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4. 감상은 나의 적 ⑦

 

 

 

 

 

 그날 밤, 영등포의 한 오피스텔에선 긴급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참석자는 남천우와 김창호, 제시카, 그리고 미키였다. 행동대장 샤프는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창은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고 벽엔 등을 보인 여인의 흑백사진 하나만 달랑 걸려 있었다. 실내엔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일행은 티브이 속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고 김창호의 지시 아래 미키가 방 안을 왔다갔다하며 휴대폰으로 부지런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오늘 낮 콘돌, 이근우가 저지른 돌출행동이 앞으로 큰 파장을 몰고올 것이었다.
 토론은 세 가지로 집약되었다.
 하나는 누들이 처리하기로 한 콘돌이 어떻게 아직도 서울에서 활보하고 다닐 수 있었냐는 것, 다른 하나는 이근우의 바로 윗선인 누들과 자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마지막 하나는 이근우가 오정화를 불러들여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일이 터지자마자 김창호가 가장 먼저 어딘가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제시카와 미키를 불러들여 초동조치를 취한 다음, 남천우에게 연락했다.
 회의 주재자는 보스 남천우였지만 거의 김창호가 주도했다. 남천우는 시종 태연했다. 설령 이번에 문제가 터져도 전적으로 김창호가 지휘하는 라인에서 저지른 일이라 자신은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깊숙히 아는 것을 아예 두려워하고도 있었다. 근래 들어 조직 관리에 세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거니와 실권을 거의 김창호로 넘긴 상태였다. 얼마 전 그가 총애하는 조직의 2인자 박시백이 창호에 의해 제거된 뒤 그는 거의 조직의 바지사장 꼴로 전락해 있었다.  
 종로에서 일이 터진 걸로 보아 세운상가에 가게가 있는 누들이 이근우를 도와준 게 틀림 없었다. 그는 귀신처럼 자취를 감췄다.
 인천공항에까지 조직원을 풀었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출국기록은 아직 없었다. 그의 특기인 위조여권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자칼은 마침 그 시간에 폐기물을 바다에 버리고 오던 중이라 서울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부두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에 있던 조직원들이 그를 잡아 가두는 데에 성공했다. 그제야 소식을 들은 자칼은 조직원들의 추궁에 사실을 고백했다. 이틀 전 이근우가 갑자기 모항으로 찾아오겠다고 하길래 그 만남을 거절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뒤 이틀 동안 여기저기 피해다녔으며 만난 적이 없다고 맹세헸다. 김창호는 그와 통화하면서 제거 대상인 이근우의 연락을 받고도 조직에 보고하지 않은 데 대해 강하게 질책했다. 그리고 조직원들에게 자칼을 당분간 감금하고 만약 누들이 근처에 나타나면 반드시 제거하라고 지시해 두었다. 정황은 추측이 가능해졌다. 이근우가 자칼을 통해 중국으로 밀항하려 했으나 자칼이 만나주지 않는 바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누들에게서 위조여권을 받아 다른 출국경로를 알아보고 있다가 당한 것이다.
 "멍청한 새끼."

 남천우가 중얼거렸다. 김창호에게 한 말인지, 이근우를 두고 한 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형님." 김창호가 고개를 숙였다. "실제 이근우는 외곽에 있었으니까 조직 전체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경찰이 놈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누들과 자칼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전도 결코 보장될 수 없을 테지요. 따라서 경찰보다 먼저 그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자칼은 잡았으니 누들이 문제인데, 만약 여길 떴다면 다행입니다. 당분간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형님은 걱정하지 마시고 평소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콘돌인지, 이근우인지 하는 놈은 지금 어디에 있대?"
 "백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는데 중태라고 합니다."
 "오정화, 그 년 아주 당차네." 남천우가 제시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시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미키가 중얼거렸다. "한꺼번에 콘돌과 자칼, 누들에게 문제가 생기다니." 
 그들은 사실 이 사업의 절반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무너지긴 뭐가 무너져.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제시카가 소리쳤다. 그 바람에 미키는 입을 다물었다. "누들이 만에 하나 경찰에 잡히더라도 절대 불지는 못할 거야. 그러면 자기들 목숨도 간당간당하니까. 다만, 콘돌에게 수서동 건을 부탁했던 게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우리가 직접 실행에 옮겼다는 증거가 없잖아."
 제시카의 말에 일행은 일단 안도했다. 그러나 미키가 문제점을 들고 나왔다.
 "만약 누들이 콘돌에게 조직에 대해 발설했다면? 특히 제시카 누님에 대해서요."  
 "나에 대해서? 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놈이 오정화의 스토커, 팬이라고 보도하더군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요. 누들이 그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혹시 아주 사적인 것, 그러니까 누님과 오정화의 미국에서의 인연에 대해 술자리 안주 삼아 콘돌에게 귀뜀을 했을 수도......"
 "집어 치워." 제시카가 다시 한번 미키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의 추론에도 일리가 있다는 듯, "일단 경찰 쪽 동향을 파악해 보고 다시 얘기 하자. 그 쪽은 형님이 알아보고 있죠?"
 "응." 창호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들어온 소식은 콘돌이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고 있는데 중태라는 것, 그리고 오정화가 상황 보고도 않고 어디론가 자취를 갑췄다는 것 뿐이야. 둘이 무슨 이야길 나눴는지 경찰에서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지. 오정화가 왜 그랬을까?"
 "이거야 원, 모든 걸 전혀 종잡을 수 없군요." 미키가 말했다. "오정화를 우리가 안전하게 모셔올까요?"
 그 말에 제시카의 안색이 확 변했다. '안전하게 모셔온다'는 말은 그들 사이에서 '납치살인'을 뜻한다.
 "그건 안 돼." 제시카가 잘라 말했다.
 "왜죠? 인연 때문인가요?" 미키가 반문했다.
 그 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천우가 제시카를 두둔하고 나섰다.
 "야, 임마. 절대 그건 아니지. 우리 철칙이 있잖아, 여자는 절대 모셔오지 않는다. 이래저래 귀찮게 구니까 말야. 게다가 경찰, 그것도 FBI 년이라니.....끄응....."
 "FBI라는 건 확실하지 않아요. 그런 설이 있을 뿐이지." 제시카가 말했다.
 그 때 김창호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한참 뒤 돌아온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경찰이 누들과 자칼을 추적하고 있다는군요."
 "그렇게 빨리?" 남천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CCTV와 목격자 진술, 현장 주변에서 확보한 현금카드 등으로 이근우가 동행했던 여자를 잡았고 그 여자 폰에서 누들과 자칼 전화번호가 나왔답니다."
 그 때가 새벽 네 시였다.
 "이런 젠장!" 미키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하고 쳤다.
 "제시카는 일단 여길 뜨지?" 김창호가 말했다.
 "안 그래도 출국시기를 앞당기려고 했어. 너무 오래 머물렀군. 미키도 일단 같이 나가는 게 어때?" 제시카였다.
 "내가 왜? 상황파악은 누가 하고?" 미키가 반문했다.
 "누들이 가 봤자 샹하이야. 거기 가서 찾아보자. 만에 하나 있을 위험도 피할 겸."
 "그렇게 해. 상황이 좋지 않아. 여긴 내가 알아서 할게." 창호가 말했다.
 "난 어떻게 할까?" 남천우가 물었다.
 "형님도 잠깐 나가 계시지요. 일본도 좋고 유럽도 좋고. 우리에겐 안전판이 있으니까....."
 "그러지 뭐. 한 달 정도 푹 쉬고 올 테니까 그동안 자네가 잘 처리하리라 믿어."
 "네." 김창호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남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피스텔을 나갔다.
 창호가 샤프를 불러 귀엣말을 했다. 
 "형님 옆에 하나 심어 둬. 코너에 몰리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그리고 저쪽에 연락해 자칼을 즉시 없애버리라고 해."
 샤프도 오피스텔을 나갔다.
 "저기선 어떻게 하겠대?" 제시카가 창호에게 물었다.
 "누들과 자칼 선에서 끝내보겠다고 하더군."
 "약을 더 쳐야 하나?"
 "당연하지."
 제시카가 잠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순간이었다. 나머지 일행도 세부사항을 점검하고 나서 각자 갈 곳으로 흩어졌다.


 한 시간 뒤 제시카 첸이라는, 위조여권 그림자 뒤에 숨은 임설희는 잠실의 자기 아파트로 돌아와 있었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해가 길어서인지 동이 트면서 밖이 환해져 있었다. 오정화, 오정화......이런저런 생각과 추억이 그녀 머리를 괴롭혔다. 감상은 나의 적,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냉장고로 가 맥주 캔을 하나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다음 침실로 와 그대로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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