소중하다. 법정스님은 매일 하나씩 내가 소유했던 것들을 버리자고 한다. 자식처럼 아꼈던 난분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나니 만행의 발걸음이 이리도 가벼울줄 몰랐다 한다. 그런데 나는 버리기는 커녕 지금도 끝없이 소유하려고 바둥거리며, 빼앗기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고 있다.
지금 내가 실천해야할 무소유는 더이상 가지려고 독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내 품을 벗어나는 것들에게 마음을 뺏기지 말고 그냥 놓아둘 일이다. 원래 내것이 아니었으니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심사숙고하지 않은 댓가와 요행수, 그리고 믿지 못할 내 능력에 기대선 안된다. 한여름 내내 농부가 불볕을 등에 지고 노동하여 얻은 수확이 물욕의 소산이 아닌 것처럼, 끊임없이 독서에 정진하고, 책읽기와 마음공부에 힘써 얻는 결실, 나날의 노동과 공부로 얻어진 결과만을 소유하도록 하자.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은 완전한 노동만이 나를 자유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겠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은 회심(回心), 즉 마음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심화시켜야 한다. 온전한 사람은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 남을 미워하면 그 심화가 내 정신까지 삼켜버린다. 아까운 시간에 남에 대한 미움때문에 나를 불태우는 일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마음을 돌이키면 될 일이다. 악연을 잇지 않겠다, 여기서 끊겠다 생각하고 눈감아버리면 그뿐인데 앙심과 복수의 무한 사이클을 반복해서 무슨 낙을 얻을까.
이 책 <무소유>의 맨 앞장에 적힌 말을 되짚는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소유한 것을 무작정 버리는 것도 할 일이 아니다. 매였다고 판단하고 풀어야 겠다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허투루 취해 갖게 될 번뇌의 악연까지 생각하라. 가진 것의 쓰임새를 정확히 알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쓰는 것이 우선이요, 좋은 뜻으로 널리 쓰이도록 베푸는 것이 그 다음이며, 종국에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도가 되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