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때문에 마음을 다치고 돈 때문에 가슴이 답답할 때 불현듯 '내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면?'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본다. 고작 한두달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이따위 허접스런 것들로 채울 수는 없다고 고개를 내젓게 된다.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지만, 언제 죽을 지는 모른다. 그래서 세상이 이 지경인지도 모른다. 제 생명이 언제 끝날 지 안다면 사람들은 죽음을 고통이나 공포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은 할 게다. 그리고 삶을 대하는 자세도 한층 진지하고 겸허해지겠지. 마치 재테크하듯, 남은 인생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알차고 보람있게 보낼 것인지 궁리를 거듭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언제 죽을 지 몰라서(마치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 처럼) 이나마 행복을 추구하며 아웅다웅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매년 적어도 한두번씩, 그것도 아주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죽음과 맞대면해야 사는 맛이 난다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이른바 산사나이다. "긴세월을 평범하게 살며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저 높은 곳에서는 한 달 사이에 체험한다."(예지 쿠쿠츠카) 그래서 그는 산에서 스러질 것을 스스로 예감하고 있는 듯하다.

히말라야는 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선 등정할 수없는 곳이다. 오로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다. 평소 자신만만했던 능력이나 의지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엄홍길은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이라는 책에서 16년동안의 등정에서 단 한번도 자신의 계획대로 된 적이 없다고 실토한다. 안나푸르나, 낭가파르바트, 칸칭충가 등에서 그가 겪은 것은 도무지 인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무슨 산을 정복했다는 일상적인 표현은 말도 안된다. 마치 히말라야는 살아있는 신처럼 신도들을 시험하다가 신탁을 내려주듯 슬쩍 정상의 엑스터시를 맛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완등의 신화'라고 달려있다.  

예전에는 세상에 할 일 없는 인간들이 죽자고 산에 오르는 이른바 알피니스트들이라고 생각했다. 고상돈이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올랐다 해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가 어느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혀를 차며 그 산에 뭐가 있길래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거냐고 한마디하고 곧 잊어버렸다. 그런 내가 이 책과 함께 박영석씨의 책까지 두권 다 사서 읽어볼 생각을 했다. 마치 어떤 힘이 나를 이들에게 인도하는 것 같다. 엄홍길씨의 책을 먼저 펴든 까닭은 별거 없다.  박씨의 책이 너무 익숙한('상업적인'의 친숙한 표현이라 해두자)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엄씨의 것부터 봐야겠다 싶었던 것 뿐.

'산을 왜 오르느냐?' 물었더니 힐러리경 왈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지 않나. 수없이 들었던 얘기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이 없었다. 아마 이런 얘기 아닐까. '인생을 뭐하러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잠시 당황해하다가 '당신이 뭔데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대뜸 눈을 부라릴게 틀림없다. 그것은 마치 급소로 치고 들어오는 것처럼 치명적인 질문이다.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매일 죽을 동 살동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것 처럼 보여도 임종 무렵에 돌아보면 그저 그렇게 살았다 싶을 게다. 잘 살았다 생각되면 다행이고, 어쩌다 이렇게 됐누 싶으면 긴 한숨으로 대신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적어도 일년에 한두번씩 생사를 넘나드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도 순전히 자기 의지에 의해 그런 기회를 갖는다면 우리가 보내는 인생의 한 순간들은 앞서 쿠쿠츠카의 말대로 대단히 농축적이 될 게 틀림없다. 내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해서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인생에 대해 누가 물어도 한결 온화한 표정으로, 그러나 지금보다는 훨씬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나는 엄홍길씨가 히말라야에서 경험했던 그 극한의 스릴과 서스펜스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가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지나면서, 깎아지른 빙벽에 매달려 비부아크(노숙)를 할 때, 눈사태에 휩쓸려 사라진 동료들을 찾아 헤매는 동안,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썩어가고 발목이 부서진 상태로 72시간을 기어내려와야 할 때 그 순간과 그 시간에 간단없이 떠올렸던 인생에 대한 생각들을 쫓을 뿐이다. 

이제 나는 누가 '산을 오르는게 무슨 의미있는 일이냐'고 묻는다면 대신 반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신이 회사를 다니고, 운동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랑을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죽어라고 공을 차서 월드컵 4강에 오르고, 7전8기의 정치적 역경 끝에 대통령이 된 것이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보다 얼마나 더 의미있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알피니스트는 산에 오를 때 자신의 생명을 걸고 정면승부를 한다. 그들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오로지 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기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결코 무리수를 범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몇번의 치명적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에야 신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과 최선을 다하되 억지와 무리는 피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좌우명으로 삼아 끊임없이 환기하고 주의하고 경계치 않으면 곧바로 과거의 행태를 돌아가버리니 수양의 정도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가 안나푸르나에 세번째 도전해서 실패한 후 이런 얘기를 남겼다. "인간은 ㅁ낳은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산앞에서 인간의 욕심은 무용지물이다. 산은 절대로, 자연은 절대로 욕심을 가진 인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산을 내려와서 산을 보면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산에 오르면 그곳엔 산이 없다."

엄홍길씨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악인이다. 어떤 일이든 이만한 위치에 오려면 적지 않은 마음공부가 필요했을게다. 더구나 그에겐 산이라는 거대한 스승이 있었다. 산은 그에겐 직장이요, 학교요, 집이었다. 이 책에서 엄홍길은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수사조차 담지 않았다. 고작해야 외국 산악인들에 비해 체력이나 정신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오기(?)를 피력하는 정도. 그가 산을 타면서 닦았던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평생 도량에서 용맹정진해온 고승의 그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선사 법사들의 선문답보다 더 진한 도의 향기를 느낀 것도 그 때문이다. 

히말라야에서 죽음의 신과 코를 맞댔던 사람은 산 아래의 편안하고 일상적인 생활에 적응이 애당초 불가능하다. 마치 평생을 아침 7시에 도시락을 싸들고 집을 나섰던 샐러리맨이 은퇴후 생활에 적응 못하는 것처럼 그는 돌아오자 마자 다시 떠날 준비를 시작한다.

너무 오래 쉬었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렸던가. 나는 무엇때문에 쉴 작정을 했던가. 엄홍길은 십수년의 등정끝에 14좌 완등을 이루었는데도 쉬지 않고 다시 떠나는데 말이다. 그에겐 어쩌면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별다른 의미를 못갖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산밑의 사람들이 지어낸 찬가에 불과할 뿐. 진정한 삶이란 세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부질없는 평가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그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것은 오직 그 삶의 주인인 나다. 자신이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누가 대신 지켜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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