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004년 뉴욕, 뉴욕 ②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내가 서울서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여름방학 때 거기서 살던 아버지하고 잠깐 있었지요. 혹시 나 몰라요? 오정화라고."
정화가 자기 명찰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런 사람 몰라요."
그러면서 설희는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워낙 충격적인 일을 겪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얘기를 꺼낸 걸 후회했지만 어차피 마무리는 해야 했다.
"어머, 임설희 씨가 당시 초등학생 때였다고 기억하는데 피짜집에서 피짜도 사주고 그랬잖아요."
"그런 일 없고, 난 댁을 모릅니다."
설희가 잘라 말했다.
"기억에 없다면 할 수 없군요. 친구 이름이 뭐죠?"
정화는 섭섭함을 달래며 민원사항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설희의 직업을 묻자 보스톤에 있는 매사추세츠 주립대를 다닌다고 대답했다. 정화는 새삼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어릴 때 큰 풍파를 겪은 아이가 이렇게 훌륭히 자라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유학생 비자로 들어와 유흥가에서 일하고 있는 한인 여성들이 많기에 조사를 해볼 사항이다.
친구의 이름은 조미란이라고 했다. 컴퓨터로 조회를 해보니 LA유흥가에서 뉴욕 저명인사 골프파티에 원정을 온 호스테스였다. 이틀 전에 알몸으로 파티를 하다 주민 신고로 남자들과 여자 20여 명이 붙잡혀 한인타운을 관할하고 있는 109경찰서에서 한창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정화가 이미 보도를 접하고 뉴욕경찰국에 정보협조 요청을 해놓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용의자들을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혹시 얘도? 정화는 설희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조미란 그룹은 아마 곧 정식 재판을 받게 되리라. 알선책일 경우 구속이 되지만 단순 가담은 벌금형으로 풀려날 가능성이 크다. 불법체류자라면 무조건 추방이다.
이를 설명해주자 설희는 면회할 수 있도록 영사관에서 조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정화가 영사를 찾아갔으나 그는 개입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서 직접 설희를 데리고 109경찰서를 찾았다. 조미란 수사는 마침 제이시 설리반이라고 하는 흑인 여성경찰관이 맡고 있었는데 범죄 현장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정화의 부탁에 제이시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뒤 면회를 마치고 나온 설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미친 것,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러고 난리야."
설희가 푸념을 했다. 그러면서도 정화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곤 경찰서 밖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영사관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제이시가 잠깐 이야기하자며 자기 사무실로 정화를 불렀다. 풍만한 제이시의 체구완 달리 방은 아담했다. 하지만 시원했고 집기와 서류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제이시가 시원한 오렌지주스를 건네며 물었다.
"주디를 잘 알아?"
"아니. 오늘 처음 만났어. 왜?" 정화가 되물었다.
"그래? 난 또 아는 사이라고." 제이시가 자기 잔을 홀짝거렸다.
"당신은 그녀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
"맞았어. 좀 의심이 가는 여자지."
제이시의 말에 정화는 주스를 마시다가 주춤, 했다.
"어떤 점에서?"
"그걸 얘기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판단이 안 서는군."
"내게 얘기한다고 해서 그리 나쁠 것 같진 않은데? 우린 친구잖아."
그 말에 제이시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파일함으로 걸어갔다.
"그래 한인은 한인이 잘 아니까. 그리고 정화에게 주의하라는 의미에서 내 친절을 베풀지."
함을 뒤지는 그녀의 산만한 엉덩이가 장관이었다. 잠시 뒤 파일철 하나를 들고 와 그 속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정화에게 건넸다. 철의 제목을 흘끔 보니 <범죄 관심대상자 요약>이었다.
"읽어 봐."
정화는 흥미로운 마음에 찬찬히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주디 림, 즉 임설희가 뉴욕에 온 건 9.11이 일어나기 직전인 2001년 7월이었다. 그 전 6개월 동안 L.A.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뉴욕에서 랭귀지스쿨을 졸업하고 2002년 가을에 매사추세츠주립대학 국제금융 학사과정에 등록했다. 거처는 보스톤 케임브리지 2번가다. 그녀의 후견인은 L.A.에 사는 삼촌 데이빗 로드, 한국명 임판규라고 나와 있었다. 로드는 90년 대 말에 L.A. 유흥가에서 주류도매상으로 성공해 바와 클럽을 몇 개 소유하고 있다. 폭력 전과와 마약중개로 복역한 전력이 있고 현재는 탈세로 구속 중이었다. 후견인이 그렇다 보니 설희가 관심대상에 오른 듯했다.
"삼촌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조카까지 문제가 있다는 건 좀 그런데?" 정화가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다음 페이지를 읽어 봐." 제이시가 말했다. 그녀는 어느 새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 주디 림에 관한 브리핑.
림은 보스톤에 거주하면서도 뉴욕 퀸즈의 한인타운 유흥가를 정기적으로 출입하고 있다. 목적은 분명치 않다. 만나는 인물이 범죄 전과가 있거나 위험한 인물은 아니지만 불법 매매춘과 관련되어 있다는 정황 몇 개가 포착됐다. 테스트 결과 림에게 마약 복용 흔적은 없다. 직접 매춘에 뛰어든 정황도 없다. 그러나 마약 범죄전과가 있는 멕시코계 인물과 불법체류 한인 여성 몇 명을 만난 적이 있다.
림은 또, 분기에 한 번씩 미국내 여행을 한다. 최근 3년 동안 캘리포니아와 애틀란타에 각각 3번, 텍사스 오스틴 2번, 애리조나 투산 2번, 등이다. 캘리포니아 여행 목적은 교도소에 있는 삼촌 데이빗 로드 면회지만 주로 L.A. 한인밀집지역 유흥가에서 지낸다. 다른 지역의 여행목적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단순여행이다. 그런데 만난 자들의 행적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 거의 불법매춘, 마약, 또는 불법이민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여행지에서 휴대폰 신호가 자주 끊기는 것에 의심이 간다. 조사를 했지만 범죄관련 정황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학생 신분으로 별다른 직업이 없으면서도 고급승용차를 몰고다니고 있는 것 때문에 매매춘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의심해 계좌를 수색했다. 그 자금은 모두 데이빗 로드가 송금한 것이었다.
한국엔 6개월에 한 번 꼴로 방문한다. 출국기록에 따르면 여행 목적이 병상에 있는 아주머니 방문이다. 그런데 한국 경찰 첩보에 따르면 김창호라는 조직폭력범을 몇 번 만났다고 한다. 그는 폭력과 살인청부 혐의로 한국에서 체포된 전력이 있는 조직폭력범으로 모두 단순 상해로 밝혀져 경미한 처분을 받았다. 그는 1년 6개월 형을 받고 2003년 12월에 만기 출소했다. 흥미로운 점은, 림의 아주머니 림지현이 과거 김창호에게 살인을 청부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림이 가장 최근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2003년 12월로, 출소한 김창호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림과 김창호가 연인관계인지는 분명치 않다. 공교롭게도 김창호는 2002년 2월에 L.A.를 방문, 림과 함께 데이빗 로드를 만나기도 했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상에서 보듯, 림은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한국 조직범죄자들, 또는 데이빗 로드와 관련된 불법 커넥션에 가담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범죄예비단계일 것이다.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2004. 4. 13. 리 J. 잭슨, 프로파일러 NY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