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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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을 읽다가 작가의 다른 글을 보고, 분명히 읽은 기억이나는 [1984]를 기억해 내려했지만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그 모델이 되었다는 [우리들]을  알게되었으니 그 둘을 연달아 읽어야겠다 생각하고 읽었다.  그리고, 천천히 읽고 있는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의 여러가지 장면들이 이 소설들과 묘하게 겹쳐 들어온다.  책을 덮자마자 TV에서 정치꾼들이 이 작품을 인용하며 상대에 대해 공격하는 말을 들었다. 어렸을 때도 읽었었는데, 왜 이제서야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 걸까?  

윈스턴 스미스의 화창하지만 쌀쌀한 4월의 어느날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이 벽에 설치되어 있고, 그 장치는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감시의 도구로 사용된다.  윈스턴의 집은 책장을 놓기 그렇게 설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텔레스크린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그 장소에서 펜대와 잉크병, 그리고 붉고 표지에는 대리석 무늬가 박힌 두툼한 4절 공택을 꺼냈다. 사건의 시작이다. 1984년 4월 4일.  확실히 1984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오는 무력감과 누구를 위해 쓰고 있는지 모를 의문에 잠깐 휘청인다. 노트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빅 브라더'에 대한 배신행위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생각하고 그 생각을 옮겨 놓는 것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1984]의 세상은 끔찍하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 동아시아에 대해 번갈라 가며 연합과 전쟁을 반복한다. '승리도 패배도 없는, 전면전도 종전도 없는' 전쟁은 계속 되고, 조직적으로 전쟁에 관한 역사나 과거도 현재와 다르다면 끊임없이 변경된다. '과거를 재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조직적으로 과거를 조작하고 윈스턴은 그 일을 수행한다.  당이 이야기하는 것이 곧 진실이다.  어제 당이 한 이야기가 오늘 달라진다면 '이중사고'로 오늘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나 곳곳에 설치 되어 있는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 수시로 감시 당하고, 사상경찰은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가족 간에도 스파이단으로 조직된 아이들이 부모를 감시한다. 잠 마져도 단속해야한다. 잠꼬대마져도 고발의 대상이 된다. 

윈스턴 스미스의 생활은 자신의 인생에 끼어든 두 명의 사람들로 한 순간의 행복을 맞이한다.  행복을 느끼고 그 행복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즈음 닥친 위기는 삶을 뒤엎어 버린다.  생각마저도 내 것이 아닌 세상에서의 삶을 윈스턴 스미스의 모습을 보고 절감한다. 잔혹한 고문과 세뇌에도 끝까지 버티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대신 고문 받기를 원한다고 외친다. 결국에는 고문과 설득에 정신까지 변질되어 당의 두목인 -정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 '빅 브라더'를 사랑하며 죽는 날만을 기다린다.

권력만이 목적이 된 집단.  문득 더 이상 훌륭한 자동차를 만들 필요 없다는 이유로 더이상의 발전이 없었던 동독의 트라반트가 생각이 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읽거나 보아온 많은 이야기들이 토막토막 머리에서 떠다니지만 잘 잡히지를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나처럼 늦은 독서를 하는 사람이라면, 더 늦기 전에 읽어보기를 권한다. 6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의 이야기들은 끝나지 않을 듯 싶다.


미래에게 혹은 과거에게, 사상이 자유롭고 인간의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고 서로 고립되어 살지 않는 시대에게-그리고 진실이 죽지 않고, 이루어진 것은 짖밟혀 없어질 수 없는 시대에게. 획일성의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 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 - 축복이 있기를!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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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심리학 - 심리학의 잣대로 분석한 도시인의 욕망과 갈등
하지현 지음 / 해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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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곳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도시 사람은 전세계가 다 똑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여행 다니면서도 도시 사람들의 독특한 무관심과 무심한 표정이 어쩜 그리 같은지 흥미롭게 보곤 했었다. 그러다가 이웃 블로그에서 이 책의 리뷰를 봤을 때 심하게 동했다. 

그런데, 읽어보니 김이 빠진다. 책을 읽기 전에 기대가 너무 컸었던 모양이다. 도시 심리학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진 많고 많은 이야기를 기했는데, 그냥 에세이 같은 느낌이 물씬 든다. 좀 더 구체적인 경우의 이야기를 원하고 좀더 깊이 들어가길 원했나보다.  사회현상이라고 불리는 몇가지 이야기들에 살을 붙인 내용들이 별로 색다르지가 않다. 어쩌면, 지금까지 읽어온 심리학 책에서 본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의 문체는 나와 잘 맞지를 않아 밋밋한 느낌을 주었다.
부제인  '심리학의 잣대로 분석한 도시인의 욕망과 갈등'은 어디갔을까?  기대의 독서는 실망을 안겨주기 쉽다는 것을 다시한번 각인하면서 책을 덮었다.  책은 큼지막한 글씨가 듬성듬성 있어서 아주 잘 읽힌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존재의 불안감은 커지고 주변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가까운 사람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늘어나는 패러독스의 세상이다. p.46

이유가 많다는 것은 잘 모른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일 뿐이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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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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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을 읽다가 책 뒤에 편집된 저자의 글에서 [1984]의 모델이 되었다는 [우리들]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1984]를 다시 읽기 전에 선행독서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우리들]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읽는 동안 지금까지 보았던 SF영화 화면들이 마구마구 지나간다. 1920년대 쓰여진 글에서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요즘 살짝 들고 있는 단순한 세상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몹쓸 생각이었는지 아주 꽉 꼬집어주는 듯 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수용소군도]라는 솔제니친의 책을 먼저 읽고 있었다. 촘촘한 글씨에 끝도 없는 연행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질려 버릴 듯 해서 이 책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그 짧은 독서가 이 소설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볼셰비키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던 저자는 혁명 초기에 갖었던 기대와 열정이 곧 혐오와 불안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된다. 그래서 삶이 완벽하게 정형화된 세상에 대한 소설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폐쇄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와 자율성이 상실되어버린 획일화가 아름다움인 세상.  최근에 복잡한 일이 많아 '사람들이 좀 단순하게 생각하고 심플하게 살면 안될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상황이 극대화되면 이런 세상이 되겠구나 싶어서 소름이 돋았다.  

29세기, 살아남은 자들의 도시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단지 번호로만 불리는 그들 . 전세계가 단일제국이라는 설정 아래 <은혜로우신 분>의 통치를 받으며,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똑같은 옷에, 똑같은 석유 식량을 먹고 그 음식마저도 몇번 씹으라는 법칙이 있는 곳이다.  투명한 집에 살고 성행위에 대한 것도 국가의 통제를 받아 같은 시간에 한다. '인쩨그랄'의 기사로 있는 D-503은, 이 단일제국의 아름다움을 기록한다. 그 기록은 특별한 경험으로 샛길로 빠져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지만, 결국에는 통제 속으로 다시 들어가버리게 된다. 책을 덮으며, 유토피아의 이야기도 좋지만 왠지 디스토피아가 왠지 내 취향에는 더 맞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책은... 그렇게 술술 잘 읽히지는 않는다. 빠르게 화면 전환하듯 진행되는 소설은 혼란의 감정을 받아 들인 후에야 잘 읽힌다. 영화 본다고 생각하고 읽으면 좀 더 잘 읽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오는 풍경과 상황들은 내 상상력으로 구현하기는 좀 힘들었다. 영화의 부분부분을 따와서 상상해낸 세계를 훌륭한 화가가 구현해 내고, 그 구현된 세계가 책으로 나온다면 구입하고 싶다. 남의 상상력을 훔치고 싶은 욕구가 드는 책이다.  미스터노의 가벼운 책이 참 좋은데, 이제는 안나온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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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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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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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나 학교 다닐 때는 책받침이나 연습장 표지에서 꽤 많이 볼 수 있는 유명한 분이셨다. 그 당시는 이 책의 표기와 다르게 '푸시킨'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표작도 아니었다는 그의 시가 한국에서는 어찌 그리도 자주 낭송되었는지 모르겠다. 삶이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속여서 그랬을까? 그런데도 슬프거나 노여워하기 싫어서?  재밌는 것은 첫부분을 제외하고 그 시를 암송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봤다.  뿌쉬낀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은 집에 있던 전집 중에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제목의 책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의 저자도 모르면서 그 발음이 좋아 기억하고 있었다.  [청춘의 독서]로 읽게 된 책이건만 괜히 옛기억이 새록새록 한다.

뿌가쵸프의 반란을 소재로 쓰여졌다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피비릿내 나는 전쟁이 어쩌면 이렇게 평온하고 느긋하게 표현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는 애절하고 뜨겁기 보다 평온하고 여유롭다.  상황은 그렇지 않은데, 문체가 그래서 그런지 밍밍한 하이틴 로멘스를 읽는 듯한 착각도 든다. 전체가 다 평온한 느낌이다. 등장인물과 내용이 그다지 깊고 넓지 않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으나, 이 소설이 나온 배경을 알고 나니 그렇게 가볍게 읽을 일은 아니었다.  남편의 왕위를 빼앗은 아내의 정책들은 겉보기에만 훌륭했고, 그 덕에 농노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왕위를 빼앗긴 남편은 얼마 후 살해당한다. 더이상 참을 수 없는 농민들이 일어선 것이 뿌가쵸프의 반란이다.  그런데, 뿌쉬낀의 소설에서 남편의 왕위를 빼앗은 여제를 훌륭하고 공정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럴듯하게 주인공을 구해내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려니 생각했건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단다. 여제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묘하게 그 반대에 선 뿌가쵸프도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정작 나쁘게 보이는 사람은 주인공의 아버지 그리뇨프 중령과 요새에서 만난 쉬바브린, 그리고 뒤가 좀 찜찜한 주린 뿐이다.  더군다나 반란군의 수장이고 참칭자인 뿌가쵸프를 이렇게 그려도 되나 싶게 호인에다가 자신의 미래를 두고 고민하는 남자로 표현했다. 죽는 그 순간에 주인공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였다는 이야기를 남기면서 뿔하나를 붙여도 모자랄 반란주동자에게 친근감을 부여한다. 그러면서 이 소설이 주인공인 그리뇨프의 수기인 척 한다. 재밌는 장치라는 생각이 들지만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생각도 같이 했다. 하지만, 책 말미에 뿌쉬낀이 이 소설을 쓸 당시 러시아에는 변변한 단편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장치 또한 꽤 큰 효과를 나타내지 않았을까?  소설이 얼마나 대단한 소설인지 알 듯도 하다.  싱거운 맛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바닥에 깔린 사실을 딛고 생각해 보니 이리도 다르다.

책은 얇고 내용도 잘 읽힌다. 그다지 빨리 읽지도 못하는 내가 출퇴근 시간과 침대 위에서의 잠깐의 독서로 이틀만에 다 읽었으니 말이다. 책 상태는 아주 얇고 가벼워 읽기가 편하다. 역시 Mr.Know 시리즈 답다.  그리고, 러시아어에 대한 한글표기법이 정리되지 않아서 그런지 이름에 대해서 검색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책마다 저자의 이름이 다르다. 그리고, 참칭자라는 말을 처음 봤다. 스스로 왕이라 칭하는 자를 말하는 단어라는데, 아직도 알아야 할 단어가 어찌나 많은지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불쑥불쑥 나온다. 고골에 대한 흥미로운 호기심이 생겼다. [죄와 벌]에서도 인용되었던 고골이 이 소설을 평한 부분을 보니 고골의 작품도 도전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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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 존스가 문제다
크레이그 실비 지음, 문세원 옮김 / 양철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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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호주의 탄광마을에 사는 찰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하고 똑똑하다는 이유만으로 '왕따'의 생활을 하고 있는 찰리의 주변에는 제프리라는 베트남계 소년이 절친으로 있고, 원주민과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날 때부터 문제아로 취급된 재스퍼가 있다.  '베트남- 공산당'과 '원주민- 몹쓸 짐승'의 사이에 있는 찰리의 인생은 아주 짧은 시간, 극적인 사건으로 순식간에 바뀌어버린다.

문제는 재스퍼가 찰리를 찾아 오면서 발생한다.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반항 하나로 우상이 되어버린 재스퍼가 왕따인 찰리에게 찾아와 도움을 청한 일은 찰리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찰리는 너무도 쉽게 가보지 않았던 세계로 서슴없이 발을 디딘다.  그 속에는 로라 위셔드의 시신이 놓여있었다.  엉망으로 맞은데다가 나무에 목이 매여 죽은 채로 말이다. 한 사건을 겪고 신경이 예민해진 사람에게는 모든 상황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못해 과장되게 선명해 보일 때가 있다.  찰리의 신경도 마찮가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감당할 수 없는 사건, 재스퍼와의 우정, 일라이저와의 모호한 관계, 안과 밖이 다른 사람들의 여러가지 상황들이 꾸밈없이 연속으로 보여진다. 쌓인 감정들이 체면이나 자존심 또는 표현방법을 찾지 못해 해소되지 못하고 곪고 있었던 까닭에 각자 자신을 자신들의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벼랑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지는 사람마다 다르리라 생각한다.  그 소동이 있은 후, 찰리의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서 다른 이의 세상들은 닫히고 무너지기도 한다.
생각보다 가볍게 시작했던, 그러니까 재스퍼 존스만 문제이면 끝날 줄 알았던 소설은 왠만한 사람은 다 문제인 듯 한 기분이 들게 몰아가다가 다들 나름의 길을 찾으면서 종결을 맞이한다. 그런데, 뭐가 종결인가 싶다. 자신의 "자'로 타인을 재고 함부로 난도질하는 일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그 때의 호주에만 있었던 일도 아니고,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될 일이다. 그리고 그 "자"를 나 또한 갖고 있음을 부정하지도 못하겠고, 그 "자" 때문에 내가 혼란스럽고 어려운 경험을 갖게 되었던 것도 여러번이다. 물론 지금도 겪고 있는 내 주변인들의 일도 자신의 "자"만을 휘두르며 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책을 덮으며, '남 이야기에 신경쓰지말고 니들 인생이나 잘 살지?'라는 톡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책 표지를 보며, 재스퍼 존스가 벽이라도 깨고 나온다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책을 펼치니 글씨가 성기게 있어 약간의 난독증이 올 뻔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당황했다. 요즘 빽빽한 책을 많이 보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앵무새 죽이기]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읽었으나 도무지 기억도 나지 않고 리뷰도 써 놓은 것이 없어 좀 답답한 기분에 읽었다. 다시 읽기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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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길 위에서], [호밀밭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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