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티베트 우화 - 지혜로운 삶의 이야기를 찾아서
진현종 옮겨 엮음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인 두 낱말에 대해 두가지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 티베트하면 신비, 禪, 달라이라마, 독립이란 낱말을 떠올리고 우화하면 스테레오 타입의 동물등장인물(토끼하면 착하고, 순한, 여우의 꾀, 곰의 우직함 등등)이 등장하는 아이들용 이야기. 나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고, 다만 우화가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는 것이 글을 읽는데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1부, 2부로 나뉘어 있는 얘기 모두 예상밖으로 정말 평범하면서도 신랄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물론 동물의 입을 빌어 얘기하는 거지만. 꾀 많은 산토끼가 자기꾀에 넘어가기도 하고, 늘 나쁘게만 나오는 동물이 착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결말이 저래도 되나 싶게 술수와 요행으로만 지냈던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도 있다.

주인공은 늘 착하다라는 생각이 들어맞지 않는 얘기들도 많다. 이야기속의 주인공은 늘 착한 것은 아니고, 또 반대의 인물도 늘 나쁜 것은 아니고, 그저 주위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솝우화나 다른 우화들과 조금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평범함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지혜를 얻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어딘가에 쓰일 곳이 있는 탄탄한 돌멩이 같은 인식을 얻어낼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티벳에 대한 선입견이 어느정도 사라진 거라고 할 수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여전히 티벳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보다는 모르고 있는 것이 더 많고, 직접 사람들을 만나보지 않은 상태에서 알 수 있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네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땅에 발을 밟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은 분명 갖게한다. 오리엔탈에 대한 환상만을 갖고 있을 서구인의 채록이라고는 하지만, 채록한 사람이 티벳에 갖고 있는 애정 또한 느낄 수 있다. 다만 처음 채록집에는 있다는 삽화가 없는 것이 아쉽다.

티벳에 대해서 갖고 있는 서구인들의 인식수준을 알 수 있는 한가지 예.
오체투지라고 하는, 티벳 고유의 수행의식이 있다. 일반인들이 자신들의 마을에서부터 성지까지 온몸을 땅에 닿게 하면서 그들의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오체투지라는 단어가 서구에는 없는지 모르겠지만, 한 쇼킹한(?) 얘기를 주로 하는 프로그램에서 그것을 다루면서 나오는 해설이, '기묘한 행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처음에 봤을 때는 이해가 안된다 하더라도 종교행동인 오체투지란 설명을 들으면 이해되는 것인데, 그것이 그들의 눈에는 오락프로그램에서 소개할 만한 정도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건 아닐까 싶었다.

아주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이야기일 거라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생각보다는 훨씬 더 평범하고 가까운 이야기라서이다. 그것이 오히려 이 책의 미덕일 수 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베르베르를 처음 만난 건 <개미>란 소설을 통해서다. 제법 두꺼운 세 권을 차례차례 샀던가, 나에게는 꽤나 문화적 충격과 소설읽는 재미를 주었던 책. 쉽게 외울 수 없는 이름인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 책 이후 한국에서는 아주 인기있는 작가가 되었다. 이후의 타나토노트, 아버지들의 아버지,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제목 맞나?), 그리고 지금 나무까지.

거의 모든 번역책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대열에 끼면서 베르베르를 유명 작가로 만들어 준 건 한국 독자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온다. 프랑스 현지에서도 그저 대중소설작가로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베르베르 사랑은..정말 대단하다.

베르베르 덕분에 이세욱이란 번역가의 이름도 알게 됐고, 한참동안은 내 발걸음에 혹시 개미나 다른 곤충이 다치진 않을까 꽤나 신경을 썼던 적도 있었다. 물론 얼마 안가 방에서 눈에 띄는 녀석들을 휴지로 슥 닦아 내거나 창틀에 까맣게 몰려드는 날개달린 개미를 향해 독한 약을 뿜어대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버지들의 아버지를 쓰고 나서 베르베르는 돼지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했지만, 고기를 즐겨하진 않아도 딱히 못먹게 되진 않았지..)

나무는 베르베르의 전작들에 비교해서 더 나아가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그 정도 선의 소설이었다(내가 베르베르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건가?).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특유의 빠른 읽기가 가능하고, 이야기 소재들도 다양해서 책 한 권 읽기가 무척 재미난 시간이긴 했다. 여전히 기발한 상상력과 자주 보이는 인간종족에 대한 냉소(?), 인간만이 능력이 뛰어난 생물체가 아니라는,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보이는 잔인함을 내 보이는 데 뛰어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 책 꼭 읽어봐 하고 추천하기엔 뭔가 부족한 듯하다. 내가 산 책 빌려주긴 할 수 있겠지만.

프랑스여행과 또 최근의 유럽여행을 경품으로 내 걸고 홍보전략을 편 덕분에 많이 팔린 건 아닌지... 나 자신도 책을 살까말까 고민하던 중 잘되면 프랑스여행이다 싶어서 책을 산 경험으로 보자면 말이다. 첫번째 이벤트에 이어서 또다른 여행경품을 내걸고 또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저렇게 해서 아직도 책을 더 살 사람이 생겨날까? 이제 베르베르의 책을 사서 읽어볼 만한 사람들은 다 산건 아닐까? 책을 샀던 사람들 중 해외문화체험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건지.

또하나. 베르베르의 소설 자체의 작품성을 어느 정도로 봐야 하는 건지, 그 대중성과 기발한 상상력 뿐이다 라고 폄하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소설이라고 평가를 해야 하는 건지.. 참 궁금하다. 기발한 상상력이 매번 우리나라에선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걸(물론 경품이 달려있긴 했지만) 어떻게 봐야 할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렇게 쉽게 읽히는 소설-그리고 아주 조금 인간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을 왜 다른 작가들에게선 볼 수 없는 걸까?

책을 한 권씩 낼 때마다 바람이 일 정도로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이 그저 출판사의 홍보전략이 먹혀서 만일까... 그의 책만이 주는 매력이 있다면 그건 또 얼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대형서점에 산처럼 쌓여있는 그의 책을 보면서, 몇주째 베스트1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책을 보면서 마냥 '와 좋은 책이야 ' 할 수 만은 없는데... 내가 느끼는 것이 대중소설에 대한 지나친 낮춰보기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의 토론을 책으로 만난 것은, 또다른 시각으로 근대사를 포함한 우리역사를 돌아보게 한 박노자 교수의 다른 글을 만난 것 만큼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보수'라고 지칭했을 때 자연스럽게 '우익'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 것이 스스로 극우와 보수를 구분짓지 않는(!) 보수진영의 안이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보수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입시교육의 맹점이었던 겉핥기식 근대사교육을 다양한 방향으로 바라보게 해 주는 것도 이 책이 주는 큰 열매가 아닐까싶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들을 배치하고, 풍부한 사진과 간략한 사건설명, 그리고 기타 관련 사실들이 잘 설명되어서, 긴 내용이었음에도 책을 읽는 순간이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두 교수의 입장을 단순히 진보 대 보수의 시각으로 구분지은 것은 스스로 그렇게 규정한 것 뿐만 아니라 이해를 쉽게 하고,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진보냐 보수냐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이 분이 이문제에 대해서는 좀 다른 시각을 갖고 있구나 느낄 수 있는 사안들이 많았던 것 같다. 박노자 교수가 완전한 타인(이렇게 불러도 될 진 모르겠지만)의 입장으로 근대사를 바라봄으로 해서 그 당시의 한국상황에서 취할 수밖에 없던 것들에 대한 한계를 간과한 경우, 그것을 보충해 주는 것은 허 교수의 '한국적 상황'에 대한 지적으로 보충되기도 했다. 물론 모든 경우를 '특수한 상황'으로 몰고 가서는 안되겠지만, 보편적인 가운데서도 그 시기에 우리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었던 상황들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폄하되거나 과대평가 되지 않고, 지금을 돌아보고, 지금의 우리가 어떤 입장을 정하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지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교수님들이 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부분인 한국사회에서의 보수층들에 대한 목소리가 반가웠다. 보수를 '기존질서'에 대한 보존과 역사속에서 목소리가 차단되었던 개인들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 지속적이고 연관된 발전중시와 같은 맥락으로 파악했을 때, 현재 한국사회의 보수라고 불리우는 집단들이 '기득권 수호'에만 매달려 있다는 비판은 정확하면서도 서글픈 현실의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이 보수라는 이름을 앞세워서 '지켜내자'고 하는 것이 개인 하나하나가 가지는 의미였던 적이 있었나?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기존질서'와 '개인의 가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기에 편한 '질서'였고, 근대화를 지나면서 권력의 그늘에서 단물을 받아 먹으며, 지금껏 역사에서 단 한번도 빼앗기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보지 못한 채 쌓아온 부와 권력을 가진 '개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가?

한국사회가 좀더 본질적으로 근대화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수구세력과 공동체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극우'들의 목소리와 명확하게 구분되는, 합리적인 보수의 목소리가 커져야만 사람들이 '보수'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인식과 부정적인 인식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 허동현 교수님의 좀더 다양하고 적극적인 목소리들을 많이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