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최고의 교육을 정의한다면? 최고의 교사와 충분히 검증된 교과서/커리큘럼, 최적의 환경 등 모든 면에서 최고여야 한다. 우주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부모들이라면 저마다 한번 씩 꿈꿔보았을 것이다. 개중엔 아예 팔 걷어부치고 찾아나선 사람들도 적지않다. 돈이면 해결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불과 백년전만 해도 국가의 모든 지력과 정성을 총동원해 실시한 최고의 교육이 있었다. 조선의 왕세자교육이다.
조선 왕실에서 왕세자를 훌륭하게 키우는 일은 곧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권력의 정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존인데다 종신직이므로 어떤 인물이 왕이 되느냐에 국가의 미래가 좌우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은 바로 왕세자교육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일본이나 영국 등 지금도 왕실이 존재하는 나라에선 어떤 교육을 시키는지 궁금하다. 영국은 왕손들이 하도 속을 썩여 여왕폐하께서 골치를 앓고 있는 모양이다만. 무엄한 추측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왕께서 너무 연부역강하시어 왕좌에 오래 앉아 계시는 바람에 후손들이 제풀에 지쳐 될대로 되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해 안쓰럽다. 아마 조기교육과 엘리뜨 교육, 리더십 교육에선 예전같진 않아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프로그램이 있을 것 같다. 언제 한번 찾아봐야겠다.
<조선시대 왕세자교육의 특징>
첫째, 환경을 중시하는 교육. 태교부터 유모, 내관, 스승, 동료 들을 고를 때 먼저 후덕하고 건실한 성품을 가진 자인지 확인했다. 즉 왕자주변에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만 배치되엇다.
둘째, 덕성교육, 왕세자는 오륜교육 등 기본예절교육부터 받았다. 왕세자 책봉이우헤도 여전히 덕성교육은 강조됐다. 국정최고 책임자로서 다른 사람의 견해를 경청하고, 신하를 공경하며, 백성의 고통을 살필 줄 아는 성품을 키우기 위해서다.
셋째, 예제를 중시하는 교육. 항상 의례가 동반됐다. 상견례, 개강례, 관례, 책봉례, 가례, 입학례 등 무수한 의식을 잘 익혀 원만히 처신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의 주된 영역이었다.
네째, 지식을 중시하는 교육. 전통교육은 덕성교육을 통해 심신을 단련한 후에 지식교육에 집중하는 학습방식. 경전교육과 역사교육이 핵심.
다섯째, 체육과 예술교육. 어린시절에는 체조, 성장후에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다. 세자는 시짓는 법을 배워야 했고 서예, 그림, 음악에도 일정한 소양을 갖추어야 했다.
<공부의 시작>
원자보양청이 설치되고 제일 먼저 하는 행사는 원자와 사부의 상견례였다. 원자가 동쪽에, 사부가 서쪽에 자리하는 것은 원자의 지위가 더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원자가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것은 제자로서 사부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다. 상견례 후 자리를 옮겨 사부가 원자에게 <소학>의 한구절을 가르쳤다. 사부가 읽고 원자가 따라 읽는다. 사부가 뜻을 풀이한 후에 유선이 보충하는 것으로 상견례가 끝났다.
상견례가 끝나면 정식수업이 시작됐다. 첫 수업하는 날 원자가 사부를 맞고 전송하면서 올리는 개강례가 거행됐다. 개강례 이후 원자에게 강의할 과목은 왕과 보양관, 신료들이 토론하여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원자는 한문을 낱자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대개는 <천자문>과 <유합>으로 한 글자씩 배우되 항상 배운 글자를 복습하고 난 다음에 새로운 글자를 더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글자를 가르치는 것이 최우선은 아니었고 생활예절을 중시했다. 삼강오륜에 관한 내용을 이야기로 들려주고, 그림을 보여주었다. 늘 붓과 종이를 곁에 두고 글자를 익히게 하였는데, 이를 통해 조심성과 표현력, 집중력을 기르게 하였다. 원자가 여섯살이 되면 보양관이 증원되어 자우빈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더러 성균관 대제학, 직제학이 특강을 맡기도 했다. 대개 수업시간은 45분이었다.
<세자의 영양간식>
공부하기 전에 원자에게 조청 두 숟갈을 먹였다. 흡수가 빠른 당분을 섭취시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를 맑게 하려는 것이었다. 원자가 크면서 공부의 양이 많아지고 진도가 빨라지면 무정과(무를 썰어 삶아서 조청에 절인 것)를 간식으로 내었고 각종 콩시루떡, 콩 송편, 콩가루 다식 등 콩으로 된 음식을 많이 먹게 하였다. 연근도 단골메뉴였으며 개성인삼과 인삼정과, 인삼차 등도 원자의 학습능력을 향상시키는 영양식이었다. 공부가 끝난 후에는 옻칠을 한 목욕통에 따뜻한 소금물을 받아놓고 목욕을 시켜 피로를 풀어주었다.
원자가 글을 읽을 때는 서상봉으로 글씨를 짚어가며 큰소리로 읽고 ,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음률에 맞추도록 했다. 책을 읽을 때 몸을 움직여 박차를 맞추고 소리내어 읽어서 머릿속에 깊이 새기도록 했던 것이다.
원자가 책을 한권 떼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스승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배강이라는 발표회를 가졌다. 그자리에서 원자가 책을 다 외고 묻는 말에 답변을 잘하면 왕은 노고를 치하하며 스승들에게 다과상을 차려주었다.
<교재와 강의>
왕세자의 교재는 모두 유교의 기본정신을 담은 책이었다. 왕도정치는 군주가 인과 덕을 바탕으로 베푸는 선정이었으므로 교육목표는 성군을 자질을 함양하는 것이었고 유아기의 교육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교육내용은 지식의 전달보다 효와 예절, 즉 인성교육에 주력했다. 국가 최고교육기관은 성균관이었고 왕세자도 학생이었지만, 왕은 경연, 왕세자는 서연 또는 세자시강원이라는 교육기관이 별도로 있었다.
원자의 학습내용과 성취도는 보양관이 <보양청일기><강학청일기>에 날마다 기록했다. 천자문, 유합, 훈몽자회, 소학, 동몽선습(한국사), 효경, 격몽요결(독서론)등이 원자의 8세이전 교재였다.
세자 책봉후 설립되는 세자시강원의 사부는 영의정과 좌우의정이 담당했지만 실제 교육은 문과출신의 30~~40대 참상관(정3품에서 종6품)으로 당상관 승진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었다. 시강원에 소속된 관리의 수는 20명, 하급관리는 39명이나 되었다. 왕세자 한사람을 교육시키기 위해 무려 6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투입됐던 것이다.
<학습으로 채워진 왕세자의 하루>
세자의 하루는 아침저녁 문안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다. 일상생활에서 세자에게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효였다. 왕세자는 수라상을 살피는 시선과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을 해야했다. 문안을 다녀오면 아침식사를 하고 바로 조강에 들어간다. 수업을 시작할 때 세자는 스승을 예로써 맞이하였는데 이를 서연진강의라고 한다.
수업이 시작되면 세자가 전날 배운 것을 발표하여 점검을 받았고, 별 문제없으면 그 다음 진도를 나갔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왕세자가 일어나 섬돌 아래에 서서 스승을 배웅했다. 강의진행방식은 시강관이일과에 다라 본문에 나오는 글자의 음과 뜻을 차례로 풀어주고 그 문장의 의미를 해설하였다. 그 다음 세자가 잘 모르는 사항을 질문하고 시강관이 답을 했다. 질의응답이 끝나면 시강관이 그날 배운 문장을 낭독하고 세자가 따라서 낭독하였다.
낮에는 주강, 저녁에는 석강이 있었다. 이외에도 낮시간에 수시로 시강관을 불러 공부하는 소대와 밤중에 침실로 불러 공부하는 야대가 있었다. 소대와 ㅇ야대에선 중국과 조선의 역사를 가르쳤다. 세자가 공부할 대는 책을 덮고 외우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경서의 본문은 전부 암기하는 것이 원칙이고, 해석은 책을 보면서 번역해나가는 방식이었다.
<학습평가>
왕세자가 제대로 공부하는지는 매 강의때마다 항상 확인됐다. 이외에 미리 정해진 날에 공식적으로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는 것을 고강이라고 한다. 책을 덮고 전날 배운 것을 외우게 하는 것은 수업을 시작할 때 하는 수시평가였고 5일마다 한번씩 성적을 평가해 장부에 기록하는 것이 공식적인 고강이었다. 한달에 두번있는 회강에는 사부이하 서연관들이 모두 모인자리에서 평가를 받기 때문에 무척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고강을 할 때는 <생>이란 경서의 글귀를 기록한 대나무쪽을 통안에 가득 넣어두고 수험생이 그중 하나를 뽑은 다음에 거기 적힌 글귀를 읽고 스승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그 대답을 두고 통, 약, 조, 불의 네단계로 점수를 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