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만에 만난 젊잖은 후배 홍수가 나를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평생 딱 한번 습작으로 썼던 단편소설, 그것도 대학노트 남은 것들을 묶어 이삼십 페이지쯤 썼던 그 소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홍수는 그걸 자기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대견했던 모양이다.

 "그때 형님이 말이요, 뭐라 했냐면, 자기가 소설을 하나 썼는데 박완서씨 것과 영판 똑같다면서, 그 양반이 언제 내 껄 보고 빼꼈는지 신기하다고 그랬던 거라. 어찌나 우습고 같잖던지. 내 생각엔 형님이 아마 그 양반 소설책을 잠결에 비몽사몽 보다가 고마 다음날 일어나서 퍼뜩 떠올라 쓴 소설 아닌가 싶던데, 지금도 박완서선생이 형님 소설을 베꼈다 생각하요?"  

술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와아 대단하네 라고 한마디씩 허튼 소리들을 하는 바람에 나는 실로 오랜만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제목도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풍지대> 그때 생각엔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곳, 생존의 기본조건인 공기의 흐름조차 멈춰버린 어느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고 그렇게 붙였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삼류 액션만화의 제목을 턱 붙여놓았으니 그걸 본 몇몇 친구들이 얼마나 웃었을까. 오죽하면 이십년이 지났는데도 그걸 기억하니 말이다. 

박완서씨는 한국전쟁 끝무렵 서울이 수복된 후 미 8군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당시의 정황을 담은 소설을 몇 권 썼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 그 양반만 거기 있었던게 아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고학생이던 아버지는 하우스보이라는 숙소당번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가끔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려주던 당시 고단한 삶들의 이야기는 정말 소설책 서너권도 모자랄만큼 요지경속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사회과학 서적 몇권 읽고 이땅의 모순이 어쩌구저쩌구하는 와중에 갑자기 그 이야기들을 소설로 써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됐고, 기어코 저지르는 바람에 급기야 뒤늦은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절대 아님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전엔 누가 시나 소설을 쓰겠다 하면 그런거야 선비가 여벌로 하는 일아니냐며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전업으로 삼으려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고 시건방을 떨었다. 그러나 습작을 한번 해본 후에 나는 전업작가들을 무조건 존경하게 됐다. 나는 지금도 글 잘쓰는 사람을 가장 좋아한다. 신문사 초창기엔 정운영선생의 칼럼들을 드문드문 외우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고, 그 전엔 리영희선생의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글과 최일남선생의 만연체 글을 두루 좋아했다. 조선일보 시절엔 양상훈선배가 쓰는 글이라면 골프기사까지 탐독했고, 동년배인 정진홍위원에게 아낌없는 우의를 보내는 것도 그가 쓰는 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오헨리에 대해 쏟는 찬사와 경의도 상기와 같은 나의 젊은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내역에 기인하는 것임을 알아주시길.    

한 은행원이 공금횡령으로 죄를 받아 징역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엉뚱하게 약제사 일을 맡았던 그는 소설이란 걸 쓸 생각을 했다. 변호사출신인 존 그리샴이야 법정야화를 밑천삼아 소설을 쓴다지만 은행원이 무슨 소설이람. 정말 할 일이 없었던가 아니면 나와서 뭘로 먹고살지 호구지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일 아닌가 싶다. 그 답답한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뉴욕의 한 골방에서 전직 은행원이자 전과자인 오헨리가 써낸 단편소설은 무려 3백편. 일주일에 한편씩 써도 1904년엔 한해에 무려 70여편의 다작을 낳기도 했다. 

꽁트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그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긴 여운을 남긴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마지막 잎새>같은 유명한 작품말고도 가슴을 찡하게 울리거나 깔깔 웃음이 튀어나오는 물건들이 한 두개가 아니다.

명색이 영문학을 전공했고, 학창시절에는 밝히기 어려운 이유로 한때 미국문학의 유망주로 운위됐던 터라 오헨리 작품을 제대로 한번 훑어보고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레출판사가 출판한 오헨리 단편선 -김욱동 옮김-을 발견해 손에 쥐게 되었다.

사실 오늘날에도 단편을 잘쓰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그만인 일상잡사가 고작이며, 뭔가 가슴에 남기길 애시당초 포기하고 쓴 것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억지춘향이  아니라는 점을 고마와 해야할 형편이다. 최인호같은 양반이 쓴 단편(꽁트가 맞을지도 모르겠다)을 읽다보면 하품과 짜증으로 책 중간을 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그런데 백년전의 단편들이 선 잠을 확깨게 만들 줄이야. 원고지 백장 정도의 짧은 글에 담긴 서정적 묘사와 유머러스한 서술에 빠져 흐느적거리다 어느새 절묘한 막판 뒤집기를 당해 뒷통수를 긁으며 허허 웃게 된다.  그 웃음은 사랑과 자비에서 나온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서 무지개처럼 뻗어 나오는 사랑의 시나리오는 온갖 사랑의 범람에 아연실색한 현대인들에게 뭉클한 원초적 감동과 소낙비처럼 시원함을 준다.  

뉴욕이란 도시를 구성하는 귀족과 부랑자,  사업가와 샐러리맨, 빈민가의 사람, 연극하고 그림그리는 사람들... 오헨리의 소설에는 이 모든 뉴요커들이 종횡으로 엮여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그 다양한 직종의 군상들은 폐결핵으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알코올중독자였던 아버지와 살아야했던 어린시절, 그 후 고향을 떠나 목동, 우편배달부, 점원, 직공 등 바닥인생들의 삶을 두루 거쳐야했던 젊은 시절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전형들이다. 그의 단편들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한번도 가보지 못한 부룩클린과 웨스트사이드의 뒷골목을 걷는 느낌이 든다. 거기서 옷깃을 스치거나 눈길이 마주치면 웬지 그들을 담은 한편의 소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뉴욕이 더럽고 위험하고 복잡하고 허탈하다지만 그래도 그 도시 어느 후미진 골목에는 여전히 꿈과 사랑이 피어오를 것 같다는 생각도 오헨리 같은 작가들이 기여한 바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서른개의 소설는 모두 빼어난 수작이었지만 그중에 내가 특별히 재미있다고 칭찬해마지 않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  사랑의 묘약, 20년뒤, 녹색문, 하그레이브스의 멋진 연기, 도시의 패배, 채광창이 있는 방, 사랑의 희생, 카페안의 세계주의자.

처음엔 그냥 넘어가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 페이지를 접어놓은 게 몇 장 있다. 마저 옮겨본다.

(그런데 그 요리는 흑인 신사인형 머리위에 야구공 다섯 개를 던지는 게임만큼이나 빨리 나왔다.- 128쪽)

미스 리슨은 몸집이 아주 작았는데, 눈과 머리카락만은 그녀가 자라기를 멈춘 다음에도 계속 자라서 마치 "어머나! 왜 우리와 함께 더 자라지 않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324쪽)

5월에는 자연이 우리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우리는 신이 아니며 자연이라는 거대한 가족 중에서 저 혼자 잘난 척하는 식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준다. 자연은 우리가 클램차우더 수프에 들어갈 조개나 당나귀와 형제라든지, 팬지나 침팬지의 직계 자손이라든지, 그리고 구구거리며 우는 비둘기와 꽥꽥거리는 오리, 식모아이들과 공원을 순찰하는 순경들과 친사촌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338쪽)

도대체 고향이 어디인가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주소로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일이 옳습니까? 켄터키 사람이면서 위스키를 싫어하고 버지니아 출신인데도 포카혼타스의 후예가 아니고, 인디애나 사람이면서 소설을 쓰지않고, 멕시코 사람이면서 솔기따라 은화를 꿰어 단 벨벳바지를 입지 않고, 영국사람이면서 경망스럽고, 양키이면서 돈을 흥청망청 쓰고, 남부 사람이면서 냉혈한이고, 서부사람이면서 마음이 편협하고, 뉴욕에 살면서 너무 바쁜 나머지 길거리에서 한시간쯤 걸음을 멈추고 한팔이 불편한 식품점 점원이 덩굴월귤을 종이봉지에 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는 사람을 난 얼마든지 보았으니까요. (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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