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번하옵고 제 살아온 이력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스물 일곱살 때 신입기자 환영 회식자리였습니다. 선배 몇 분이 "벌써 우리 나이 서른이야, 니들은 젊어서 좋겠다."라고 가당찮은 주사를 늘어놓더군요.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서른 넘어 무슨 낙으로 사니, 이 냄새나는 노땅들아." 그렇게 주먹감자를 먹이고 난 후, 십년 동안은 정말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력서 쓸때마다 주위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요.
그 십년은 좋게 말하면 질풍노도의 시절이요, 솔직히 말하면 무서운 줄 모르고 닥치는대로 살았습니다. 좌충우돌, 운명이 손잡아 끄는 대로 눈 질끈 감고 내달렸습니다. 몇 가지 파편처럼 떠오르는 기억을 적어봅니다.
사회 첫 발부터 심상찮게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남들 다 가는 군대 가면서 이제야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누나 허튼 소리를 쳤습니다. 아뿔싸 민중은 커녕, 5공 군부의 핵심인 국방부 장관실에서 희한한 졸병 생활을 2년간 하고 나왔습니다. 대학시절 가슴 두근거리며 시위전단에 적어넣던 이름들의 실소유자들에게 척 소리 나게 경례를 붙여야 했습니다. 적어도 군대가서 축구한 얘기는 안해도 될 만큼 진귀한 경험을 했지요.
꼴통 중대장 덕분에 머리 빡빡 깎이고 말년휴가를 나왔습니다. 학교 과사무실에서 일하던 동갑내기 아가씨가 '다 컸는데 부모님한테 손벌리지 말고 용돈이나 벌라'며 일자리를 얻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국내 최고의 전문 일간지가 된 전자신문이었습니다. 87년 입사 당시에는 주2회 나오는 주간지였고, 기자도 스무명 조금 넘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직장이 전반생을 결정한다는 말은 대충 맞습니다. 다 좋은데 한가지 걸리더군요. 저는 지독한 기계치요, 타고난 컴맹입니다. 하필이면 왜 가장 소질없고 관심없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됐는지. 아들아. 이런게 운명이란다.
뜨거운 피를 주체 못하고 별 짓을 다하다가 5 년만에 조선일보로 옮겨왔습니다. 넓은 세상으로 나오니 좋더군요. 복도를 합판으로 막아서 방 모양이 찌그러진 사다리꼴이었던 조선일보 뉴미디어연구소 시절. 그래도 꿈이 있고 펄펄 넘치는 힘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비록 굴러온 돌로 사오년 헤매다 나갔지만, 조선일보의 정보화 캠페인은 내가 누렸던 가장 큰 기회였으며 보람이었습니다. <사람과 컴퓨터>라는 섹션페이퍼를 처음으로 만들었지요. 얼마나 신이 나던지.
한국일보에서 11개월을 보낸 후 하룻 강아지 세상 무서운 줄 알았습니다. 남의 탓만 하며 살다가내 잘못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아끼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습니다. 그동안 재미 붙였던 골목대장 노릇을 청산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 어름의 어느 새벽, 동네 예배당 앞뜰에서 먼동 트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난생 처음 하느님에게 한번만 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다시는 귀찮게 안할테니 제발 이번만 어떻게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날 디지틀조선일보 인보길사장님으로부터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나올 땐 예닐곱명이었는데 돌아갈 땐 홀홀단신이었습니다. 조선일보 IT섹션을 맡게 됐습니다. 십년차도 안되는 병아리한테 스무명도 넘는 스탭들이 붙었습니다. 조선일보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입니다. 97년 IMF로 중단될 때까지 매주 이틀씩 꼬박꼬박 밤샘하는강행군이 계속됐습니다. 후배들과 디자이너들의 피와 땀을 짜내 저한테는 일생 일대의 역작을 만들 수 있었지요. 더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IMF가 왔습니다. 신문일은 여한이 없습니다. 다시 한다해도 그보다 더 잘할 자신은 없으니까요.
디지틀조선일보로 돌아갈 때부터 사업을 생각했습니다. 내 꼬라지로 미뤄보건데 정년퇴직은 어림없고, 또다시 하느님을 찾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생각끝에 친구와 디자인회사를 해보자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디자인계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여 일년동안 한번도 빼먹지 않고 토요일 밤을 같이 새웠습니다. 대단한 열정이었습니다. 배꼽 빠질 얘기지만 정작 회사가 만들어졌을 때 동참한 사람은 그 치열한 밤샘동지들중에 친구와 나 두사람뿐이었지요.
디자인중심이라는 이름을 짓고, 사업이란 걸 배우게 됐습니다. 돈벌자는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꿈 공장이란 표현이 차라리 정확합니다. 이 회사 만드는데 꼬박 일년 걸렸는데, 한번 시작하니까 석달에 한개씩 새 회사가 만들어지더군요. 어느새 고만고만한 벤처가 열손가락을 채웠습니다. IMF때는 건재하던 그 회사들이 벤처붐이 불고 나니까 시름시름 한두해만에 다 망하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각 회사마다 두세명, 많게는 열명씩 대표이사님들을 배출했으니까요.
저 역시 한국소프트중심이란 벤처기업을 맡게 됐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만든 회심의 걸작이요, 벤처입국의 전형이었지요. 물론 그 회사를 입안한 공무원들은 베드로처럼 하룻밤 사이 세번이나 이 회사를 배신했지만 말입니다.
이제사 고백합니다. 이 회사 하면서 정말 안해 본 짓이 없습니다. 인생 경험 쌓는덴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으나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졌습니다. 정말 안풀리더군요. 핑계댈 것도 없이 제 무능과 부덕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돈버는 사업은 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면 된다고 우기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겁니다.
또 한가지, 기업이 하는 일에 정부가 나서는 것은 절대로 삼가해야 합니다. 둘은 언제나 동상이몽일 뿐입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생각을 합니다. 서울사람들은 알만큼 아는데 지역으로 가니까 여전히 정부가 물색없이 나서더군요. 자동차로 두세시간 거리인데 그 중대한 시행착오의 경험은 걸음마로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만 물러서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날부터 파자마 세개가 닯을 때까지 두문불출했습니다. 실패를 받아들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분노와 모멸감때문에 폐인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노이로제로 정신병원 문앞까지 갔다왔습니다. 저를 내쫓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난 후에야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도저히 서울에 못있겠더군요.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머리식힌다고 둘러댈 만큼 잘한 일도 없으니, 도망이라고 하는게 딱맞습니다. 워낙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고 잠자리를 가립니다. 서울 말고는 단 한달을 머물렀던 곳이 없더군요. 고맙게 전주에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연고가 없으니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세상 편했습니다. 사람들 사귀는게 겁이 나서 모임에도 전혀 나가질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살았던 정반대로 가자고 결심했습니다. 무조건 천천히 가자, 어쨌든 조용히 살자. 좌우명이 <오바하지 말자> 였습니다.첫해는 무사히 온탕이었는데, 이듬해는 냉탕으로 바뀌더군요. 어리석은 제가 한가지 잊었던 게 있었습니다. 제깐에는 조심하느라 했는데 그나마도 급하고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열탕되기 전에 황급히 올라왔습니다. 도망갔다 도망온 셈입니다.
무슨무슨 시대라는 정치적 수사가 도시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 적이 제 기억엔 없습니다. 지방분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하는 분들은 마치 다 아는 것 처럼 얘기합니다. 하지만 제 조막만한 경험으로도 그것은 어림없는 착각입니다. 지역문제를 비롯해 국민들이 힘겨워하는 여러가지 현안들은 웬만한 경륜과 개혁으로는 움쩍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불행은 과거 잘못된 습관들의 보복이라 했던가요. 때맞춰 개혁하지 못하고, 날잡아 혁명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살아온 과거는 오늘에 이르러 불행과 한숨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마치 어젯밤 편한 잠에 들지 못하고 내내 뒤척여야 했던 어떤 중년 남자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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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책 내주신다고 뭘 더 써보라는데 딱이 쓸게 없습디다. 이 풍진 세상 살아온, 이젠 유혹마저 강 저편으로 흘려보낸 한 남자의 이력을 써보았습니다. 원고자 열장에 맞춰 쓰려 했는데 좀 길어졌나요. 써놓은 걸 보니 빌어먹을 중생이 아직도 세상에 미련이 많은가 봅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하나도 안썼습니다. 내년 이맘때 한번 더 써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