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욕에 관한 한 나는 유례없는 지구력과 일관성으로 십년의 관록을 보유하고 있다. 요즘 무엇이 계기가 되어 반신욕이 일대 붐을 일으키고 있는지는 모른다. 내가 한참 반신욕 전도사로 수선을 떨고 다닐 때는 거들떠도 안보던 이들이 갑자기 내 건강을 염려하며 <비장의 필살기>인 듯 반신욕을 강권하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심지어 이런 무형의 행위까지도 '메뚜기의 한 철'은 반드시 있게 마련인가 보다. 

반신욕을 하기 전에 발을 따뜻한 물에 담가줘야 한다느니, 체온보다 약간 뜨겁게 물을 받아야 한다느니, 반신욕에 대한 온갖 비기들이 난무한다. 그것들을 듣다보면 내가 십년동안 잘못된 반신욕을 함으로써 내 몸을 욕되게 한 것이 아닌가 슬며시 걱정이 될 정도다.

고백하건데, 나는 물을 자주 리필하는게 귀찮아서 무지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끝까지 버텨왔다. 2만원짜리 욕조덮개(독서대 겸용)가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빨래판 또는 다리미판을 걸쳐놓고 책을 읽었다. 땀이 제법 흠뻑 나려면 최소한 20~30분은 있어야 하고, 이왕 읽던 책을 1백쪽까지는 읽어야 하므로 반신욕시간은 1시간이 보통이다. 요즘은 뜨거운 녹차까지 훌훌 마셔가며 위로 아래로 열기를 불어넣는 중이다.

바쁠 때는 일주일에 한번이 고작이었다. 일요일 오전 11시쯤에 들어가서 정오를 넘기고 나오는게 보통이었다. 올해들어 백수생활이 시작되면서 반신욕은 아주 훌륭한 시간활용 아이템으로 고정돼있다. 땀을 흠뻑 내니까 나같은 습성인간에게 나쁠 리 없고, 피곤하면 그냥 다리미판에 엎드려 토막잠을 잘 수 있다. 무엇보다 반신욕이 효과적인 대목은 책을 매우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목욕중간에 따뜻한 욕조에서 나와 찬 공기를 맞으며 무언가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당혹스럽다. 그럴 가능성을 차단하고 가만히 앉아 책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되는 것이 반신욕의 가장 큰 장점이다. 반신욕은 책상위에서라면 어림없을, 시간당 1백쪽의 가공할 독서량을 어김없이 보장해주곤 한다.

마이페이퍼에 올린 독후감의 소재들은 거의 벌거벗은 채 읽었던 책들이다. 그 책들은 둔한 글재주로 씌여진 내용보다 훨씬 많은 영감과 깨달음을 주었다. 나는 그런 책들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땀에 젖은 손가락으로 넘긴 탓에 예외없이 쭈글쭈글하기 때문이다.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외면일기>는 무려 닷새동안 내 욕조 가까이에서 온갖 물고문을 버텨냈던 장한 책이다. 처음에는 잘못 집었구나 싶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장자끄 상뻬 같은 프랑스 작가들이 즐겨 엮어내는 조각글 모음을 좋아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집어들었지만, 첫날과 이튿날은 완전 실패였다. 나는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걸 알지만 리마인드용으로 페이지 한쪽 끝을 조금 접는데, 이 책은 이틀동안은 고작 서너 쪽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짝지근했다. 뒤로 넘어가면서 점점 접는 페이지가 늘어나기 시작해서, 마지막 날엔 이 책을 며칠 더 읽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하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반신욕과 비슷하다. 처음엔 맹숭맹숭하다가 웬만큼 시간이 지나야 흡족한 효과를 나타내듯이 적어도 백쪽은 넘어가야 이 책의 별미를 느낄 수 있다. 그 맛이라 함은 발상의 촉매하는 동치미 국물, 또는 크리에이티브를 자극하는 청양고추, 글에 얹혀 답답할 때 마시는 사이다 한 모금에 비유할 만하다. 물론 그것이 나름의 약효나 신통력을 갖고 있는지 과학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몸안에 넣었을 때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내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을 머리에 넣고 난 느낌이 그렇다.

이 책의 특징은 12개월로 나누어 20~30개의 단문들을, 신기할 정도로 아무 규칙없이, 어떠한 일관성도 배제한 채 늘어놓았다는 점이다. 아마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의 지루함과 난삽함은 항상 조리정연하고  수미쌍관한 글들만을 읽어왔기 때문에 느끼는 일종의 멀미같은 것이다. 점차 머릿속이 이 책의 스타일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대로, 스칠 것은 그냥 지나가고, 재미있다 싶은 것은 페이지 한쪽 끝을 접는 행위들이 제법 익숙해진다. (이런 책을 몇권 읽다가 과학이론서같은 것을 보면 미쳐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서 <외면일기>같은 책은 무료하고 권태에 빠진 뇌를 정신없이 뺑뺑이 돌게 만드는데 아주 쓸모가 있다. 던지는 질문이 간결하고 상대방에게 시간을 절대로 많이 주지 않는다면, 그 대답 역시 간결하고 신속하게 마련이다. 이때 그 답이 옳으냐 그르냐에 집착하는 것은 무의마한 일이다. 그의 잠재의식이 그 질문에 대해 도대체 어떤 답을 순식간에 퍼올리느냐를 관찰해본다면 뜻밖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71쪽에 적힌 단문을 소개한다.

문학분야에 있어서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책의 탁월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프로페셔널의 특권이 아닐까한다.  반대로 아마추어는 자기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 싶으면 즉시 그 책의 분명한 장점에 대해서도 아예 장님이 되어 버린다.

---어디 문학분야 뿐이겠나. 사람을 보는 눈도 그렇고, 사람들의 충고 역시 그러하다. 동물은 자기에게 좋은 자극만을 탐닉한다. 이것이 사람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사람 역시 충분히 이성적이고, 자기에게 조만간 좋은 효과를 안겨 줄 것이라고 확신해야 그렇게 된다. 사람은 동물보다 훨씬 영악하게 이기적일 뿐이다.

101쪽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를 만난 기회에 나는 그에게 우리 수상(에디트 크레송)의 그 같은 말(개미떼들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일본처럼 되어서는 안된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개미들에게 과연 일본인 군중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가지 특징을 주목해볼 수 있었다. 즉 곤충학자는 피상적인 관찰자들이 자칫 잘못 보기 쉬운 점 한가지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부산하게 우글대는 개미집을 보면 저마다의 개미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다수의 개미들은 일정한 목적도 없이 그냥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일본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오에는 말한다. 치열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랬다. 지난 십년동안 뭐가 그리 바빴는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숱한 일을 꾸미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만났다. (우연히 그동안 모았던 명함들을 몇백장 넘겨보았다. 그중 기억에 남는 사람은 단 10%에 불과했다. 충격이다.) 지금은 그나마 몇 개 안되는 계획마저 끊임없이 회의하고 있다. 그 많은 사람중에 한달에 한번 전화를 주고 받는 사람은 열 손가락을 약간 상회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대단한 목적도 성과도 없이 그냥 돌아다녔던 셈이다. 치열하게 움직였다는 환상에 빠져 있을 뿐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헛되도다. 헛되도다. 

121쪽.

나는 어떤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다가 글을 몇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과 귀는 매일 매일 알아 깨우친 갖가지 형태의 비정형의 잡동사니 속에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어서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진작가가 하나의 사진이 될 수 있는 장면을 포착하여 사각의 틀 속에 분리시켜 넣게 되듯이 말입니다."

-- 내가 만일 교육부장관이라면, 당장 걷어치우라고 지시해야 할 일이 학동들에게 일기 따위를 쓰게 하는 비교유적 행위다. 선생들조차 그렇게 쓰기 싫어하고, 쓰기 힘들어 하는 일기를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작문 연습이라면 더 좋은 교육방법이 백한가지는 될 게다. 자기 생활의 반성을 요구할 양이면, 방학 때마다 신나는아이들 캠프에 열흘 쯤 보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솔직히 선생들은 자기 생활에 반성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만약 그러하다면 일기쓰는 숙제같은 건 절대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미셸이 추천하는 외면일기 방식의 사물관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작업 역시 훌륭한 선생의 코치 없이 아이들 개인의 공부로 맡겨놓기엔 역부족 아닐까. 교육의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교사의 문제일 뿐이다. 후진국의 후진 교육은 후진 인간들을 낳고, 그 후진 인간들이 후진 교사가 되어 후진 교육을 하기 때문에 후진국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236쪽의 단문.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에 내가 노벨상을 받게 된다면, 나는 이 사제관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그 안에 밀립으로 만든 투르니에 인형을 앉현호고 나 자신은 이사를 가버리겠다. 나는 가명으로 살아가고 가명으로 글을 쓰면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내게 그것은 어떤 완전한 변신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나는 에밀 아자르가 되어버린 로맹 가리의 변신에 온통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 사실이다. 그토록 멋지게 시작했지만 그토록 비극적으로 중단되어버린 그 변신 말이다. 노벨문학상의 기막힌 에너지는 로맹 가리가 실패한 바로 그 일을 어쩌면 내가 성공하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

-- 새 인생을 시작해야할 각별한 이유가 있고, 그 전 인생과 확실하게 선을 긋겠다는 각오가 서있다면 가장 먼저 시도할 만한 것이 다른 이름 갖기다. 사람들은 의외로 다른 사람들의 디테일에 소홀하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99% 정도의 사람들에겐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가명은 익명보다 더 숨기 쉽기 때문에 굳이 잠수함을 타는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잠수함을 탔다간 가족들에게 더 빨리 발각되기 십상이고, 그 후엔 집요한 감시마저 따라붙기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새 이름을 지을 때는 며칠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 이름이 마음에 안들면 새인 생마저 금방 짜증나기 쉽기 때문이다.(그 정도라면 그냥 이어서 사는게 속편할텐데.)   

로맹 가리와 아멜 아자르의 관계에 대해 고종석이 쓴 글이 있다.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에서 태어난 로맹 가리는 10대에 어머니를 따라 니스에 정착해 프랑스인이 되었다. 그의 직업적ㆍ문학적 출발은 하층 계급출신의 귀화인으로서는 두드러지게 화려했다.제2차 세계대전 때 자유프랑스 공군으로 복무한 그는 종전 뒤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외교관이 돼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갔고, 사실상의 처녀작인 ‘유럽의 교육’(1945)으로 비평가상을 받았다.

볼리비아 주재 프랑스 대리대사였던 1956년 로맹 가리가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받았을 때, 프랑스 문단과 정계는 그에 대한 존경과 질투로 가득 찼다.그 뒤 자신에 대한 평단의 채점이 박해지자,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가명으로 ‘자기 앞의 생’(1975)을 발표해 다시 한번 공쿠르상을 받았다. 늙은 유대인 창녀와 사생아 출신 아랍인 소년 사이의 슬프고 굳센 우애를 그린 이 작품 말고도,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지금 그 소설들에서 로맹 가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누구에게도 너무 쉽지만, 그의 생전에 그 목소리를 들을 귀를 지녔던 비평가는 극소수였다.

‘재능의 샘이 철철 흐르는’ 신예 작가 에밀 아자르와 그를 질투하는 ‘한물 간 작가’ 로맹 가리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로맹 가리의 유고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1981)을 통해서야 확인되었다. 로맹 가리는 이게임을 통해 비평가들의 거드름과 변덕과 무능과 편견을 한껏 조롱한 것이다.

1980년 12월2일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가 입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당겼다. 66세였다. 자살하기 얼마 전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게 아니라 단지 무명이었을 뿐이네.” 유언처럼 돼 버린 이 말은 로맹 가리가 프랑스 문단과 벌인 파천황의 게임 때문에 더욱 깊게 울린다.

255쪽에 남긴 미셸의 농담

가가린은 우주여행에서 돌아오자 여러나라 국가원수를 순방한다. 소비에트 제1서기 흐루시초프가 그에게 무든다. "동무, 하늘나라에 다녀오셨군요. 그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나요?" 가가린이 대답한다. "유감이지만 아니었습니다. 신을 만났어요. 흰수염이 난 그 덩치 큰 노인은 구름의자에 앉아있더군요." 흐루시초프가 소리친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사실 나는 언제나 사제들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이건 큰 문제로구먼.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줘요." 그후 가가린은 바티칸으로 가서 교황 요한 23세를 알현하게 된다. "그래 하늘나라에 갔다왔다지. 하나님을 만났나? 하나님은 계시지?" "유감이지만 아네요. 똑똑히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자 교황이 소리쳤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사실 나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무신론자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280쪽 단문은 내게 경건한 반성을 촉구한다.

독학한 사람과 정규적인 공부를 한 사람과의 차이를 그는 이렇게 설정한다. 독학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배웠다. 그의 교양은 자기 자신의 인격의 한계 내로 제한돼있다. 반대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골고루 다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장점은 엄청난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보기에 자신으로서는 별 흥미도 없는 지식들을, 나아가서는 싫어하는 지식들 또한 습득해야 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마음의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내게 문과가 적성에 맞는다고 주입하셨다. 수학과 과학은 만점을 맞아야 하지만 영어과 국어보다 잘 할 이유는 없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1만 하고 수학2는 안해도 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이과 아이들은 영어 심층 독해를 하지 않아도 무방하고 국사공부 하는 놈은 바보라는 얘기와 같다. 얘기가 엇나가지만, 요즘 이공계가 철저히 무시당하게 된 배경에는 이같은 무식한 교육정책이 암의 근종처럼 박혀있다. 나는 한때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 하고싶은 일만 하기에도 인생은 짧다라고 떠들고 다녔다. 말도 안되는 얘기다. 적어도 대학졸업하기 전까지, 이른바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지적 편식이란 용납되선 안된다. 지금은 그런 바보같은 소리를 지껄일 시간에 하기 싫은 공부, 하고싶지 않은 일도 가능한 적극적으로 해볼 것을 하는 후회가 든다. 반성의 뜻으로 과학책(그래봐야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류,  또는 붉은 여왕, 환경에 관한 몇몇 골치아픈 책)을 집중적으로 사들였지만, 책꽂이에 고스란히 박혀있다. 말로 안되면 맞는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때려줄 선생님도 없는 불쌍한 나이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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