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⑤
  

 

 "확신하나?" 조 경정이 물었다.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요. 모종의 결심을 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건 시간을 끄는 겁니다. 공범들에게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죠."
 장만영과 조연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시그널을 보낼 시간을 줄여야지. 어서 전략을 세워보라구." 박 두호가 조연현에게 말했다.
 정화는 이근우를 처음 불심검문했던 의경과 그를 추적한 경찰관들을 불러달라고 했다. 그러자 박두호가 답답한 듯 불만을 터뜨렸다.
 "이 사람이 왜 시간을 질질 끄나. 참 나."
 그리곤 수행 경찰관들을 데리고 일행에서 떨어져 나갔다.
 "저 새낀 주제도 모르고 설친다니까."
 그가 사라진 뒤 장만영 입에서 욕이 나왔다. 점잖은 그에게서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정화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정화가 부른 경찰관들이 도착하자 그들의 수고를 치하하고 몇 가지를 물었다. 주로 그가 들고 있던 소지품과 도주로에 관한 내용이었다. 정화는 멀찌감치 서 있던 규영과 서창민을 불러 그들과 함께 도주로를 샅샅이 수색해 보라고 지시했다. 수상한 건 무엇이든지 수집하라고 했다. 월권이었지만 정화의 수사팀 합류를 바라왔던 조 경정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임무가 주어지자 서창민이 특히 신이 난 듯 솔선해 그들을 데리고 바삐 사라졌다.
 정화는 마음을 굳혔다며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조연현이 한 여경을 불렀다. 그녀 손엔 경찰복과 방탄조끼가 들려 있었다. 화장실로 가 옷을 갈아 입었지만 답답해서 방탄조끼는 입지 않았다. 옷깃에 도청기를 다는 것도 찝찝했다. 그러나 보안과 정보수집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핸드백에서 글록을 꺼내 등에 찼다. 그런 뒤 화장실을 나와 옷과 핸드백, 휴대폰을 여경에게 맡겼다. 본부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5시 무렵에 이르고 있었다. 서장은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으로 자진해 들어가겠다는 정화를 나머지 상관들이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연현이
준비하고 있던 권총과 실탄을 내밀었다.
 "어차피 뺏길 텐데요, 뭘." 정화는 권총만 받아 들었다.
 "뺏길 걸 뭐하러 들고 가?" 옆에서 양하섭이 물었다.
 "생각이 있어서." 정화가 대답했다. 
 조 경정, 양하섭, 기동대장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짰다. 정화가 이근우와의 거리를 최대한 멀리 할 것, 도청기는 절대 떼지 말 것, 정화의 왼 손이 머리를 만지면 맞은 편 건물 옥상의 저격수들이 이근우를 저격할 것, 저격 실패시 기동대가 즉시 문을 부수고 들어가 정화를 구출해 낼 것, 자살 시도와 같은 비상 상황에 대비해 앰뷸런스를 마련해 둘 것, 등.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프로 살인범 앞에서 도청기도 아마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장만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박 청장 달래느라 혼이 좀 났네. 짜식, 똥줄이 타서 안달을 하더군."
 서장의 말에 조 경정이 킥킥 웃었다. 그들은 경찰대 선두주자인 박두호 치안정감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듯했다. 경찰대 출신을 싫어하는 서장에겐 당연한 것이었고, 그곳 출신이지만 조 경정 역시 파벌과 거리를 두고 있는지라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조연현 경정은 비경찰대 파벌 소속인 서장과도 별로 친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선 전선이 일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파벌의 세계는 이렇듯 복잡하고도 미묘한 것이다.
 "최 과장님은 왜 안 보이죠?" 정화가 장만영에게 물었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야." 그가 대답했다.
 정화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보팀이 마지막으로 도청기를 점검했다. 정화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놈이 대체 그녀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대화 시나리오에 대해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준비를 모두 마쳤다고 하자 몇몇 무장 경찰관들의 그녀를 에워쌌다. 서장과 조 경정, 그리고 여러 간부들이 몸 조심하라며 일일이 악수를 건네왔다. 이제 경찰의 위신은 정화에게 달린 것이다. 정화는 주변의 걱정과 달리 왠지 마음이 평안하기만 했다. 사지로 들어간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양하섭이 선도하는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조계사를 나와 커피숍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집요하게 쫓아오는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가 거리에 작렬했다. 주변의 경찰들과 구경꾼들이 호기심 가득찬 눈초리로 정화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커피숍 문앞에 도착했다. 얼마 지나 안에서 움직임이 일었다. 여자를 앞세운 남자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와 동시에 경찰 서치라이트가 다욱 환히 켜졌다. 놈은 생각보다 아담한 체구였고 몽타주완 달리 얼굴은 평범해 보였다. 도저히 연쇄살인범이라곤 여겨지지 않았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그 생김새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문밖의 정화를 보더니 빙긋 웃으며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몸이 마치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상황이 끝나고 거리로 다시 나가게 된다면 내 삶을 다시 사랑해야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 얼굴에 자조의 미소가 번졌다.

 

 이근우는 아르바이트생을 풀어준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 대신에 총과 도청기를 그녀로부터 빼앗았다. 이제 홀에는 카운터 구석에 앉은 정화와 등산용 칼을 든 이근우 뿐이었다. 이근우는 총알이 없는 권총을 보고 투덜거렸다.
 "제길헐. 한 방에 갈려고 했는데 도와주지 않는군."
 정화는 말 없이 그의 일거수일투족만 눈에 담았다. 이근우는 마치 바리스타처럼 커피를 한 잔 타서 건네주었다. 정화는 고맙다고 했다.
 "감개무량하군." 그가 말했다.
 "뭐가요?" 정화가 물었다.
 "당신하고 이렇게 마주앉게 될 줄이야."
 "나와의 인연이 있던가요?" 장화가 그의 집에 걸려 있던 줄리엣 비노쉬가 나온 영화포스터와 정화 관련 기사파일을 상기하곤 물었다.
 "글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그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 대해선 고등학교 시절부터 잘 알고 있어. 아마도 당신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 그저 한때 내 선망의 대상이었을 뿐인데 당신은 느닷없이 나타나곤 했지. 파주에서, 그리고 올 초 강남서로 오면서."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가 이번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왠지 말문이 막히는군."
 "자수하고 나서 차근차근 이야기 해보도록 해요. 다 들어줄 용의가 있으니까."
 "자수?"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걸 내가 왜 해?"
 "이거 봐요, 이근우 씨. 생명은 소중한 거예요. 사실 상 사형제가 폐지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비록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때가 오면 언제라도 가석방 될 수 있어요. 상부에선 당신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고 약속했어요."
 그러자 이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기엔 내가 죽인 사람이 너무 많아."
 "대체 몇 명을 죽였죠? 파주와 청담동, 이천 말고."
 "후후, 그걸 내 입으로 순순히 얘기할 것 같아?"
 "좋아요. 한 가지만 더 묻죠. 제접 프로 같은데 이천 두 여자 건을 보면 참 허술한 구석이 많아요. 왜 그랬죠?"
 "진실을 말해 줘? 판단미스지. 집중력이 떨어진 거야. 약을 좀 했고 죽은 이들에 대한 내 나름의 자책감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후배놈을 너무 믿었어. 거기에 당신이 일조를 했지. 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당신." 그가 말을 맘추고 정화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올 봄에 강남서 강력팀장으로 발령났다는 기사가 뜰 줄이야. 내 살인 본능과 그에 대한 자책감, 추억 등이 뒤섞여 자제력을 잃은 것 같아. 말 못할 스트레스도 있었고."
 "스트레스라. 혹시 조직으로부터의 중압감인가요?"
 "이제 그만." 그가 손사래를 쳤다.
 "왜요? 어치피 가는 길이라면서 할 말 다 하시지." 정화가 말했다.
 "비아냥거리지마. 깊은 얘길 하기엔 당신 옷에 또다른 도청장치가 너무 많아. 견장과 혁대, 경찰뱃지를 살펴 봐. 장치가 있을 거야."
 정화가 그가 말한 곳을 만져보았다. 뱃지와 혁대에선 찾을 수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 견장 안에 작은 금속 보턴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런 젠장." 정화는 몸을 떨었다. 미리 얘기해 주지 않은 조 경정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거 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지? 세상이란 그런 거야. 인간이란 어차피 혼자란 말이지. 아무도 믿지 말라구. 당신 주위에 양아치들이 득실거리고 있어."
 이런 조건에서 어차피 긴밀한 얘길 나누기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정화는 도청기 일을 일단 미뤄두고 우선 그를 제압할 방도를 생각해 보았다. 밖에서 보기에 그녀와 이근우의 몸이 겹쳐져 있어 저격수가 개입하기엔 각도에 무리가 있었다. 등에 찬 여벌 권총을 꺼내기엔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발을 써서 탁자 아래를 가격해 볼까도 고려해 봤지만 칼을 쥔 놈의 자세엔 헛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방법이든 섣불리 나섰다간 피를 볼 게 뻔했다. 정화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이근우가 얇은 등산용 점퍼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얼핏 보니 USB였다. 그가 엄지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더니 그걸 정화 손에 쥐어주었다.
 정화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로만 뭐냐고 물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가까이 오라고 했다.
 "선물이야." 그가 얼굴을 그녀 가까이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나 참고는 하되 절대 깊이 들어가진 마. 당신 목숨이 위험하니까."
 "위험하다니?" 정화도 속삭였다.
 "임설희가 들어왔어. 개입하면 너를 노릴 거야."
 정화는 충격을 받았다. 결혼해 아르헨티나로 떠난 설희가 이 땅에 와 있다니. 그리고 그가 어떻게 임설희를 안다는 말인가?
 "설희를 알아?"
 "난 많은 걸 알아. 당신이 파주에서 유종하를 죽인 것도, 미국에서 살인행각을 벌인 것도."
 정화는 급기야 놀라 자빠질 뻔했다. 어떻게 이 자가?  
 갑자기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거짓말 하지 마."

 정화가 저도 모르게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 결에 그가 뒤로 몸을 빼다가 의자에서 비틀거렸다. 억제할 수 없는 충동. 정화는 그의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등에서 권총을 빼어들었다. 당황한 이근우가 칼로 자기 목을 그으려는 순간, 그녀의 권총이 그의 심장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는 바람에 총알은 그의 어깨와 목 사이를 관통했다. 

 피를 보자 쾌감이 찾아왔다. 정화는 이성을 잃었다. 한 발을 더 쏘았지만 총알은 그를 비껴나가 벽을 맞고 튕겨나갔다. 또 한발은 불발탄이었다. 

 그 때 커피숍 정면 유리창이 깨지며 무장경찰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바닥에 모로 쓰러진 이근우의 어깨와 뒤통수에서 제접 많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정화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우우우, 또 총을 사용하다니, 정화는 자책했다.

 탁자 옆의 타월을 집어 얼른 그의 상처 부위에 갖다 댔다. 그의 숨은 겨우 붙어 있었다. 양하섭과 정화의 동료들도 뛰어 들어왔다.
 "괜찮나?" 양하섭이 물었다.
 정화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근우가 들것에 실려나가기까지 그녀는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구급차에 오르기 직전, 이근우가 정화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해, 줄비."
 그리고 이근우는 정신을 잃었다. 의사가 산소마스크를 급히 씌웠다. 어디론가 떠나가는 구급차의 뒷모습을 보며 정화는 조계사 본부로 가 먼저번 여경을 불렀다. 소지품을 받아 피가 묻은 정복을 벗고 입고 왔던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핸드백에다 아직 열기가 난아 있는 글록, 그리고 이근우한테서 받은 USB를 소중하게 챙겨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슬며시 사찰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그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