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컨데 나는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좀 읽는 사람이다 싶으면 유명 작가들의 소설책 쯤은 빼놓지 않고 보는 것이 상례일 터인데 나는 소설책 읽기를 시간죽이는 일로 치부해왔다. 소설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선입견때문인가. 물론 <허구에 불과하다>는 그 표현이 얼마나 불학무식하고 유치한 단견인지 잘 안다. 하물며 몇권의 위대한 리얼리즘 소설이 내게 주었던 감동과 혜안을 잊지 않고 있는데 소설을 이리 하대(下對)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짜맞추기 삼류 철학과 유행따라 부유하는 경영학은 피식 웃으며 용서한다. 원래 그런 것들이겠거니 하면서 기분 내키면 주머니를 뒤져 잔돈푼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에 대해서는 손톱만큼의 어설픈 작위성을 감지하는 순간, 표독스럽게 책을 덮어버리고 작가의 이름 석자를 살생부에 적어놓는다. 그도 모자라 만나는 사람마나 그를 직업의식조차 없는 싸구려 매춘부로 경멸에 찬 언사를 늘어놓곤 한다. 천재적 작가의 두뇌 전두엽과 피질에서 창조하는 전형적 인물들과 전형적 상황들이 빛나는 조합으로 빚어내는 스토리.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처럼 작가의 어떠한 고의적 개입과 왜곡도 느껴지지 않는 예술적 완성도. 마치 신춘문예에 소설만 십수를 거듭하다 끝내 한을 품고 죽은 작가 지망생처럼 나는 소설에 대해서만은 이토록 까다롭고 편협한 기준을 갖고 있다.
그런 나를 황석영은 손가락질하며 배꼽을 잡고 웃는다. 도대체 소설이 무슨 불경이나 코란인줄 아느냐, 늙은 박수무당 신장대 잡고 넋두리하드끼 소설에 뭘 바라는 것이냐, 네 살아가는 꼬라지처럼 소설도 거기서 거기인 줄 여태 모르느냐고, 별 어쭙잖은 놈 다보았다며 깔깔 웃는다. 그리고 나서 특유의 거침없는 입담으로 이 소리 한번 들어보랴 하며 읊어댄 것이 바로 <심청>이다.
19세기 중반 동북아가 서양의 철선에 의해 폭력적으로 유린당하기 시작할 즈음 황해도땅 복사골의 열다섯살 먹은 계집아이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지는 시늉만 하더니 어찌어찌 국제 매매춘조직의 상품으로 중국에 팔려가는 신세가 됐다. 처음엔 부잣집 노인의 자리보기에서 유곽 지배인으로, 다시 대만으로 끌려가 가장 밑바닥 창녀생활을 하다가 동인도회사 부사장인 영국놈의 현지처로 싱가폴에 가기도 하고, 류큐(오키나와)로 가서 요릿집 사장을 하던 중에 영주의 후처로 들어갔으나 그가 횡사한 후 나가사키에서 다시 유곽을 하다 거기서 키운 양녀를 따라 인천에 와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50여년에 걸친 한 여인의 거칠고 험한 인생역정이 소설책 두권에 담겨있다.
중국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인도와 중국, 동남아를 무대로 한 서양세력의 발호, 일본의 개국과 오키나와의 참혹한 근대사, 한국의 합방 등 스펙타클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청이-렌화-로터스-렌카는 가녀린 몸으로, 그러나 불굴의 집념과 도전으로 겪어낸다. 대만 포구의 참담한 유곽에서 끈적거리는 땀과 더러운 살냄새에 부대끼면서도 그녀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거꾸로 처박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감상과 회한은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정인과 남편이 떠나거나 죽어도 그녀는 툭툭 털고 일어난다. 세월이 지나면 그들의 인상조차 흐릿해진다는 것을 마치 알고나 있는 듯 그녀는 내일의 아침을 맞기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이것이 황석영의 위대함이다. 그의 소설을 하루종일 이방 저방으로 들고 다닐 수 밖에 없게 하는 마력이다. 구라를 풀되 쓸데없이 주접을 떨지 않는 것이 이야기꾼 황석영이다.
그렇게 거침없이 밀고 나가던 황석영은 마지막으로 독자들을 확 녹여버린다. 심청의 최후 멘트를 보라.
'심청은 눈을 감고는 한번 빙긋이 웃었다. 오물조물한 입이 조금 움직였을 뿐, 실컷 울고 난 사람의 웃음처럼 그건 아주 희미했다.'
평생을 잡초처럼 살아온 한 여인이 한 많은 세상을 떠나면서 어찌 한 줌의 잡초처럼 그냥 스러지겠는가. 그건 자신이 창조한 심청이라는 새로운 전형에 대한 황석영의 애정어린 이별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두권의 책 어디에도 이런 감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그런 구석이 한군데만 있었어도 마지막의 이 장면의 감동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피날레를 위해 황석영이 남겨둔 심청의 아주 희미한 웃음은 아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
지난 몇년동안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의 손익계산서를 조용하게 따져보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니 정확하게 대학교 2학년 3월까지 나는 산다는 것의 의미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염원하던 법대에 못들어갔으니 빨리 서둘러 고시패스를 해야겠다, 그렇잖아도 재수하느라 동기들보다 일년을 까먹지 않았느냐말이다. 뭐 이런 어린애같은(요새는 어린애들도 이런 생각은 안하는가 보더라) 생각만 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젠가는 세상을 알 수 밖에 없다. 세상을 안다는게 철이 든다는 얘기라면, 철들자 망녕이라는 말처럼 늙어서라도 반드시 철은 들게 돼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다가 마침내 지방 공무원 비슷한 것 까지 겪고나니 긴 한숨이 배어나온다. 나이 마흔 서넛에 먼길을 걸어 온 것 같다. 돌아보면 한나절의 백일몽같은데 흰머리와 얼굴의 잔주름만큼 생각도 많이 변한 것 같다. 웬만한 천복이 아니면 아흔을 살기가 힘들터이니 나도 이제 반평생을 넘긴게 분명하다. 임종의 마지막 모습은 어떨 것인가. 어떻게 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가. 아니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울까.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가. 세상사람에게 부탁할 것인가, 가족들에게, 아니면 내가 혼자서?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던데 나는 만족할 수 있을까. 무슨 여한이 남아있을까. 무엇을 남기는게 옳은가, 아니면 아무 말없이 훌쩍 떠나는게 맞나? 이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헛된 것은 아닐까. 무엇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서 심청에 대한 계산된 복선이 아니라면 그녀가 버려진 아이들을 한사코 데려다 돌보는 일이야말로 그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몸파는 일에 길들여진 그녀가 아귀처럼 돈을 긁어모아 마마상이 되고 예라이샹이 되어 정계를 주무르는 큰 손 노릇을 하다가 말년에 예의 그 희미한 웃음을 짓고 스러졌다면 그것은 황석영 아니라 도스토엡스키가 썼어도 통속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온갖 악행과 모순을 뒤집어쓰고도 저주 한마디 없이 그런 연꽃 한송이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이 삶의 아름다움 아닐까. 풍진세상에 뿌리를 내려 살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구도와 해탈의 길이라면 그렇게 살아가는게 옳지 않은가.
스티븐 킹은 작가지망생들에게 충고한다. 독자를 생각하지도 말고, 영합하지도 말라. 그들은 매우 눈치빠른 자들이기 때문에 신사숙녀 여러분들은 네 속셈을 한눈에 간파한다. 그저 네가 잘아는 것을, 네가 쓰고 싶은 것을 계속 쓰면 된다. 세상에 나를 팔지 않을테다. 세상을 위한다고 떠들 것도 없고, 세상을 이용하거나 속이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돈과 명예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말고 내가 잘 할만한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정해 묵묵히 수행해야겠다. 다만 스스로 감상에 빠지는 일을 경계할 것이며, 부질없는 외로움과 믿음을 끊어내야 할 것이며,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아름다움을 위해 정진할 일이며, 세상을 따뜻하게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심청>을 읽고나니 머리가 한결 가볍다. 약사가 지어준 변비약을 먹고 설사가 멈췄다더니, 허구인줄 뻔히 알면서 생각이 꼬리를 무는 걸 보면 인생도 그저 몇권의 소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누군들 서너시간 늘어놓을 푸념과 사연이 없을까. 따지고 보면 나아닌 남이 살아온 얘기는 죄 소설같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