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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
비틀즈가 60년에 미국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했을때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라는 말을 해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어떻게 감히 자기들을 예수에 비교할수 있을까? 라는 식의 반감은 살해위협을 가져오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예수'라는 존재(인물이든 아니든)가 세계적으로 갖는 의미는 크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어. 우릴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고!'
그런데 왜 예수는 유명한 걸까? 아니면 왜 훌륭한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할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 정도의 설명은 들어본 일이 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어. 우릴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고!'
물론 그렇다면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훌륭한 일이 맞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이 땅에서만 해도 우리를 위해 대신 돌아가신 분들은 많이 있다. 논개도 그랬고, 전태일도 그랬고, 이순신장군도 아마 그랬던 것 같고, 안중근의사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피흘려 돌아가신 분들은 다 그랬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만으로는 예수가 가장 유명한 것에 대한 설명으로 불충분 한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 무지하고 잘 모르더라도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드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셨지..' 정도는 설명할 수 있는데, 정작 가장 유명한 '그 분'에 대해서는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를 추종하는 세력과 종교가 그를 성역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간혹은 날을 잡아서 성경을 한번 찬찬히 읽어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도올의 요한복음 강햬를 구해다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마찬가지 이유로 이 책 '예수전'을 선택해서 읽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 예수를 만나러 갑시다.
지은이 김규항은 옛 씨네21에 쓴 영화와는 별로 상관없는 칼럼들을 통해서 접했었는데, 요즘처럼 사회가 어수선하고, 꺼꾸로 돌아가고 있을 때 그의 글을 읽으면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만난 진중권이 다소 화려한 기교파라면 김규항은 다소 전술은 순진하지만 한방에 상대를 넘겨버리는 강펀치를 날리는 복서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예수의 전기를 썼다면 혹시 그가 그의 길을 포기하고 종교에 귀의하려는 것일까 라는 의심보다는, 얼마나 속시원한(과격한) 발언을 해줄 것인가 하고 기대를 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읽을 때 이렇게 읽었으면 한다. 과거처럼 예수에 대한 평가를 바탕에 깔고 (가령 그가 신인지, 인간인지 혹은 성경에 나온 기적들이 사실인지, 하나의 상징인지 이런 것에 대한 해석) 이런 고민은 벗어두고 처음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인물이라고 가정하고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앞서 말한 평가는 그 후에 내려도 될듯하다.
이 책은 마가복음(마르코복음)을 기초로 하여 예수의 행적을 따라간다. 그래서 에피소드별로 전파되어 파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던 예수의 행적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예수의 생을 이야기하는 형식의 전기 이다. 따라서 성경에 잘 언급이 되지 않는 예수의 어린시절이나 서른살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 까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전기는 아니다.
예수의 행적과 저자의 해석을 따라가서 만나본 예수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회운동가' 또는 '혁명가' 이다.
좀더 설명하자면 '혁명가'이자 원칙주의자'였는고, 당대의 사람들이 고민하던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고민을 했다. 그의 이러한 원칙주의와 높은 차원이 그에 대한 많은 오해를 낳게 한 것이지만, 동시에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살아있게 한 근원이기도 하다.
그는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으나, 그의 원칙은 그런 능력을 통해 쉽게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과정까지도 완벽한 그런 혁명을 꿈꾸었기 때문에 함께 하던 이들은 왜 그가 이런 가시밭길로 가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또 당시 그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민족의 독립운동가'로 이해했다면 그는 유대민족이 아닌 인류전체를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예수가 자신들이 찾던 그런 '메시아(좁은 의미의)' 가 아니었나 보다 하고 회의를 갖게 되었다.
종교가 아닌 운동의 길찾기
저자는 이러한 예수의 모습에서 사회운동가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자 하는 듯하다. 여기에 관련한 그의 견해를 몇 개 인용해보겠다.
"운동이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운동이 갖는 숙명적인 모순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사회체제와 그 사고방식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운동의 외형적 성장, 즉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조직이 커지는 것을 운동의 성장과 등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런 외형적 성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운동의 껍데기는 커졌지만 정작 운동의 알맹이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비대한 운동 조직이 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운동 조직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모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쫓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 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물론 지나친 이상주의는 현실적 조응력을 잃고 소수 지식인들의 관념놀이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거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꿈꾸길 중단하고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지만 새로운 세상으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 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
그리하여 저자는 현재 예수의 뒤를 잇고 있다는 교회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가를 '필연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저자의 견해로는 현재 예수의 뒤를 잇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운동가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듯하다. (이 점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고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하느님 앞에선 누구든 귀하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힘없는 사람이든 권력자든 차별없이 귀하다. 하느님 앞에서 빈부의 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그런데 빈부 격차란 왜 생기는가? 고루 나눠 갖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부는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다. 부자들의 재산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라 탐욕의 결과일 뿐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재산을 모두 나누어 자발적으로 가난해지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에 들이시지 않는다."
아쉬운 점
책 전체를 살펴보다보면 뒷부분에서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것은 원전 텍스트인 마가복음에 그런 문제가 있었을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배분이 제대로 안되고 이미 앞부분에서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내어서 뒷부분에서 굳이 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야기를 전개하다보니 내 눈에는 억지로 저자의 논지에 예수의 행적을 해석해서 끼워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면...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 빰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그의 말(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더 섬세한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때 사용되곤 했다.
......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 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예수를 사회주의자, 혁명가, 운동가로 보는 시각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견해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나로서는 재미있는 독서 경험이었다. 적어도 많은 목사님들보다는 저자가 내게 예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삶과 죽음에도 예수의 행적과 삶에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우리 일상의 매 순간에 예수의 고뇌와 번민이 녹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