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⑥

 

 

 

 

 


 해가 저물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동안 무음으로 해 놓은 스마트폰에선 연신 화면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주로 경찰 상급자와 동료들, 기자들, 그리고 지인들이었다. 택시 기사는 오늘의 장안 화제 주인공인 정화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이만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마 조연현 경정의 전화까지 무시하긴 어려웠다.
 "오 경위, 지금 어딘가?" 그가 대뜸 물었다. 화를 낼 줄 알았으나 예상 밖으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제 차를 가지러 일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 남아 할 일이 제법 많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돌아오면 안 되겠나? 할 이야기가 많네."
 "죄송하지만 지치네요. 오늘은 푹 쉬고 싶습니다." 정화가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별도의 도청기를 단 그에게 실망해서였다.
 잠깐 시간이 흘렀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은근히 걱정이었다.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따르는 도리 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또 의외였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서울청에서 보세. 오늘 정말 애 썼네. 잘 쉬게."
 그가 전화를 끊자 정화는 폰의 전원을 끄고 택시 소파 깊숙히 상체를 묻었다.

 

 차는 별장 마당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뒷좌석의 수거물 봉투도 그대로 있었다. 차를 몰고 시청 앞 프라자 호텔로 갔다. 머리가 복잡할 때 가끔 쉬어가는 곳이었다. 객실요금은 무척 비싸지만 분기에 하루 정도 정화는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있었다. 지하 스파에서 중국요리를 먹고 스파를 다녀온 다음, 호화롭고 넓은 객실 창가에 앉아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다 보면 몸과 마음의 피로가 풀리곤 했다. 프론트에서 낯익은 매니저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이미 뉴스를 본 듯 그의 표정은 사뭇 예전과 달랐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정화의 표정을 살폈다.
 "그 방으로 주세요."
 "스파 이용은?"
 "오늘은 그냥 쉬겠어요. 식사도 룸서비스를 이용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예전처럼 쓸데없이 이것저것 묻거나 농담을 하지 않았다. 열쇠를 받아 17층으로 올라갔다.
 날은 더웠지만 객실은 시원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다시 스마트폰 전원을 켰다. 문자메시지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정화는 폰을 침대에 내려놓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과 몸에서 화약냄새와 쉰 냄새가 났다. 완전히 알몸이 된 뒤 실내 가운을 걸쳤다. 옷가지를 정리하고서 룸서비스를 불렀다.
 두 시간이 지났다. 목욕을 했고 식사도 마쳤다. 옷도 라운드리 서비스에 맡겼다. 이제 그녀는 늘 그랬듯 창가 테이블에 가 앉았다. 와인 한 병과 카스테라, 스낵 한 접시가 앞에 놓여져 있었다. 와인 한 잔을 따라 한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티브이를 켜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핸드백에서 글록을 꺼냈다. 아직도 화약냄새가 났다. 탄창에서 세 발이 비어 있었다.  마지막 총알이 불발탄인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누가 보아도 세 발이나 쏜 건 방어용이 아니었다. 조사가 뒤따를 게 뻔했다. 무슨 변명을 해야 하나, 정화는 혀를 끌끌 차며 수건으로 총을 깨끗이 닦고 핸드백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근우는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위는 철통같은 통제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의 자살기도로 볼 때 비록 몸이 회복된다고 해도 순순히 진술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그렇게 나온다면 결국 드러난 사건 만으로 기소를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용의선상에 올랐던 사건들만으로 재판에서 법정 최고형을 구형받을 것이 뻔한 이치지만 경찰은 추가 여죄를 캐내지 못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아쉬워 할 게 틀림이 없다. 

 

 임설희. 파주와 미국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는 건 임설희 밖에 없다. 이근우가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임설희와 무척 긴밀한 관계라는 걸 증명해 준다. 대체 무슨 관계일까? 게다가 임설희가 국내에 들어와 있다니. 정화에겐 경천동지할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USB는? 정화는 와인 한 잔을 주욱 들이키고 나서 일어나 핸드백을 찾았다. 백 속 깊은 곳에서 그 USB를 꺼내보았다. 일회용 라이터의  3분지 2크기의 검은색 장치였고 가운데 하늘 색 보턴이 있었다.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보턴을 손가락으로 밀자 컴퓨터 본체에 연결하는 잭이 튀어나왔다. 내용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나 룸엔 컴퓨터가 없었다. 그걸 열어보려면 2층 비즈니스센터로 가야 한다. 하지만 내용이 매우 비밀스러운 것일 경우 공개 장소에 있는 컴퓨터나 평상시 사용하는 것에 연결해선 안 된다. 역시 사람이 수시로 드나드는 피씨방 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밖으로 나가기는 싫었다.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사건의 공기가 충만해 있는 거리로 나설 경우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그게 무서웠던 것이다. 정화는 호텔 로비나 거리가 한적한 새벽 시간을 택해 근처 피씨방에 가기로 했다.


 설희와의 옛 일이 뇌리에 영화필름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타지에서 만난 둘은 피차 젊었고 또한 외로웠다. 설희는 유학생, 정화는 영사관파견 경찰관 신분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가까워졌고 일련의 사건을 통해 신뢰를 쌓은 다음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몇 번 정도였지만 급기야 남들이 백안시하는 사랑도 나누어 보았다. 그러던 중 둘 사이에 치명적인 불화와 오해가 생겼고 설희는 정화를 저주하며 떠났다. 정화는 절대로 그녀 주변을 FBI 에 밀고하지 않았다.

 정화가 귀국하고 나서 2년 쯤 지난 뒤 다시 설희를 수소문해 극적으로 통화를 하게 됐다. 그때 설희는 FBI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따라 새로운 신분으로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설희는 곧 히스패닉계 중권중개인과 결혼을 해 남미로 겅 거라며 다시는 자기나 주변 인물들에게 절대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그녀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그것이 정화가 알고 있는 그녀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정화는 약속을 지켰다. 설희의 지인들이 한국에 여럿 있었지만 그들을 머리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아주 낯선 곳에서 설희가 돌출했다. 이번 일은 설희 스스로 정화에게 찾아온 것이지 정화가 먼저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설희가 한국으로 들어왔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정화가 알고 있는 전문킬러들 가운데 하나. 그 존재만으로 사회에 위험하기 짝이 없다. 분명  청부살인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설희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먼저 출입국기록을 찾아보고 지인들, 특히 설희의 고모와 수감 중인 김창호 주변을 탐문해 보면 된다. 또한 마약과 국제매춘, 조직폭력과 관련된 정보원들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로빈이나 제이시, 플래처 교수 등 미국 쪽 라인과 연락을 취해 알아볼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설희를 찾아야 할 것인가? 그러기엔 왠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옛날 그녀들 식의 아름다운 추억을 이제와서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지독한 감상주의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강력한 기분전환제가 필요했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희롱하던 설희의 혀가 문득 떠올랐다. 그녀 기억으로 가장 뜨거운 혀였다. 속살 깊은 곳에서 느낌이 왔다. 이건 또 뭔가, 정화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거리로 나가 건장한 남자나 여자, 아무나 붙잡고 어디 가서 지독한 섹스나 나눠보자고 하면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미친년이라고 할 것이다. 정화는 실없이 키득거렸다. 혼자 와인 한 병을 다 비우는 동안 서울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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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⑤
  

 

 "확신하나?" 조 경정이 물었다.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요. 모종의 결심을 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건 시간을 끄는 겁니다. 공범들에게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죠."
 장만영과 조연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시그널을 보낼 시간을 줄여야지. 어서 전략을 세워보라구." 박 두호가 조연현에게 말했다.
 정화는 이근우를 처음 불심검문했던 의경과 그를 추적한 경찰관들을 불러달라고 했다. 그러자 박두호가 답답한 듯 불만을 터뜨렸다.
 "이 사람이 왜 시간을 질질 끄나. 참 나."
 그리곤 수행 경찰관들을 데리고 일행에서 떨어져 나갔다.
 "저 새낀 주제도 모르고 설친다니까."
 그가 사라진 뒤 장만영 입에서 욕이 나왔다. 점잖은 그에게서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정화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정화가 부른 경찰관들이 도착하자 그들의 수고를 치하하고 몇 가지를 물었다. 주로 그가 들고 있던 소지품과 도주로에 관한 내용이었다. 정화는 멀찌감치 서 있던 규영과 서창민을 불러 그들과 함께 도주로를 샅샅이 수색해 보라고 지시했다. 수상한 건 무엇이든지 수집하라고 했다. 월권이었지만 정화의 수사팀 합류를 바라왔던 조 경정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임무가 주어지자 서창민이 특히 신이 난 듯 솔선해 그들을 데리고 바삐 사라졌다.
 정화는 마음을 굳혔다며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조연현이 한 여경을 불렀다. 그녀 손엔 경찰복과 방탄조끼가 들려 있었다. 화장실로 가 옷을 갈아 입었지만 답답해서 방탄조끼는 입지 않았다. 옷깃에 도청기를 다는 것도 찝찝했다. 그러나 보안과 정보수집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핸드백에서 글록을 꺼내 등에 찼다. 그런 뒤 화장실을 나와 옷과 핸드백, 휴대폰을 여경에게 맡겼다. 본부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5시 무렵에 이르고 있었다. 서장은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으로 자진해 들어가겠다는 정화를 나머지 상관들이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연현이
준비하고 있던 권총과 실탄을 내밀었다.
 "어차피 뺏길 텐데요, 뭘." 정화는 권총만 받아 들었다.
 "뺏길 걸 뭐하러 들고 가?" 옆에서 양하섭이 물었다.
 "생각이 있어서." 정화가 대답했다. 
 조 경정, 양하섭, 기동대장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짰다. 정화가 이근우와의 거리를 최대한 멀리 할 것, 도청기는 절대 떼지 말 것, 정화의 왼 손이 머리를 만지면 맞은 편 건물 옥상의 저격수들이 이근우를 저격할 것, 저격 실패시 기동대가 즉시 문을 부수고 들어가 정화를 구출해 낼 것, 자살 시도와 같은 비상 상황에 대비해 앰뷸런스를 마련해 둘 것, 등.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프로 살인범 앞에서 도청기도 아마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장만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박 청장 달래느라 혼이 좀 났네. 짜식, 똥줄이 타서 안달을 하더군."
 서장의 말에 조 경정이 킥킥 웃었다. 그들은 경찰대 선두주자인 박두호 치안정감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듯했다. 경찰대 출신을 싫어하는 서장에겐 당연한 것이었고, 그곳 출신이지만 조 경정 역시 파벌과 거리를 두고 있는지라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조연현 경정은 비경찰대 파벌 소속인 서장과도 별로 친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선 전선이 일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파벌의 세계는 이렇듯 복잡하고도 미묘한 것이다.
 "최 과장님은 왜 안 보이죠?" 정화가 장만영에게 물었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야." 그가 대답했다.
 정화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보팀이 마지막으로 도청기를 점검했다. 정화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놈이 대체 그녀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대화 시나리오에 대해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준비를 모두 마쳤다고 하자 몇몇 무장 경찰관들의 그녀를 에워쌌다. 서장과 조 경정, 그리고 여러 간부들이 몸 조심하라며 일일이 악수를 건네왔다. 이제 경찰의 위신은 정화에게 달린 것이다. 정화는 주변의 걱정과 달리 왠지 마음이 평안하기만 했다. 사지로 들어간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양하섭이 선도하는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조계사를 나와 커피숍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집요하게 쫓아오는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가 거리에 작렬했다. 주변의 경찰들과 구경꾼들이 호기심 가득찬 눈초리로 정화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커피숍 문앞에 도착했다. 얼마 지나 안에서 움직임이 일었다. 여자를 앞세운 남자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와 동시에 경찰 서치라이트가 다욱 환히 켜졌다. 놈은 생각보다 아담한 체구였고 몽타주완 달리 얼굴은 평범해 보였다. 도저히 연쇄살인범이라곤 여겨지지 않았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그 생김새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문밖의 정화를 보더니 빙긋 웃으며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몸이 마치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상황이 끝나고 거리로 다시 나가게 된다면 내 삶을 다시 사랑해야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 얼굴에 자조의 미소가 번졌다.

 

 이근우는 아르바이트생을 풀어준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 대신에 총과 도청기를 그녀로부터 빼앗았다. 이제 홀에는 카운터 구석에 앉은 정화와 등산용 칼을 든 이근우 뿐이었다. 이근우는 총알이 없는 권총을 보고 투덜거렸다.
 "제길헐. 한 방에 갈려고 했는데 도와주지 않는군."
 정화는 말 없이 그의 일거수일투족만 눈에 담았다. 이근우는 마치 바리스타처럼 커피를 한 잔 타서 건네주었다. 정화는 고맙다고 했다.
 "감개무량하군." 그가 말했다.
 "뭐가요?" 정화가 물었다.
 "당신하고 이렇게 마주앉게 될 줄이야."
 "나와의 인연이 있던가요?" 장화가 그의 집에 걸려 있던 줄리엣 비노쉬가 나온 영화포스터와 정화 관련 기사파일을 상기하곤 물었다.
 "글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그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 대해선 고등학교 시절부터 잘 알고 있어. 아마도 당신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 그저 한때 내 선망의 대상이었을 뿐인데 당신은 느닷없이 나타나곤 했지. 파주에서, 그리고 올 초 강남서로 오면서."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가 이번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왠지 말문이 막히는군."
 "자수하고 나서 차근차근 이야기 해보도록 해요. 다 들어줄 용의가 있으니까."
 "자수?"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걸 내가 왜 해?"
 "이거 봐요, 이근우 씨. 생명은 소중한 거예요. 사실 상 사형제가 폐지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비록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때가 오면 언제라도 가석방 될 수 있어요. 상부에선 당신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고 약속했어요."
 그러자 이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기엔 내가 죽인 사람이 너무 많아."
 "대체 몇 명을 죽였죠? 파주와 청담동, 이천 말고."
 "후후, 그걸 내 입으로 순순히 얘기할 것 같아?"
 "좋아요. 한 가지만 더 묻죠. 제접 프로 같은데 이천 두 여자 건을 보면 참 허술한 구석이 많아요. 왜 그랬죠?"
 "진실을 말해 줘? 판단미스지. 집중력이 떨어진 거야. 약을 좀 했고 죽은 이들에 대한 내 나름의 자책감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후배놈을 너무 믿었어. 거기에 당신이 일조를 했지. 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당신." 그가 말을 맘추고 정화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올 봄에 강남서 강력팀장으로 발령났다는 기사가 뜰 줄이야. 내 살인 본능과 그에 대한 자책감, 추억 등이 뒤섞여 자제력을 잃은 것 같아. 말 못할 스트레스도 있었고."
 "스트레스라. 혹시 조직으로부터의 중압감인가요?"
 "이제 그만." 그가 손사래를 쳤다.
 "왜요? 어치피 가는 길이라면서 할 말 다 하시지." 정화가 말했다.
 "비아냥거리지마. 깊은 얘길 하기엔 당신 옷에 또다른 도청장치가 너무 많아. 견장과 혁대, 경찰뱃지를 살펴 봐. 장치가 있을 거야."
 정화가 그가 말한 곳을 만져보았다. 뱃지와 혁대에선 찾을 수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 견장 안에 작은 금속 보턴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런 젠장." 정화는 몸을 떨었다. 미리 얘기해 주지 않은 조 경정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거 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지? 세상이란 그런 거야. 인간이란 어차피 혼자란 말이지. 아무도 믿지 말라구. 당신 주위에 양아치들이 득실거리고 있어."
 이런 조건에서 어차피 긴밀한 얘길 나누기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정화는 도청기 일을 일단 미뤄두고 우선 그를 제압할 방도를 생각해 보았다. 밖에서 보기에 그녀와 이근우의 몸이 겹쳐져 있어 저격수가 개입하기엔 각도에 무리가 있었다. 등에 찬 여벌 권총을 꺼내기엔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발을 써서 탁자 아래를 가격해 볼까도 고려해 봤지만 칼을 쥔 놈의 자세엔 헛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방법이든 섣불리 나섰다간 피를 볼 게 뻔했다. 정화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이근우가 얇은 등산용 점퍼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얼핏 보니 USB였다. 그가 엄지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더니 그걸 정화 손에 쥐어주었다.
 정화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로만 뭐냐고 물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가까이 오라고 했다.
 "선물이야." 그가 얼굴을 그녀 가까이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나 참고는 하되 절대 깊이 들어가진 마. 당신 목숨이 위험하니까."
 "위험하다니?" 정화도 속삭였다.
 "임설희가 들어왔어. 개입하면 너를 노릴 거야."
 정화는 충격을 받았다. 결혼해 아르헨티나로 떠난 설희가 이 땅에 와 있다니. 그리고 그가 어떻게 임설희를 안다는 말인가?
 "설희를 알아?"
 "난 많은 걸 알아. 당신이 파주에서 유종하를 죽인 것도, 미국에서 살인행각을 벌인 것도."
 정화는 급기야 놀라 자빠질 뻔했다. 어떻게 이 자가?  
 갑자기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거짓말 하지 마."

 정화가 저도 모르게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 결에 그가 뒤로 몸을 빼다가 의자에서 비틀거렸다. 억제할 수 없는 충동. 정화는 그의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등에서 권총을 빼어들었다. 당황한 이근우가 칼로 자기 목을 그으려는 순간, 그녀의 권총이 그의 심장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는 바람에 총알은 그의 어깨와 목 사이를 관통했다. 

 피를 보자 쾌감이 찾아왔다. 정화는 이성을 잃었다. 한 발을 더 쏘았지만 총알은 그를 비껴나가 벽을 맞고 튕겨나갔다. 또 한발은 불발탄이었다. 

 그 때 커피숍 정면 유리창이 깨지며 무장경찰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바닥에 모로 쓰러진 이근우의 어깨와 뒤통수에서 제접 많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정화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우우우, 또 총을 사용하다니, 정화는 자책했다.

 탁자 옆의 타월을 집어 얼른 그의 상처 부위에 갖다 댔다. 그의 숨은 겨우 붙어 있었다. 양하섭과 정화의 동료들도 뛰어 들어왔다.
 "괜찮나?" 양하섭이 물었다.
 정화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근우가 들것에 실려나가기까지 그녀는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구급차에 오르기 직전, 이근우가 정화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해, 줄비."
 그리고 이근우는 정신을 잃었다. 의사가 산소마스크를 급히 씌웠다. 어디론가 떠나가는 구급차의 뒷모습을 보며 정화는 조계사 본부로 가 먼저번 여경을 불렀다. 소지품을 받아 피가 묻은 정복을 벗고 입고 왔던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핸드백에다 아직 열기가 난아 있는 글록, 그리고 이근우한테서 받은 USB를 소중하게 챙겨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슬며시 사찰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그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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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④

 

 

 정화는 이게 과연 현실인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DMB를 켜보았다. 놀랍게도 지상파와 케이블 TV가 현장 중계를 하고 있었다. 나라의 심장부, 그것도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인질극을 저널리즘이 놓칠 리가 없었다. 화면에 가득한 경광등이 현장의 긴장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종각 일대에 어마어마한 경찰병력이 깔려 있었고 그 외곽을 군중이 구름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도심 인질극.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참 좋은 소재였다.

 화면에 나온 커피숍은 기껏해야 네 평 남짓해 보이는 작은 규모였다. 출입문은 테이블과 의자들로 막혀 있었고 어둑한 카운터 뒤로 두 사람의 신체 일부가 보일 뿐, 안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화면은 용의자인 이근우의 몽타주와 인질로 잡혀 있는 아르바이트 여대생의 사진을 수시로 내보내고 있었다. 서울청장 박두호 치안정감이 직접 현장 진두지휘를 맡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용의자가 정화와의 면담을 요구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조연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와 어디쯤 오고 있냐고 물었다. 정화가 정신이 혼란스러워 운전하기 어렵다고 하자 그는 그제야 아차, 하며 차를 보내줄 테니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다. 일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했더니 그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일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정화는 자세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전화가 여러 통 걸려왔다. 경찰 동료와 상관, 기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몇은 받았고 몇은 무시했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최재서 형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는 받지 않았다. 5분 뒤에야 연락이 왔다.
 "오 경윈가? 긴한 용무가 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었네. 미안하군. 종로 일 때문이지?"
 "네."
 "조연현이와 상의하면 되지 뭘......"
 "그래도 과장님이 직속상관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지금 현장에 계신가요?"
 그러자 그는 아니라고 했다. 정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할과 관련된 사건이기에 간부가 총출동했을 텐데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답답해서 정화가 물었다.
 "용의자가 저더러
만나자고 한다는데 제가 꼭 그래야 하나요?"
 "그렇게 까지야......"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인질의 목숨이 위태롭긴 하지만 수사관의 생명도 그만큼 중요하지. 놈이 원하는 게 뭐라던가?"
 "아직 모르겠습니다. 현장에 도착해 봐야 알겠지요. 조 경정님은 적극적으로 만나볼 것을 지시할 듯 합니다. 서두르는 기색입니다."
 "내 생각에 놈은 자살을 선택할 것 같아." 그가 말했다. "어차피 그럴 건데 만나서 뭐하누. 오 경위가 참 난처하겠군. 어쩔 생각인가?"
 "저야 명령에 따를 생각입니다만, 아직 얼떨떨 하네요. 하필이면 왜 저를 만나자고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옵니다."
 "그래 상황에 따라 처신하게. 몸 조심하고. 지금은 내가 경황이 없어 충분한 조언을 할 수 없겠군."
 "그나저나 현장에 안 오실 건가요?"
 "나중에 얘기해 줌세. 그럼, 행운을 비네." 과장이 전활 끊었다.
 정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경호용 순찰차 두 대가 도착했다. 오토바이 두 대도. 순찰차에서 내린 경찰관은 낯이 익었다. 예전에 충남서에서 같이 일했던 경위였다. 그는 오랜만이라고 하면서 어서 탈 것을 권유했다. 주말의 붐비는 도로였지만 사이렌을 울리며 달리는 그들 일행에게 차들은 순순히 길을 내주었다. 현장까지 가는 동안 DMB 뉴스에서 드디어 정화 이름이 나왔다. 인질범이 정화와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는 내용을 누군가 기자들에게 흘린 것이다. 뉴스 영상 자막에 자신의 사진이 나오자 정화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현아영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소식을 들었다며 걱정을 많이 하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오후 네 시 무렵, 종각 인근에 도착했지만 차와 사람들로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주변은 경찰 버스와 순찰차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형사기동대 차량과 특수기동대 차량도 여럿 보였다. 앰불런스와 소방차도 물론이었다. 정화는 경호차량에서 내려 경찰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람들 숲을 헤치고 현장본부가 있는 조계사까지 내처 걸었다. 얼마 걷자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가 집중해서 터지고 있는 곳이 보였다. 본부였다. 간부들이 모여 있는 한가운데에 박두호 청장이 보였다.

 

  - 박두호 서울지방경찰청장. 경찰대 출신. 차기 경찰청장 후보 2순위, 박근혜 라인.

 정화의 파일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주고받고 있었다. 정화가 도착하자 기자들을 제지하고 그녀에게 다가와 갑자기 악수를 건넸다. 평소엔 가까이도 할 수 없는 데다가 오만하기 짝이 없기로 소문난 인물의 돌출행동에 정화는 흠짓 놀랐지만 내민 손을 마주잡을 수밖에 없었다. 장만영 서장과 조연현도 그녀를 맞았다. 조연현 옆에서 양하섭 경감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갑군." 양하섭이 말했다.

 "그래." 정화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일선 책임자급들이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일부는 무장을 하고 있었다. 이제 카메라 플래쉬는 본격적으로 정화를 중심으로 터지고 있었다. 경비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기자들을 멀리 밀어보낸 뒤 곧 회의를 가졌다. 회의는 조 경정이 주도했고 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인질의 안전 때문에 결국 이근우 요구대로 정화가 나서야 할 판이었다. 이근우가 왜 굳이 정화를 찾는지에 대해선 사전 설명이 있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급히 설치한 상황실 티브이에선 조금 전 정화가 도착했을 당시의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자막엔 '오정화 경위 현장 도착'이라고 써 있었다. 스타가 따로 없었다. 이어 인질범이 면담을 요구한 배경에 대한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정화가 인질범이 저지른 부녀자 납치살인사건의 담당 수사관이었으며 범인과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내용이었다. 또, 이근우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정화에 관한 기사스크랩이 발견되기도 했다며 범인과 정화와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언급을 했다. 범인과 여경의 관계, 보도 분위기는 대중의 구미에 맞도록 선정성으로 치닫고 있었다. 좌중은 정적에 빠졌다. 수사관들 가운데 누군가가 언론에 귀띔해 준 게 분명했다.
 "우리 가운데 빨대가 있구먼." 장만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화는 담담했다. 많은 수사관이 알고 있고 어차피 다중에게 알려질 내용이었으므로.
 "일선 수사관이 인질범의 요구로 사지로 들어간 예가 있는지요?" 정화가 조연현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금 현재로선 모든 게 정화 마음에 달렸다며 자신이 없으면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그 때 박두호가 나섰다.
 "우린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공직자야. 사사로운 감정은 금물이지."
 그는 분명 눈앞의 상황 해결에 집착해 후배 경찰의 안전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상황도, 자신이 경찰이란 사실도. 그러나 마음을 다잡았다. 정화는 박두호의 말을 무시하고 조연현게 다시 물었다.
 "자수하겠다는 이근우의 말에 과연 신빙성이 있을까요?"
 "반반이야." 조연현이 말했다 그러면서 박두호의 표정을 살폈다. "일단 시도는 해 봐야겠지. 권총과 방탄조끼, 그리고 도청기를 준비했네."
 "이근우와 직접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조연현이 양하섭에게 뭐라고 귀띔하자 그가 휴대폰을 작동시켰다. 이근우가 나왔고 그녀가 폰을 받았다.
 "나, 오정화입니다. 저를 보자고 했다면서요?"
 박두호 청장을 비롯한 주변 상관들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범인 목소리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요, 선배. 참 오랜만입니다."
 그의 목소린 차분하고도 담담했다. 체포를 앞둔 연쇄살인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환각상태도 아닌 듯했다. 다행이었다.
 "난 이근우 씨와 같은 후배를 잘 모릅니다. 절 아시나요?"
 "그럼요. 기억 안 나세요? 당시 동네에서 모세당구장이 있는 건물 주인집이라고 하면 다 아는데요......"
 예상과 달리 놈은 깍듯하게 경어를 쓰고 있었다. 모세당구장, 모세당구장. 정화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구장과 전혀 인연이 없어서였다.
 "꼭 저를 만나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군요."
 "제가 감옥 들어가면 오정화 씨를 다시는 영영 볼 수 없겠지요. 그 전에 긴히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입니다."
 "전화로는 안 될까요?"
 "곤란합니다. 그리고 오정화 씨께 매우 유익한 대화가 될 겁니다."
 그 말에 정화가 주위 사람들의 표정울 살폈다. 모두가 무척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통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대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를 만나보면 아십니다. 오정화 씨 안전은 보장합니다."
 정화는 입술에 침을 축였다. 주변 인물들이
 "제가 들어가면 약속대로 인질 내보내고 자수하실 거죠?"
 "그렇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나요?"
 "그래? 이 여자가 중국놈 빤쓰를 입었나." 갑지기 그의 말투가 반말로 바뀌었다. 뉴앙스도 음산했다. "그렇게 믿지 못한다면 지금 모든 걸 끝내기로 하지."
 정화는 개의치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거 봐요. 남자로서 약한 여자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게 창피하지 않나요?"
 그러자 박두호가 범인을 자극하지 말라고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들어오면 풀어주겠다고 했잖아, 핫하." 이근우가 다시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기 싫으면 관둬. 나야 어차피 끝난 인생인데."

 이근우의 돌발적인 기질이 드러나고 있었다.
 "잠깐만." 정화가 말했다. "우리, 만납시다. 10분만 기다려요."
 정화는 전화기를 끄고 양하섭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아마 자살을 선택할 겁니다." 정화가 상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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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③

 

 

 "그렇지." 이근우가 힘없이 대답했다.
 누들이 메모 하나를 건네주었다. 거기엔 '학암포 최대감'이라고 적혀 있었다. 접선 장소와 시간도.
 "현명한 판단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형님께 베푸는 마지막 호의입니다. 다음에 만나면......알지요?"
 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클럽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이근우는 한 시간 정도 그곳에 더 머무른 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중국 가서 읽을 책을 사러 지하도를 내려가 교보서점으로 들어갔다. 두께가 두툼한 추리소설 두 권을 골라 서점 밖으로 나왔을 때 한 여자 가수가 무대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청중이 별로 없는 걸 보니 무명인 듯 했다. 계단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을 때였다. 젊은 경찰관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요즘 시대에 도심에서 무슨 불심검문인가. 처음 겪는 일에 그는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애써 태연하게 주머니에서 위조 신분증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노숙자의 것을 변조한 것이었다. 경찰관이 무전기를 통해 조회를 해보더니 신분증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일어나 지하철 출구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 때 그 경찰관이 물었다.
 "실례지만 주민등록번호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런, 그걸 어떻게 외우나. 그가 대답 없이 몸을 돌리자 경찰관이 어깨를 잡았다. 그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하도를 나오자 그를 쫓는 이들은 4, 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골목으로 뛰어들어가며 위조여권과 달러, 차명계좌 용 현금카드를 여러 쓰레기통에 나누어 처박았다. 그러는 동안 경찰들과의 격차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일부는 길을 가로질러 그의 행로를 가로막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을 피하려 화단을 뛰어 넘고 작은 철책을 넘었다. 그러나 포위망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커피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여종업원 하나 말곤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시간을 벌기로 했다. 팀원들에게 자신이 잡혔다는 걸 알리기 위한 필사의 조치였다. 커피숍에 뛰어들어가자마자 여자에게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 문을 잠갔다.
 도주하는 남자의 난데없는 인질 사태로 경찰은 접근을 자제하기로 했다. 지원경력이 속속 도착했고 책임자가 커피숍으로 전화를 걸었다. 남자 입에서 의외의 말이 쏟아졌다.
 "강남서 오정화 오라고 해. 권총을 들고 오든지, 미사일을 지고 오든지 그건 상관 없어. 자수할 테니까. 다만, 반드시 그 여자 혼자 들여보내야 돼."
 "그러는 당신은 대체 누구요?" 책임자가 물었다.
 "나, 이근우다. 오정화에게 그렇게 말하면 알아."
 
 정화는 오랜만에 일산에 있는 별장을 찾기로 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단독주택이었는데 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정화 몫으로 남겨진 유일한 것이었다. 평소 한 달에 한 번 들러 청소를 하고 휴식도 가졌지만 찾지 않은 지 벌써 3개월이 넘었다. 벌써 휴가 마지막 날이다. 심상치 않게 며칠 걸러 비가 내리더니 그제야 기상청은 장마가 시작됐다고 발표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도로엔 차들이 밀리고 있었다. 긴 차량정체 대열을 따라가면서 지난 이틀 동안의 휴가를 떠올려 보았다. 하루는 오피스텔에서 빈둥거렸고 또 하루는 혼자 쇼핑을 하고 영화도 한 편 봤다. 꿀맛 같은 이틀이었다.

 오늘 오전엔 시사N의 현아영기자를 만났다. 작년에 그녀 주선으로 그 저널지에 칼럼을 썼고 인터뷰도 했다. 그 내용이 문제가 되자 편집장에게 경찰 상부의 압력이 가해졌고 결국 그녀는 정치부에서 쫓겨나 문화부로 발령이 났다. 아영은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부자를 중심으로 한 기사를 쓰자니 배알이 꼴린다는 점 빼고는.

 "특종 좀 줘라, 언니." 아영이 말했다. 그녀는 정치부에의 복귀를 바라고 있었다.

 "기다려 봐." 정화가 대답했다. 정화 역시 정관계 물밑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아영이 필요했다.
 아영에게 고위직 경찰 내부의 비리 의혹에 대해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신이 난 듯 얽히고 설킨 사연들을 수도 없이 털어놓았다. 별로 근거가 없는 것들이었지만 정화에게 도움이 됐다. 어느 순간,  정화가 식상해서 물었다.

 "대체 착한 간부는 어디 있다니? 그런 얘기 좀 해 봐." 

 그러자 아영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언니 앞에서 미안한 소리지만, 짭새든, 판검새든, 군바리든 간에 남자 간부공무원 가운데 그런 짓 안 하는 넘들이 어딨수?" 그리고 덧붙였다. "여자 공무원들도 간부가 되면 거, 만만치 않드만."
 정화는 할 말을 잃었다. 실제 여자 경찰 가운데 고위직에 오른 인사들이 여럿 있었지만 얼마 안 가 줄줄이 경찰을 떠났다. 

 사실 이 망할 놈의 비리 공화국을 만드는 주범은 일반국민이 아니라 바로, 비리 기업가와 공무원인 것이다. 그 중심에 재벌은 물론, 청와대와 검경 등 권력기관이 있다. 그런데 정화 자신도 정작 떳떳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똥물에 몸담은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정화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영과 헤어져서도 언짢은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한편 정화는 강력3팀으로 돌아와 몇 사건을 처리하면서도 조 경정이 주도하는 이근우 연쇄살인 특별수사팀의 정보를 규영을 통해 수시로 전해듣고 있었다. 수사관이 직접 호주로 날아가 청담동 의사의 전처를 만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 조 경정의 특기인 저인망 식 수사도 별 소득이 없다는 이야기 등. 또 이근우의 군복무 동기들과, 각급학교 동창들, 친척들, 이웃들을 광범위하게 탐문했지만 그가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두 아연실색했을 뿐, 단서가 되는 진술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예상보다 치밀한 자임이 틀림없었다. 다만 구기동 북한산 등산로 입구에서 그가 사용하던 벤츠를 발견한 게 유일한 성과였다. 이근우는 정황 상 렌터카와 대포폰을 이용하는 듯했고 뒤에서 누군가가 도피를 돌봐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규영은 조 경정에게서 이 사건보다도 다른 일에 더 골몰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게 무어냐고 물었더니 중국에서 죽었다고 경찰이 지난 4월에 발표한 다단계사업 사기범 조희팔의 행적 조사라고 했다. 조 경정의 책상 위에 있는 두툼한 관련 자료철과 전화통화 내용이 그를 뒷받침한다고 했다. 안 그래도 정화 역시 조희팔이 중국에서 죽었다는 것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조희팔과 내통한 경찰 여럿이 이미 구속되거나 옷을 벗었지만 경찰과 검찰 간부들 가운데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리인사들이 있다는 소문을 정화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조연현이 그 사건을 추적하고 있다니, 정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사는 조 경정의 측근으로 알려진 양하섭 경감이 주도하고 있었다. 정화와 경찰대 동기로, 재작년에 경감으로 진급한 정보통이었다. 정화와는 몇 년 전 수원경찰서에서 같이 근무했다. 당시 껄끄러운 일이 하나 있었다. 사이비종교재단의 이탈신도살해사건을 마무리하던 도중, 그가 속한 정보과가 그 공을 가로채갔던 것이다. 그 핵심인물이 양하섭이라는 소문이 당시 수사과 안에서 파다했다.

 

 별장에 도착한 건 오후 두 시 무렵이었다. 마당에 잡초가 우거진 걸 빼곤 건물에 큰 이상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열쇠가 말을 듣지 않았다. 잠금장치가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문을 밀자 그대로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안은 엉망이었다. 거실엔 술병과 유리조각이 뒹굴고 있었고 먹다 남은 음식들에 파리가 잔뜩 들러붙어 있었다. 티브이는 깨져 있었고 냉장고 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내용물은 다 썩어 있었다. 누군가 문을 따고 들어와 파티를 한 것이다. 동네 불량청소년들의 짓일 수도 있었다. 규영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방으로 갔을 때 화들짝 놀랐다. 침대 시트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매트리스 위엔 과도가 하나 꽂혀 있었다. 침대 머리맡 벽에 붉은 스프레이로 휘갈긴 낙서가 보였다. 정화가 우뚝 그 자리에 섰다.
 - Will Kill You(너를 죽일 거야)!
 기억이 나는 메시지다. 종서가 항소심에서 실형 판결을 받고 법정을 나가며 방청석에 있던 그녀에게 던진 말이었다. 정화는 서재 책장을 옆으로 밀고 바닥 판자 몇 개를 걷어냈다. 권총과 실탄은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글록18. 가볍고 연사력이 뛰어나 정화에게 잘 맞았다. 그것을 챙겨 핸드백에 넣었다. 그리곤 별장 안팎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거실과 안방 말고는 손을 타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종서는 대체 어떤 무리와 여기서 즐긴 걸까. 다시 한번 거실 바닥을 조사해 보았다. 희미했지만 백색가루가 양탄자에 묻어 있었다. 정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주방서랍에서 다른 칼을 꺼내 양탄자 일부를 잘라 조심조심 비닐봉지에 넣었다. 빈 캔 두 개와 침대의 칼, 그리고 쓰다 남은 스프레이캔도. 도저히 별장 안을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화는 잘 아는 이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집안을 치워줄 인부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장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통화를 마친 뒤 소파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을 때 규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전화했느냐고 물었다.
 "노처녀 히스테리를 며칠 안 겪겠다 싶어 좋아했는데 이틀 지나니 궁금해지네요."
 "뭐가 궁금해?" 때가 때인지라 정화는 약간 짜증을 냈다. 그러나 규영은 그녀의 지금 기분을 모르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가 납치해 간 건 아닐까, 아니면 삶의 외로움에 지쳐 극단의 선택을 한 건 아닌가, 말이죠."
 "이 새끼가." 씨팔, 하는 욕까지 붙이려다 말았다.
 규영은 자기도 휴가를 냈다면서 저녁을 같이 먹고 싶다고 했다. 거절했지만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나왔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마침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정화는 결국 그와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화를 끊었다. 갈수록 그의 늘어가는 수다가 지겨웠지만 며칠 안 보니 그녀도 이상하게 그가 그리워졌다. 그리고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상관으로서 진지하게 들어보고 싶었다. 아내와의 문제일 게 뻔하지만 말이다. 엉망인 지금 기분을 돌리려고 규영과의 저녁식사를 상상해 보았다. 연한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와 샐러드, 거기에 곁들인 와인. 귀를 간지럽히는 은은한 음악, 앞에는 제법 잘 생기고 젊은 남자. 그것만으로도 로맨틱했다. 상상의 나래를 더 펴보았다. 진진한 대화 속에서 깊어가는 밤, 눈빛이 마주치는 분위기, 자연스러운 입맞춤, 그리고 아늑하고 시원한 모텔방, 푹신푹신한 침대, 몸 곳곳을 더듬는 젊은 남자의 손길과 체취, 뜨거운 숨결......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정화는 혼자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후배 경찰놈과 섹스하는 걸 상상하다니, 이게 무슨 추태람. 정화는 벌떡 일어나 핸드백과 수거물을 챙겨 별장을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고 초저녁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싶었다. 규영과의 약속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규영의 목소린 다급했다.
 "비상이 걸려 종로로 출동하랍니다. 이근우가 나타났대요!"
 "뭐라구?"
 "아마 팀장님에게도 곧 연락이 갈 텐데요?"
 그의 말대로 통화 중에 수신음이 들렸다. 규영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곤 그 전화를 받았다. 조연현 경정이 직접 건 것이었다.
 "휴가인 건 알지만 비상사태야. 급히 종로로 와줬으면 하는데, 얼마나 걸리겠나?"
 "대체 무슨 일인데요?" 정화가 모른 체하며 물었다.
 "이근우가 종로에 나타났대. 인질극이야. 놈이 자네와 만나고 싶다고 하는군."
 왠지 불길하더라니, 그래서 수사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화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속도 메슥거렸다. 놈은 왜 그녀를 걸고 넘어지려는 걸까? 알겠다고 하곤 그 전화를 끊고 다시 규영과 통화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왠지 아쉽고 서운했다.
 차 시동을 걸고 라디오 뉴스채널을 틀었다. 연쇄살인 용의자가 종로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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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 2012-12-07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후의 글은 없나요?
궁금궁금...ㅡ.ㅡ;;;

이주하 2013-01-03 09:47   좋아요 0 | URL
아이고,졸고에 관심을 주셔서 감사....
 

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②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광란도 신이 준 선물이다. 젊은이들이 미쳐날뛰는 건 세상이 미쳐서 그렇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 미치고 말 것이다. 

 제시카 일행이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 고막이 터질 듯한 밴드 음악소리가 가장 먼저 그들을 맞았다. 이어 눈을 찌르는 강한 사이키 조명이 뒤따랐고 역한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그 가운덴 마리화나 냄새도 섞여 있었다. 무대에선 한창 두 외국인 여성 보컬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주위를 에워싼 수많은 젊은이들이 반나체로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형광봉과 형광팔찌가 그에 맞춰 춤을 추었다. 여가수 하나가 상의를 벗어 객석에 집어던지자 그걸 잡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일행은 일단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바 테이블로 갔다. 제시카가 맥주 몇 병을 시켰고 창호는 짐빔 두 잔을 주문했다. 빨간 미니원피스 차림의 로즈는 곧장 플로어로 나갔고 미키가 짐빔 한 모금을 마시곤 재빨리 그녀 뒤를 따랐다. 클럽을 메운 젊은이들의 옷차림은 각양각색이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핫팬츠나 미니스커트 차림이었고 남자들은 대부분 진을 입었다. 여자들의 윗도리는 브래지어나 꽉 끼는 티셔츠였는데 대부분 가슴골과 배꼽이 다 보이는 차림새였다. 일부는 갖가지 가면을 쓰고 있었다. 클럽 한구석의 문신 코너에선 몇 남녀가 전문가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한 여자는 아예 엉덩이 한 쪽을 다 드러내고 문신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보컬이 물러가고 플로어가 개방됐다. 빠르고 강한 비트의 음악에 맞춰 남녀들은 광란의 도가니를 연출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엉덩이와 가슴을 주무르는 건 물론 어떤 여자는 엉덩이를 남자 사타구니에 문지르거나 남자의 심벌을 슬쩍 만지곤 했다. 말리거나 시비를 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깔깔거리며 흔들어댈 뿐이었다. 술에 취한 한 여자가 플로어에 마련된 좁고 높은 단상에 올라가 몸을 흔들자 '벗어! 벗어!'하는 함성이 높아갔다. 여자가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고 엉덩일 살짝 깠다. 여잘 만지려고 남자들은 아우성을 쳤다. 모두 미친 듯했다.
 "가관이군." 창호가 말했다.
 "어제 오늘 일인가? 너도 즐겨." 제시카가 창호의 손을 이끌고 플로어로 나갔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로즈와 미키가 있는 곳으로 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도중에 제시키와 창호는 춤을 추는 체하면서 몸을 슬쩍 만져대는 남녀들을 겪어야 했다. 로즈와 미키는 어느 틈엔가 각각 다른 남녀와 짝을 이루어 한데 엉겨붙어 있었다. 제시카가 미키를 여자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하자 근육질의 한 외국인 남자가 그녀 팔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주위를 빙빙 돌며 놀자는 듯 허리를 흔들어댔다. 창호가 제지하려고 했으나 그 역시 몸매가 기막힌 여자의 손아귀에 잡혔다. 여자의 교태를 한몸에 받으며 창호도 즐기는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그러기를 한 시간. 그 사이에 디제이와 밴드가 몇 차례 바뀌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클럽 안의 광란은 더해만 갔다.
 제시카는 엉덩이에 묵직함을 느꼈다. 한 남자가 몸을 밀착해 온 것이다. 그녀는 제지하지 않고 엉덩이로 남자의 물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남자는 엄지를 치겨세우곤 낄낄거리며 남녀들 속으로 사라졌다. 이번엔 키가 작은 남자가 다가와 추파를 던졌다. 제시카가 가슴을 그의 얼굴에 대고 문지르자 남자는 황홀해 자지러졌다. 창호 쪽을 보았다. 한 여자를 부둥켜 안은 채 춤을 추고 있었는데 둘은 아주 지남철처럼 붙어 있었다. 그때 미키가 다가왔다. 그의 앞지퍼 부분이 불룩했다. 제시카가 거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자 미키가 덥썩 그녀를 안고 입술을 포갰다. 제시카는 그러면서 로즈를 눈으로 찾았다. 그렇지만 플로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미키와 함께 사람들을 헤치고 바로 돌아왔다. 그 옆 의자에 로즈가 있었다. 의자에 앉은 남자 허리에 양 발을 두른 채였다. 제시카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들을 향해 확 뿌렸다. 그들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자 제시카와 미키는 배꼽을 잡았다. 그러나 바닥에 구른 남녀는 그 자세로 입을 맞추고 상대 몸을 더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창호가 다가와 남자를 일으켰다. 그러자 남자가 주먹을 휘둘렀는데 창호가 피하는 바람에 다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본 주위의 남녀들이 허리를 꺾으며 웃어댔다. 창호의 덩치를 가늠해 본 남자가 자리를 피했다. 미키는 기분을 잡쳤다며 토라진 체 했다. 창호가 그녀를 화장실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제시카와 미키는 자리에 앉아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미키의 손이 제시카의 엉덩이를 더듬었고 그녀는 더욱 그에게 밀착했다. 미키의 손이 겁 없이 제시카의 앞지퍼로 오자 제시카가 손길을 제지했다. 그 때 창호와 로즈가 돌아왔다. 둘의 눈은 잔뜩 풀려 있었다.
 "할래?" 제시카가 미키에게 물었다.
 "오케이." 미키가 앞장을 섰다.
 화장실 안엔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었다. 섹스를 하는 건 금지사항이었지만 남녀 화장실을 막론하고 거의 섹스와 다름이 없는 체위를 취한 커플이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는 동성 커플도 있었다. 그들은 화장실 앞을 그냥 지나쳤다. 홀 끝에 있는 작은 문을 두드리자 문 중간의 구멍이 열리더니 커다란 눈알이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단골임을 확인하자 문이 열렸고 10분 뒤 그들은 그 방을 나왔다.
 한 시간을 더 놀고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새벽 한 시가 되었지만 이태원의 밤거리는 여전히 흥청대고 있었다. 클럽 앞엔 여럿이 늘어서서 짝을 고르고 있었다. 제시카를 발견한 한 외국인이 다가왔다. 클럽 안에서 시종 제시카 주변을 맴돌던 남자였다. 제시키가 그의 팔짱을 꼈다. 그는 자신을 미군 중위라고 소개하며 창호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다.

 "콘돔 잊지 마." 하며 창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키득거리며 호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호도 한 외국인 여자를 선택했다. 여자는 조금 술에 취해 있었는데 창호가 손짓하자 재빨리 다가와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와락 껴안았다. 로즈와 미키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둘은 깔깔거리며 서로 입술을 맞췄다. 그는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하곤 여자와 함께 네온사인 숲으로 사라졌다.
 
 신촌의 한 빌라. 잠에서 깨어난 명희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마시고 시계를 보았다. 아직 오후 4시였다. 출근하려면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았다. 그녀는 눈을 더 붙이려고 침대에 가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간밤의 술로 머리가 띵 했다. 다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소주병을 찾았다.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두 모금을 마신 뒤 욕실로 들어갔다. 소변을 볼 때 밑이 화끈거렸다. 새벽까지 남자에게 시달린 탓이었다. 뚱뚱하고 머리숱이 적은 40대 남자는 두 시간 내내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고 있었다. 2차를 가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늙어가는 나이에 찬밥 더운밥 가릴 게 어디 있느냐며 보도방 총무가 떠미는 바람에 일이 그렇게 됐다. 총무는 그녀의 밥줄을 쥐고 있었다. 그녀 나이 올해 서른 아홉. 조선족과 동남아계 젊은 여자들이 도우미 업계에 치고 들어온 지 꽤 오래 된 데다 취업이 어려워진 20대 국내 미스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던 터라 나이가 많은 그녀의 입지는 갈수록 위축되고 있었다. 한때는 한 달에 20일 이상 일을 했고 수입도 한 달 평균 300만 원이 넘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달에 보름 정도 나가면 많이 나가는 셈이었고 다른 여자들에게 타임을 빼앗기기가 다반사라 수입도 옛날의 반으로 줄었다. 그걸 만회하려면 2차를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어떨 때는 일을 나가기 위해 총무나 사장 친구들에게 무료 서비스를 해주어야만 했다. 때론 단속 경찰들에게도. 노래방에서 몸 여기저기를 지분거리는 남자들의 손길, 역겨운 입 냄새엔 만성이 되었지만 2차를 나가 몸을 팔 때는 그 수치심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범죄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늘 그녀를 떨게 했다. 그래서 술을 마셨고 어느덧 그게 일상이 되었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출근준비를 하고 있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화면엔 '발신자 표시 없음'이라고 나와 있었다. 명희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남자였다. 그는 홍대 소극장 옆 모텔에서 그녀를 두 번 만난 적이 있다며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다. 명희는 그렇다고 했다. 30대 중반 남자로, 그녀를 시종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었기에 명희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책정한 화대 말고도 10만 원을 더 얹어주며 차비에 쓰라고 했다. 명희는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밖에 없는 지금 당장의 사정이 미웠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그를 만나고 싶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일 나가야하기 때문에 어려워요. 내일 낮에 점심 사주실래요?" 명희가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그는 새벽 네 시 반에 시간에 예전의 그 모텔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새벽 다섯 시, 명희가 택시로 모텔 앞에 도착하자 골목에서 한 남자가 나와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늦었네요?"
 남자는 예전보다 머리가 제법 길어 있었고 콧수염도 길렀다. 그러나 명화는 느낌으로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미안해요. 뒷정리를 하느라." 명희가 말했다.
 남자가 이미 방을 잡아 두었는지 안내데스크 직원은 팔짱을 끼고 들어서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가 가방에서 5만 원짜리로 50만 원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아침 같이 먹을 때까지. 아침은 내가 살게."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남자가 말을 놓았지만 여자는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명희는 샤워를 하고 나와 옷을 벗었다.
 남자가 침대에서 여자의 국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가 부어 있는 것 같은데?"
 "어제 시달려서. 미안. 살살 해 줘."
 남자는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난 시각은 아침 11시였다. 가까운 해장국집으로 가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남자는 3일 동안만 자기와 같이 있어달라고 했다.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고 했다. 명희는 돈보다도 마음이 따스한 남자와 며칠 같이 있는 게 기쁘기만 했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장기간 부재하면 행여 실종신고를 할까봐서였다. 명희는 친척 상이 있어 3일 동안 지방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고 사무실 여직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투로 '알았어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몸이 안 좋아 며칠 동안 회사에 휴가를 냈다고 했다. 어느 순간, 그의 말대로 그의 몸에 경련이 찾아왔다. 
그는 휴대폰을 잃어버려 그러니 명희의 것을 쓰자고 했고 그녀는 동의했다. 그가 어진가로 전화를 걸었고 그의 요청으로 몇 가지 심부름을 했다. 가지고 온 약을 복용한 뒤에야 몸 상태가 진정되었다. 그제야 그게 마약이란 걸 알았다.

 그가 차로 그녀를 처음 데려간 곳은 서해안이었다. 그들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바닷가를 돌고 노을을 보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뒤 남자는 밖으로 나가 새벽 두 시가 넘어 돌아왔다. 그녀는 어딜 다녀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품에 파고드는 어린애 같은 남자의 등을 꽉 껴안을 따름이었다. 외로움의 냄새. 그는 그녀와 동류였다. 다음 날엔 수안보로 가 온천욕을 즐겼다. 

 남자 행동은 여전히 수상했다. 현금카드를 주며 그 일대 은행 3군데에서 200만 원 씩 600만 원만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여자는 그렇게 했다.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다가 주차장에 세워진 그의 차 번호를 보고 렌터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호텔방에서 두 차례 섹스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그들은 평택과 수원을 들렀다. 모두 돈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오후 1시 경 그들은 종로에 도착했다. 남자는 조계사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점심을 먹자고 했다. 그는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가방을 챙겼다. 명희는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알았다.  레스토랑으로 가 스테이크와 와인을 시켰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남자가 가 봐야 할 곳이 있다며 가방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 앞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명희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마워." 남자가 말을 마치고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녀 눈앞에서 사라졌다.
 명희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아무 일 없이 그가 떠나자 허탈감이 몰려왔던 것이다. 그가 수배중이란 건 수안보의 한 은행 현금자동인출기 코너에 붙은 지명수배 전단을 보고 이미 알았다. 그녀는 그 뒤로 언제쯤 그의 손에 죽을까를 줄곧 생각해 왔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긴장이 된 건 사실이었다. 이제 그는 떠났고 명희만 남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명희는 그가 두고 간 봉투를 핸드백에 챙겨 넣고 레스토랑을 나와 종로 인파 속에 몸을 묻었다. 
 
 

 누들은 이근우가 기다리고 있는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은 거의 없었고 안은 어두컴컴했다. 이근우가 어둠 속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누들이 앞자리에 앉자 그가 종업원더러 잔을 하나 더 가지고 오라고 했다. 잔이 도착하자 이근우는 거기에 양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누들은 팔짱을 끼고 말 없이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근우는 취해 있었다.
이근우가 페이스북 비밀계정을 통해 도움 요청을 해온 건 어제 아침이었다. 주변정리를 하느라 미처 출국하지 못하고 있다가 수배령과 출국금지령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밀항하려고 안면도로 가 자칼을 만나려고 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고 한다. 자칼이 그를 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밀항 루트를 다시 찾아봐야 한다. 새 여권도 필요했다. 중국 쪽엔 이미 돈을 보낸 상태였다. 이제 배만 타면 된다. 조직이 그의 제거를 결정하리라는 건 관례로 보아 기정사실이다. 그는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절친한 후배 누들을 마지막 카드로 선택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콘돌 형님."
 "미안해."
 "참 형님도......어이가 없습니다."
 "자네가 나를 처리하기로 했나?"
 "그렇습니다."
 이근우가 고개를 떨구었다. 누들이 긴 말 필요 없다는 듯 그에게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원, 달러 뭉치와 위조 여권이 들어 있었다. 사실 돈은 필요없었다. 이근우가 고맙다고 하곤 잔을 들이켰다.
 "저들이 알면 자네도 무사하진 않을 텐데?"
 "지금 제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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