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004년 뉴욕, 뉴욕 ①  

 

 

 5. 2004년 뉴욕, 뉴욕 ①  

 


 과거 정화와 설희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간을 8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2004년 뉴욕에서의 그 밤을 정화는 절대 잊지 못한다.

 

 8월이 한창이던 어느 날 새벽, 정화는 침대에서 벌거벗은 상체를 일으키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디지? 언젠가 한 번 들렀던 방. 옆에선 한 여자가 잠들어 있었다. 침대 시트는 바닥에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그 여자의 몸은 완전 벌거숭이였다. 심한 갈증이 몰려왔다. 머리도 깨질듯 아팠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면서 정화는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았다. 상대 여자는 설희다. 여기는 그녀의 방. 간밤에 클럽에서 진탕 마신 뒤 그녀와 같이 이리로 온 기억이 났다. 그리고 한데 뒤엉켰다. 술김이었지만 알고 보면 정화가 원하던 것이었다.

 이제 어쩌면 좋지? 설희가 잠에서 깨어나면 뭐라고 할까?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후배인 그녀에게 부끄러운 짓을 한 게 후회가 됐다.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정화가 설희를 안았고 설희는 그녀 품에 안겼다. 그러길 잠시, 정화가 설희의 입술을 찾았고 입맞춤이 길어지자 몸에 열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고 서로 옷을 벗겼다. 이어 찾아온 폭풍과 오르가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설희가 오히려 더 적극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불을 당긴 건 정화였다. 평소 자신을 언니처럼 따르던 설희. 언니로서 무언가 길을 잘못 인도했다는 자책감에 정화는 몸을 떨었다. 그 때 설희가 몸을 뒤척였다. 일어나 앉은 그녀를 잠깐 바라보더니 부둥켜 안고 다시 침대로 눕혔다. 그리곤 입술로 정화의 젖무덤을 애무하더니 젖꼭지를 빨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얘가?'
 잠시 그러던 설희는 다시 정화 몸에서 떨어져 나가 잠이 들었다. 새벽 여섯 시였다. 출근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 잠을 더 자야 할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정화는 망설였다. 난생 처음으로 겪은 일. 동성과 욕망을 해결하다니, 자신에게 이런 구석이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앞으로 어떡하지? 로빈이 알면 뭐라고 할까? 머리 속에서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가 사뭇 잠이 들었다. 
 "출근해야지?"
 눈을 뜨니 설희였다. 어느 틈에 슬립을 걸치고 있었다. 수건으로 묶은 머리에 물기가 있는 걸 보니 막 욕실에서 나온 듯했다. 몸을 일으켰다.
 "예쁘네, 몸이." 설희가 그녀의 속옷을 찾아 건네며 말했다. 정화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응?""하고 말 뿐이었다. 한여름이라 방은 더워지기 시작했다. 욕실로 가 샤워기를 틀었다. 설희의 입술이 지나간 몸 구석구석에 시원한 물줄기가 쏴아하고 쏟아졌다.
 욕실에서 나오니 설희는 보이지 않았다. 어색함을 느낄까봐 먼저 피한 듯했다. 식탁엔 토스트와 우유가 놓여 있었고 메모가 보였다.
 - 나중에 전화할게, 언니. 간밤에 굿이었어. 문을 잠그고 키는 가져 가.
 
 출근해서도 하루 종일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로빈이 연락을 해왔다.
 "하이, 정화. 어제 전화를 안 받던데?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지?"
  "여자 후배 집에서 잤어. 알지? 주디."
 로빈은 그랬냐고 하면서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그러나 정화는 왠지 그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급한 사건이 생겨 오늘은 곤란하다면서 약속을 내일로 미뤘다. 로빈은 더이상 채근하지 않고 몸조심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로빈과는 한인여성 인신매매 건에 대한 뉴욕경찰국의 과장보고사건 수사를 하다 만났다. 로빈 호긴스(Robin Hogins Jr.) 요원이 몸담고 있는 FBI에서도 이 사건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미국에선 국세 탈루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된다. 지난 몇 년 동안 뉴욕경찰국은 한인여성 인신매매 통계를 실제보다 과장해 거액의 수사자금을 상부로부터 타내 불법으로 유용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시카고, 애틀란타, 펜실베니아, LA경찰국에서도 같은 종류의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인신매매 두 건을 120건으로 뻥튀기한 곳도 있었다. 한국정부는 나라
위신과 관련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마침 뉴욕총영사관에 파견나와 있던 정화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시종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뉴욕경찰국과의 소통창구를 열어준 게 로빈이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 급기야 몸을 섞는 관계로 발전해 있었다. 

 둘 다 한창 나이의 독신이었다. 그러나 만남을 철저히 비밀로 유지했다. 주위에 알려지면 공직자 기강 논란이 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화는 로빈을 잠깐 스쳐갈 인연이라고 생각했고 그건 로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에겐 약혼녀가 있다.

 아직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마당에 설희와의 일이 생긴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화장실로 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퀭하고 핏발 선 눈과 부석부석한 피부가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았음을 나타내주었다. 부득이 조퇴를 했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면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뉴욕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거리도, 사람들의 표정도 지난 봄보다 휠씬 활기차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9.11의 상처가 거의 아문 듯했다. 그러나 속은 그게 아니었다. 정신적 공황은 유령처럼 아직도 뉴욕시민들의 머리 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한국에서 쫓겨나듯 이곳으로 온 지 벌써 열 달이 다 되어 간다. 애초부터 뉴욕은 낯설지 않았다. 경찰대에 다닐 때 6개월 동안 이곳으로 와 FBI로부터 수사기법 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 수사 쪽으로 주특기를 선택한 것도 그 연수가 계기였다. 하지만 채 발휘도 못 해보고 다시 이곳으로 떠돌이처럼 돌아오다니, 정화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캐나다에 큰오빠가 살고있지만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 배다른 오빠인 그는 처음부터 정화와 정화 어머니를 가족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지금 지병으로 서울 근교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
 몇 달 전 딸의 안부를 걱정한 아버지가 먼 이곳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군에서 강제 예편당한 아버지는 변변한 공직 하나 맡지 못했지만 아직도 영사관으로부터 장군 대접을 받았다. 그 뒤로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 가운데는 경멸의 눈길도 있었다. 특히 오래전에 신군부가 광주에서 벌인 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젊은 직원들이 그랬다. 그러나 정화는 개의치 않았다. 광주에서의 학살은 분명히 잘못된 짓이었지만 아버지는 당시 수도권 포병부대에 있었던지라 직접 동족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빠들은 달랐다. 아버지의 경력을 알고난 뒤 방황했고 작은 오빠는 운동권에 가담하기도 했다. 어버지의 죄를 씻기 위해서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결혼하더니 그저 속물이 돼버렸다. 최근 사업에 실패하더니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떼어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이에 큰오빠와 사이가 틀어졌고 집안은 시체말로 콩가루가 되어 있는 상태다.
 아버지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있는 건 정화 뿐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던 아버지는 배웅을 나온 정화에게 처음 눈물을 보였다. 그 때 아버지는 '장군의 딸'답게 씩씩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화는 아버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집이 있는 스캐어즈데일(Scarsdale) 교차로였다. 집은 유태인 부부가 세를 놓은 곳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방 둘에 거실과 주방, 욕실을 갖춘 편리한 공간이었다. 정원도 딸려 있어 철마다 그 모습을 바꾸는 모양새가 보기에 아주 좋았다. 물론 집세는 정부에서 지원한다.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MP3를 열고 예전에 종서가 선물로 준 CD를 집어넣었다. 조용한 연주음악이 흘러나왔다. 그의 형이 죽은 뒤 종서는 자기 때문에 형이 그렇게 됐다며 정화를 떠났다. 종서의 나이는 정화보다 한참 어리지만 그녀에게 있어 사실 상의 첫사랑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일, 애초부터 종서와 그렇게 얽히는 게 아니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지금은 아마 군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그러다가 설희와 있었던 지난 밤의 일로 생각이 자연히 옮겨갔다. 로빈과의 일도 그렇고, 난 왜 이리 어이없는 사랑만 하는 걸까. 정화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

 설희를 이곳에서 처음 만난 건, 지난 달 원정매춘 단속 일로 그녀가 직접 영사관을 찾아와서였다.

 친구가 퀸즈에 있는 109경찰서 유치장에 있는데 면회가 안 된다며 항의하러 온 것이었다. 그녀가 자기 이름을 주디 림(Judy Lim), 한국명 임설희라고 밝혔을 때 정화는 놀랐다. 일찌기 기억하고 있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만나는구나. 어릴 때의 모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예쁘고 잘 빠진 동양계 성인여성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이렇게 변하다니, 조물주의 기적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 됐다. 설희가 내민 여권에서 이름을 다시 확인하곤 주저주저하다가 물었다.
 "임설희 씨? 혹시 어릴 때 연천에서 살지 않았나요?" 정화가 물었다.
 그러자 설희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런 건 왜 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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