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5. 2004년 뉴욕, 뉴욕 ⑥

조간신문 기사들은 순찰 중에 사망한 그레이시에 대해 유능한 수사관이 영면했다며 일제히 애도를 표시하고 있었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정화에겐 제접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관할 사건이 아니기에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평소 그의 방만한 생활태도가 결국 화를 자초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에 제이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레이시 피살 사건관 관련해 놀랍게도 조미란이 참고인 진술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미란은 유일한 현장 목격자라고 한다. 문제는, 진술 도중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수사에 진척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이시는 109경찰서로 와 조미란을 설득해달라고 했다. 자세한 얘긴 그리로 오면 해주겠다고 했다.
정화는 영사에게 보고를 하고 109경찰서로 달려갔다. 제이시가 자기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조미란이 유일한 목격자라니?"
정화의 질문에 제이시는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팩트는 간단해. 간밤에 그레이시가 플러싱의 '짐&벅'이라는 술집에 들렀지. 사건 당시 술집에 있던 이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거기에 조미란이 있었고 그녀가 화장실에 갔을 때 총성이 들렸다고 해. 사람들이 달려가 보니 그레이시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조미란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고 있었다고 하는군. 조미란은 범행을 부인했어. 그레이시가 여자화장실에서 자신을 폭행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있었고 곧바로 총소리가 났다고 해. 뒤를 돌아보니 용의자는 보이지 않았고 다만, 멀어져가는 발소리만 들었다는군. 그 말을 뒷받침하듯 과학수사반 조사 결과 그녀의 손에서 화약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어. 범행에 쓰인 권총은 스미스&웨슨 38구경이야. 그레이시는 즉사했어, 끝이야."
"그녀가 어느 부분에서 진술을 거부하는데?"
"술집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레이시가 들어온 뒤 한 10쯤 지나서 그녀가 혼자 들어왔다고 해. 그레이시와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았고 그에게 추파를 던지는 듯한 행동을 했다는군. 조미란 주거지는 맨하튼이야. 그녀가 왜 자정 무렵에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플러싱으로 혼자 왔느냐는 거야. 그 술집은 그 이전에도 문제가 많이 발생해 젊은 여자가 어지간해선 찾아오지 않는 곳이지. 그레이시가 비번 때에 자주 이용하는 곳이고."
"흠......그게 사실이라면......그런데 잠깐, 제이시. 그가 비번이라고 했나? 신문에선 순찰 중이라고 했던데?"
"망자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해 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흥. 좋아.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자, 그렇다면 그녀가 그레이시를 유인하려고 일부러 그 술집에 들렀다?"
"확실한 건 아니고 다만 추정하고 있을 뿐이지."
"그녀가 왜 진술을 거부하는데?"
"먼저 병원 진찰을 받은 뒤에 조사에 응하겠다는 거야. 그건 핑계고 기자들을 만나 언론플레이를 할 의도인 것 같아."
"병원 진찰이라니?"
"그게......솔직히 말해주지, 정화. 그녀의 등과 옆구리, 그리고 둔부에 상처가 있어."
"그렇다면 성폭행을 당했다는 건가?"
"일보직전이었다는 군."
제이시의 말에 정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젠장. 그 자식 죽어도 싸네."
"동료 경찰관으로서 부적절한 얘긴 삼가해 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죽을 이유는 없어."
"좋아. 뭘 도와줄까?"
"진술부터 하면 병원으로 데려가주겠다고 설득해 줘. 그리고 조미란이 그 범행과 관련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곧 풀려날 거라고 말해 줘. 그러면 안심할 거야."
"그 전에 현장 사진을 보여 줘."
그러자 제이시가 머뭇거렸다.
"뭘 숨기는 거야?" 정화가 다그쳤다.
제이시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파일에서 석 장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하나는 권총이 관통한 그레이시의 오른 쪽 머리를 찍은 사진, 다른 하나는 사건 뒤 피가 낭자한 화장실 전경이었다. 마지막 한 장이 정화를 경악시켰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레이시의 전신을 찍은 것이었는데 바지와 속옷이 발목에 걸려 있었다. 정화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사진을 제이시에게 돌려주었다.
조사실엔 풍채가 좋은 두 명의 백인 경찰관들이 조미란 앞에 앉아 있었다. 정화와 제이시가 들어가자 백인들은 방에서 나갔다.
예상과 달리 조미란은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경찰 조사에 이력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조미란이 담배를 요구하자 제이시가 던힐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조미란은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미인이었다. 긴 머리에 큰 눈, 오똑한 콧날, 도드라진 입술, 그리고 갸름한 턱선. 미녀가 갖출 것은 고루 갖추고 있었다. 정화가 자신을 소개하자 조미란이 반색을 했다.
"오 경위님? 주디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 말에 정화가 웃음을 지어보이고 제이시에게 들은 대로 병원에 가기 전에 먼저 진술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조미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좋아. 설리반이라고 했나? 시작하라구."
당돌한 말투였다.
조사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진행되었는데 조미란은 제이시의 질문과 추궁을 아주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십 분 쉬고 한 시간 더 조사를 했다. 그러나 별다른 혐의점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이란 나라에선 술을 마시는 시간과 장소가 반드시 정해져 있나? 참 fucking할 나라네."
조미란의 이 말은 제이시를 당혹케 했다.
조사 말미에 제이시 입에서 주디 림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사건 전날에 주디 림과 만나 적이 있나?"
그 질문에 정화는 왜 이 대목에서 주디가 나오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끼어들진 않았다.
"없어." 조미란이 짦게 대답했다.
"전화통화는?"
"두 번 걸어왔지. 한 번은 그냥 안부를 묻는 거고, 다른 한 번은 백화점 쇼핑을 가면 크리스찬 디올 속옷 몇 벌 좀 사달라고 부탁하는 것."
"주디가 사건 발생 무렵 뉴욕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나?"
"노우. 그 친구가 '짐&벅'부근에 있었나?"
"그렇지는 않아." 제이시가 쌀쌀맞게 말했다. "자, 마치지구. 아직 조사가 다 끝난 건 아니야. 앞으로 한두 번 더 부를 테니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말길 바래."
"불필요한 행동이라니?" 조미란이 일어서며 물었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판단해. 다른 건 재판도 남아있으니 신중히 처신하는 게 좋다는 얘기지. 조미란 씨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아픈 여자를 열여덟 시간이나 조사실에 붙잡아 놓고서도 나를 생각해준다고? 별 이상한 여자경찰 다 보겠네. 엿이나 먹으라구."
제이시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조미란을 보고 정화는 킥킥 웃었다. 조미란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제이시는 얼굴을 금세 붉히면서도 분을 참는 모습이었다.
잠시 뒤 정화는 조미란을 데리고 경찰서 정문을 나왔다. 저녁 여덟 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주디가 다가와 조미란을 포옹하더니 이어 정화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조미란에게 정화가 같이 있는 사연을 물었다. 조미란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주디가 정화에게 다가와 불쑥 악수를 건넸다.
"언니, 수고 많았어요."
이국 땅에서 언니라는 말을 들은 게 언제였던가, 정화는 그 손을 마주잡으며 반갑다는 생각에 눈물을 찔끔 흘릴 뻔했다.
그러나 그 뒤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 보자면, 정화가 악마와 악수를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로빈이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왔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끊어버렸다.
"병원부터 갈까, 밥부터 먹을까. 비용은 언니가 댈게." 두 여자에게 정화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