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⑥

 

 

 

 

 


 해가 저물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동안 무음으로 해 놓은 스마트폰에선 연신 화면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주로 경찰 상급자와 동료들, 기자들, 그리고 지인들이었다. 택시 기사는 오늘의 장안 화제 주인공인 정화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이만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마 조연현 경정의 전화까지 무시하긴 어려웠다.
 "오 경위, 지금 어딘가?" 그가 대뜸 물었다. 화를 낼 줄 알았으나 예상 밖으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제 차를 가지러 일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 남아 할 일이 제법 많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돌아오면 안 되겠나? 할 이야기가 많네."
 "죄송하지만 지치네요. 오늘은 푹 쉬고 싶습니다." 정화가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별도의 도청기를 단 그에게 실망해서였다.
 잠깐 시간이 흘렀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은근히 걱정이었다.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따르는 도리 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또 의외였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서울청에서 보세. 오늘 정말 애 썼네. 잘 쉬게."
 그가 전화를 끊자 정화는 폰의 전원을 끄고 택시 소파 깊숙히 상체를 묻었다.

 

 차는 별장 마당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뒷좌석의 수거물 봉투도 그대로 있었다. 차를 몰고 시청 앞 프라자 호텔로 갔다. 머리가 복잡할 때 가끔 쉬어가는 곳이었다. 객실요금은 무척 비싸지만 분기에 하루 정도 정화는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있었다. 지하 스파에서 중국요리를 먹고 스파를 다녀온 다음, 호화롭고 넓은 객실 창가에 앉아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다 보면 몸과 마음의 피로가 풀리곤 했다. 프론트에서 낯익은 매니저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이미 뉴스를 본 듯 그의 표정은 사뭇 예전과 달랐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정화의 표정을 살폈다.
 "그 방으로 주세요."
 "스파 이용은?"
 "오늘은 그냥 쉬겠어요. 식사도 룸서비스를 이용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예전처럼 쓸데없이 이것저것 묻거나 농담을 하지 않았다. 열쇠를 받아 17층으로 올라갔다.
 날은 더웠지만 객실은 시원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다시 스마트폰 전원을 켰다. 문자메시지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정화는 폰을 침대에 내려놓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과 몸에서 화약냄새와 쉰 냄새가 났다. 완전히 알몸이 된 뒤 실내 가운을 걸쳤다. 옷가지를 정리하고서 룸서비스를 불렀다.
 두 시간이 지났다. 목욕을 했고 식사도 마쳤다. 옷도 라운드리 서비스에 맡겼다. 이제 그녀는 늘 그랬듯 창가 테이블에 가 앉았다. 와인 한 병과 카스테라, 스낵 한 접시가 앞에 놓여져 있었다. 와인 한 잔을 따라 한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티브이를 켜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핸드백에서 글록을 꺼냈다. 아직도 화약냄새가 났다. 탄창에서 세 발이 비어 있었다.  마지막 총알이 불발탄인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누가 보아도 세 발이나 쏜 건 방어용이 아니었다. 조사가 뒤따를 게 뻔했다. 무슨 변명을 해야 하나, 정화는 혀를 끌끌 차며 수건으로 총을 깨끗이 닦고 핸드백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근우는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위는 철통같은 통제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의 자살기도로 볼 때 비록 몸이 회복된다고 해도 순순히 진술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그렇게 나온다면 결국 드러난 사건 만으로 기소를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용의선상에 올랐던 사건들만으로 재판에서 법정 최고형을 구형받을 것이 뻔한 이치지만 경찰은 추가 여죄를 캐내지 못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아쉬워 할 게 틀림이 없다. 

 

 임설희. 파주와 미국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는 건 임설희 밖에 없다. 이근우가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임설희와 무척 긴밀한 관계라는 걸 증명해 준다. 대체 무슨 관계일까? 게다가 임설희가 국내에 들어와 있다니. 정화에겐 경천동지할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USB는? 정화는 와인 한 잔을 주욱 들이키고 나서 일어나 핸드백을 찾았다. 백 속 깊은 곳에서 그 USB를 꺼내보았다. 일회용 라이터의  3분지 2크기의 검은색 장치였고 가운데 하늘 색 보턴이 있었다.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보턴을 손가락으로 밀자 컴퓨터 본체에 연결하는 잭이 튀어나왔다. 내용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나 룸엔 컴퓨터가 없었다. 그걸 열어보려면 2층 비즈니스센터로 가야 한다. 하지만 내용이 매우 비밀스러운 것일 경우 공개 장소에 있는 컴퓨터나 평상시 사용하는 것에 연결해선 안 된다. 역시 사람이 수시로 드나드는 피씨방 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밖으로 나가기는 싫었다.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사건의 공기가 충만해 있는 거리로 나설 경우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그게 무서웠던 것이다. 정화는 호텔 로비나 거리가 한적한 새벽 시간을 택해 근처 피씨방에 가기로 했다.


 설희와의 옛 일이 뇌리에 영화필름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타지에서 만난 둘은 피차 젊었고 또한 외로웠다. 설희는 유학생, 정화는 영사관파견 경찰관 신분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가까워졌고 일련의 사건을 통해 신뢰를 쌓은 다음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몇 번 정도였지만 급기야 남들이 백안시하는 사랑도 나누어 보았다. 그러던 중 둘 사이에 치명적인 불화와 오해가 생겼고 설희는 정화를 저주하며 떠났다. 정화는 절대로 그녀 주변을 FBI 에 밀고하지 않았다.

 정화가 귀국하고 나서 2년 쯤 지난 뒤 다시 설희를 수소문해 극적으로 통화를 하게 됐다. 그때 설희는 FBI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따라 새로운 신분으로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설희는 곧 히스패닉계 중권중개인과 결혼을 해 남미로 겅 거라며 다시는 자기나 주변 인물들에게 절대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그녀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그것이 정화가 알고 있는 그녀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정화는 약속을 지켰다. 설희의 지인들이 한국에 여럿 있었지만 그들을 머리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아주 낯선 곳에서 설희가 돌출했다. 이번 일은 설희 스스로 정화에게 찾아온 것이지 정화가 먼저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설희가 한국으로 들어왔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정화가 알고 있는 전문킬러들 가운데 하나. 그 존재만으로 사회에 위험하기 짝이 없다. 분명  청부살인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설희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먼저 출입국기록을 찾아보고 지인들, 특히 설희의 고모와 수감 중인 김창호 주변을 탐문해 보면 된다. 또한 마약과 국제매춘, 조직폭력과 관련된 정보원들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로빈이나 제이시, 플래처 교수 등 미국 쪽 라인과 연락을 취해 알아볼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설희를 찾아야 할 것인가? 그러기엔 왠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옛날 그녀들 식의 아름다운 추억을 이제와서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지독한 감상주의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강력한 기분전환제가 필요했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희롱하던 설희의 혀가 문득 떠올랐다. 그녀 기억으로 가장 뜨거운 혀였다. 속살 깊은 곳에서 느낌이 왔다. 이건 또 뭔가, 정화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거리로 나가 건장한 남자나 여자, 아무나 붙잡고 어디 가서 지독한 섹스나 나눠보자고 하면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미친년이라고 할 것이다. 정화는 실없이 키득거렸다. 혼자 와인 한 병을 다 비우는 동안 서울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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