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나오는 폭력적인 영상들은 관객에게 꽤나 큰 정신적 충격을 준다.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영화를 비롯한 김기덕 영화들 속의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가학성' 요소를 비판하지만 영화를 자세히 보면 남녀 공히 상호 가학적이다.
 "남녀 사랑이란 결국 성 욕망의 다른 표현이고, 본능적인 폭력이며, 이기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내 평소 지론을 뒷받침해 주듯.
 전개에서 보이는 폭력과 달리 결말은 평온하다. 노란 낚시방갈로를 타고 정처없이 바다로 나가는 남녀, 그리고 알몸으로 여자를 찾듯 두리번거리는 남자는 한때 그들의 쉼터였던 갈대숲으로 들어가고, 영영 나오지 않는다. 이어 마지막 장면, 여자가 나룻배 안에 누운 채 죽어 있는데 그녀의 성기 부분을 축소된 그 갈대숲이 덮고 있다... 일개 자연인이었던 여자가 갑자기 대자연의 모성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전까지의 흐름 상, 일대 파격이다.
  남자는 죽을 때까지 여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건가? 여자는 죽을 때까지 남자를 소유하고 싶은 건가?...어차피 인간의 몸이란 종족번식을 위한 도구로서 동식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  그리고 제도와 관습이 은폐하고 있지만 남녀의 유전자는 상대에 대해 아주 이기적이라는 것.

 뭐, 이런 인간의 존재적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 김기덕 영화들의 매력이자 우수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욕(수컷의 암컷에 대한 소유욕과 가학성에 기반한)이 없었다면, 계급사회, 특히 자본주의가 이렇게 성장했을까? 그러나 그것은 필시 인간성의 파탄(살인, 성매매, 자살, 마약, 우울, 정신병)을 불러오고...
 실제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자본주의와 1부1처제의 모순을 암시하고 있다. <나쁜 남자>, <사마리아>, <피에타>, <빈 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영화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의 철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타고난 사회주의자다. 
 

 여성에 대한 가학성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아 종종 페미니스트들의 비난을 받곤 하는데, 그 이유를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현단계 여성주의('계급'을 상실한)라는 게 실은 무척 '부르조아적'이어서 그렇다는 결론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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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동창생들 - 5. 2004년 뉴욕, 뉴욕 ⑧

 

 

 

 

 

 

 라이언 플래처 당시 뉴욕경찰국 범죄연구관은 2005년 12월 FBI에 보낸 비밀보고서에서 KC-7 프로젝트한국경찰관 오정화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 KC-7 프로젝트는 미국 동부지역 청부살인 범죄시스템을 소탕하기 위해 2004년 7월에 만들어졌다. 본부는 내가 속한 뉴욕경찰국 범죄연구관실이며 FBI 요원 두명과 동부지역 경찰국 소속 수사관 일곱 명의 지원을 받았다. 수사 목적 상 한국경찰관 가운데 하나가 필요했다.

 대상을 물색한 결과 한국경찰대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FBI수사기법을 연수한 경력이 있는 오정화 경위가 눈에 띄었다. 영어가 능통하고 총기를 잘 다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마침 타깃 가운데 하나인 주디 림(한국명 림설희)과 친분을 맺고 있었다.
 
 한인유학생 주디 림은 같은 한인유학생 이수진 자살사건(별도파일 참조) 연관자를 포함해 모두 일곱 건의 살인과 관련된 혐의로 추적을 받고 있었다. 이수진 사건 관련 피살자는 최근의 오언 그레이시와 브렛 휴즈를 비롯해 , 알란 킨스버그, 루이스 주키치 등 네 명이다. 오언 그레이시는 뉴욕에서, 브렛 휴즈는 보스톤에서, 알란 킨스버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루이스 주카치는 오스틴에서 각각 총기와 칼로 살해되었다. 당시 팀은 이 가운데 외부청부 징후가 있는 오언 그레이시 살해사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건을 주디 림이 직접 기획하고 실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나중에 주디 림은 이들에 대한 살해 이유를 '이수진 사건에 대한 보복'이라고 진술했다.

 한편 그녀는 러시아 청부살인 조직 '자르딘'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그들과 특정 계약을 맺고 가담한 범행은 3건으로 추정되었다. 이들과의 연관성이 드러난 것은 자르딘의 차명 불법계좌 수색을 통해서이다. 이 계좌를 통해 자르딘의 자금 일부가 주디 림의 차명계좌로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주디 림이 청부살인 조직에 들어간 경위에 대해선 정보가 없다.

  KC-7이 주목한 인물은 주디 림 말고도 자르딘의 이반 루코프스키, 블라디미르 클로이가 있다. 이들의 커넥션을 밝혀야 하는 과정에서 주디 림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수사관을 얻는다는 건 매우 행운이 있는 케이스다. 둘은 막 동성애 관계에 들어가 있었다.

 

 오정화와의 첫 미팅은 2004. 9. 1. 요원 로빈 호건스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프로젝트를 설명하자 예상대로 오정화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오정화는 제의를 받은 지 사흘 뒤에 합류를 수락했다. 우린 합의하에 그 사실을 서울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 한국경찰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미션을 받은 오정화는 2주 간의 언더커버(잠입) 캠프를 이수한 뒤 한동안 주디 림과의 신뢰를 쌓는데 주력했다. 휴가를 이용해 함께 캘리포니아와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년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개월 동안 아무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이 시기에 자르딘과 관련됐다고 의심되는 세 건의 청부살인이 더 일어났다. 조사를 해보니 그 가운데 한 건은 주디 림이, 다른 한 건은 불라디미르 클로이가, 나머지 한 건은 놀랍게도 오정화 본인이 처리한 것으로 의심받는 사정에 이르렀다.
 오정화를 심문한 결과 완전범죄를 노렸으며 주디 림 측의 신뢰를 받기 위해 하는수없이 가담했다고 해명했다. 팀은 더 큰 결과를 얻기 위해 그녀 말을 믿고 용의선상에서 제외시켜주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2005년 1월, 오정화는 자르딘에 포섭되었고 한 건의 청부살인을 더 실행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이반 루코프스키와 블라디미르 클로이, 주디 림을 모두 검거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자르딘 조직원 두 명이 사살됐고 이반 루코프스키가 복부에 관통상을, 주디 림이 팔에 관통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KC-7 요원 로빈 호건스, 제이시 설리반, 알렉스 만도 어깨와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체포된 이들은 조사와 비공개재판에서 오정화의 범죄에 대해서만 진술했고 다른 모든 건에 대해선 침묵과 부인으로 일관했다. 팀은 고심 끝에 증인보호프로램을 가동하기로 했고 마침내 오정화가 주디 림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주디 림의 증언을 통해 이미 체포된 인물들 말고도 자르딘과 관련해 청부살인에 가담한 일곱 명의 러시아계, 아일랜드계, 히스패닉계 용의자들을 더 체포할 수 있었다. 또한 청부를 의뢰한 23명의 인사들을 체포했고 그 가운데 12명을 재판정에 세웠다. 관련 인물(별도 파일 참조)들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이 수사와 재판은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KC-7 프로젝트는 관련인사들의 로비로 그해 9월에 종료되었다

 그 직후 주디 림은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따라 새 신분을 부여받고 아이오와에 정착했다.
 한편 한국경찰은 오정화의 비밀활동을 포착하고 FBI와 뉴욕경찰국에 강하게 항의를 해왔다. 결국 그녀는 2005년 10월에 한국으로 전격 소환되었다.

 우린 오정화가 발휘한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차후 FBI의 다른 미션을 부여해볼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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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엄청 지루하다.
빅토르 위고의 위대한 작품을 굳이 뮤지컬로 만들 필요가 있었나? 덕분에 15만 원 이상 하는 뮤지컬을 단 돈 5000원에 볼 수는 있었지만.
이 영화가 주는 감동과 메시지? 억지춘향 식 '혁명놀이 끌어다쓰기' 는 문화적, 지적 허영이다. 4050 세대의 미완 혁명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떠올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지금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그저 헐리웃 자본의 힘 때문.
내가 중학교 때 처음 접한 레미제라블의 번역본 제목은.....<아아, 무정>. 일본 번역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었다. 그래도 그 때의 감동이 이 영화보다도 낫다는 기억.
이 영화를 볼 시간에 차라리 김기덕의 <섬>을 다시 봤으면 좋았겠다. 아아,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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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동창생들 - 5. 2004년 뉴욕, 뉴욕 ⑦


 

 

 

 

 

 며칠 뒤 뉴욕의 한 타블로이드 신문 1면에는 오언 스페이시 경감이 근무 중 피살된 게 아니라 비번일 때 한인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변을 당했다는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제보자는 조미란 본인이었고 정화가 그를 뒷받침할 만한 증언을 조미란의 상처부위를 찍은 사진 몇 장과 함께 해당 기자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보도로 경찰의 허위 발표에 대한 여론의 질타가 빗발쳤고 뉴욕경찰국과 109경찰서는 궁지에 몰렸다.

 뉴욕 경찰 당국은 여론을 무마하고자 109경찰서장과 홍보국장을 직위해제하는 한편, 피해자 조미란과 증언에 나선 정화에게 보복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조미란 거처 주위에 경찰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원정매춘과 관련한 여죄를 추궁한답시고 경찰서로 여러 번 부르는 등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정화에 대해선 업무협조를 일체 중단했고 대사관에 압력을 넣어 정화의 근무 입지를 축소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대사관은 정당한 행위라고 판단, 정호에 대해 별로 손을 쓰지 않았다.
 경찰의 조미란에 대한 부당한 압박 행위는 결국 거액 소송을 불러왔다. 조미란이 변호사를 선임해 109경찰서를 상대로 100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소송이 제기되자 109경찰서 측이 조미란을 회유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면담조차 거부했다. 미국 경찰을 믿을 수 없어 오정화 경위에게 협상을 일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제이시가 정화를 직접 찾아왔다.
 정화는 회의실에서 그녀와 독대를 했다.
 "오해는 말아 줘, 이전에도 얘기했듯이 망자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처음 그렇게 발표한 것이지 은폐하려고 했던 건 아니야." 제이시가 말했다.
 "망지에 대한 예의라고 했지? 이수진 사건을 기억해? 죽은 여자를 유학생 성매매자라고 덮어 씌운 게 누구더라? 근거가 없다고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경철서는 고인과 유족에게 사과 한 번 하지 않았더군. 그게 망자에 대한 예의인가?"
 "그 사건과 이번 건은 별개야."
 "조미란에게 사과하긴 커녕 압박을 가한 건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나를 어떻게 대우했지?" 정화의 언성이 높아졌다. "경찰의 제 식구 감싸기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거 아닌가? 미국이 인권국가라고 하던데 직접 당해보니 영 아니군. 아무리 동료 경찰이라 해도 난 그런 위선이 싫어."
 "화 풀어." 제이시가 옆에 놓인 음료수 캔을 따 한 모금 마시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우리가 한 것들에 대해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난 너의 친구야. 파일도 보내주고 그랬잖아. 나까지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파일 건은 고맙게 생각해. 원하는 게 뭔데?"
 "그 소송을 취하하도록 조미란을 설득해주면 안 될까?".
 "그러게 진즉 사과를 했어야지. 그게 뭐야, 보복이라니. 치졸하게 구니까 그 친구도 화가 난 거야."
 "우리도 서장과 국장을 징계하는 등 성의를 보였어. 그만한 조치를 한 건 이례적인 일이야. 오늘 온 건 서장 부탁으로 왔어. 소송을 취하하면 그 대신에 조미란의 이전 범죄 행의에 대해 검찰이 기소중지를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는군."
 "노력만으론 안 되지. 확실히 서면으로 약속해주어야 해. 그걸 보장할 수 있나?"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제이시가 답답한 듯 담배를 캔 뚜껑에 비벼 껐다. 
 "돌아가서 책임 있는 인물의 확답을 받아 와. 소 취하 조건은 두 가지야. 하나는 뉴욕타임즈에의 공식사과문 게재, 다른 하나는 기소중지 결정. 그럼 내가 조미란을 설득해 볼게."
 그건 조미란과 미리 얘기를 나눈 바였다.
 "정말 너무 하는군, 같은 경찰끼리."
 "제이시 안면을 봐서 내가 도울 걸 찾아보겠다는 거야. 아니면 어림도 없어. 망신 당하고 돈 물어낼 거야, 아니면 이 정도로 끝낼 거야?"
 제이시는 뭐라고 혼자 투덜대며 영사관을 떠났다. 협상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일 주일 뒤 경찰은 뉴욕타임즈가 아닌 작은 언론사 한 곳에 조미란에 대한 공식사과문을 게재했고 검찰은 기소를 중지하겠다는 결정문을 비공식적으로 건네왔다. 그 즉시 조미란은 소를 취하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정화에 대한 압력도 해제됐다.
 이 사건은 정화가 주디로부터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조미란이 돌아간 뒤 둘은 뉴욕과 시카고를 오가며 자주 만났다. 마침 주디가 방학이기도 해 시간이 많았다. 브로드웨이에서 오페라와 영화를 같이 봤으며 자유의 여신상 일대 선상유람도 했다. 도심 쇼핑과 클럽에서의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 
 그 반면에 로빈과의 만남은 그 빈도와 농도가 희박해져 갔다. 한 번 잠자릴 같이 했으나 정화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 로빈은 도중에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로빈은 그게 모두 주디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정화와 주디의 만남에 대해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별다른 간섭은 없었다. 정화와 주디의 관계는 만남을 거듭할수록 자매지간에서 야릇한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정에서 애정으로 발전했고 급기야 밤을 같이 보내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정화 스스로도 이러한 정(情)의 흐름을 정말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

 

 뉴욕경찰국의 수사관 두 명이 영사관으로 정화를 찾아온 것은 주디와의 그 일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나서였다. 둘 다 40대 중반으로 한 사람은 아놀드 베이커라는 흑인 경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빌 피터슨이란 백인 경사였다. 그들은 며칠 전 보스톤에서 일어난 백인 남성 피살 사건과 관련해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정화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회의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8월 4일 밤 1시부터 다은 날 새벽 2시 사이에 혹시 어디에 있었나?" 피터슨이 물었다. 목소리가 다소 권위적이었다.
 "그건 왜 묻지?" 정화가 팔짱를 끼고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브렛 휴즈란 남자가 그 시간에 보스톤 외곽에서 살해됐어. 용의자들을 수소문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주디 림이야. 그녀를 알고 있지?"
 정화는 약간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물론 알지. 그런데 주디가 관련됐다는 건 믿을 수가 없군. 무슨 증거라도 있나?"
 "현재로선 그걸 찾고 있는 중이지. 주디에 대한 내사를 이미 해보았어. 오전에 만나고 왔지. 주디 말에 따르면 그 시각에 그녀 집에서 당신과 같이 있었다고 하던데 맞나?"
 피커슨의 말투가 마치 범죄자를 상대하는 듯했다. 정화는 화를 참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당일 오후부터 그녀와 있었다고 하던데 그 이야길 시간대별로 해 줘."
 "이 봐. 난 용의자가 아니야. 한국의 경찰공무원이라구.  하지만 정중하게 얘기할 수는 없어? 뒤에 플리즈를 붙이는 태도는 어디다 팔아먹었나? 이런 젠장." 정화가 미간을 지푸리며 말했다. 
 "아, 미안. 이보게 빌." 베이커가 눈치를 주자 피터슨의 태도가 좀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무시하는 표정이었다.
 "그날 오후 이야길 해주시죠." 
 "그러니까 음......보스톤 다운타운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고 오후엔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지. 그리고 영화를 봤고, 저녁에 클럽에 들렀어. 그녀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쯤 될 거야. 그리고 아침 7시까지 같이 있었으니 만약 아까 말한 그 시간이 밤행 시각이라면 주디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는 게 맞을 걸?"
 "주디 말과 거의 일치하는군. 그런데 같은 침대를 썼나, 아니면?"
 "이런 씨팔." 드디어 정화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내 생리주기도 얘기해 줄까?"
 피터슨도 덩달아 울컥하는 기미를 보이자 베이커가 그를 회의실에서 나가게 했다. 둘만 남자 베이커가 그녀를 달랬다.
 "저 친구가 과로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래. 이해해 줘. 그러니까 그 질문 의도는 잠을 자는 도중에 주디가 어딘가 다녀왔다든지 그런 기색을 없었냐는 거지."
 "내 기억으론 없었어. 난 경찰이야. 신경이 예민해서 누가 바닥의 과자 부스러기만 밞아도 벌떡 일어나곤 하지."
 "클럽 종업원 말에 따르면, 정화가 많이 취해 있었다고 하던데? CCTV에 나온 장면도 그렇고."
 그들은 제법 조사를 철저하게 한 듯했다.
 "내가 술이 센 편은 아니야. 하지만 택시 타고 오는 도중에 다 깼어." 
 그 말에 베이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오 경위. 얘기해줘서 고마워." 그가 명함을 건넸다. "혹시 주디에게 이상한 기색이 발견되면 언제라도 연락을 해줘."
 정화는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왜 주디가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거지? 죽은 이와 무슨 원한관계라도 있나?"
 "그건 아직 수사 중이라 얘기해주기 곤란해. 아마 주디는 알고 있을 거야. 그녀한테서 듣도록 해."
 "알았어."
 "그런데 주디와는 어떤 사이야?" 회의실을 나가기 전에 베이커가 등을 돌리며 물었다.
 "친구 사이지, 뭐."
 베이커는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피터슨은 보이지 않았다. 정화는 그들을 배웅하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주디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무실 전화나 휴대폰도 아마 도청당하고 있을지 모르니 괜한 짓을 해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었다. 정화는 주디가 연락을 해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여름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는 창 밖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언뜻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었다. 일전에 스페이시가 죽었을 때도 제이시가 조미란을 심문하면서 주디를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주디, 오언 스페이시, 브렛 휴즈......정화의 수사 감각은 곧 이들이 이수진 사건파일에 공히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간파해냈다. 그 재판기록을 다시 검토해 보고 있를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주디라고 예상했지만 로빈이었다. 그는 뜻밖에도 공적인 만남을 주선하고 있었다. 뉴욕경찰국의 범죄연구관 하나가 정화와 긴밀히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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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동창생들 - 5. 2004년 뉴욕, 뉴욕 ⑥

 

 

 


 조간신문 기사들은 순찰 중에 사망한 그레이시에 대해 유능한 수사관이 영면했다며 일제히 애도를 표시하고 있었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정화에겐 제접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관할 사건이 아니기에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평소 그의 방만한 생활태도가 결국 화를 자초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에 제이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레이시 피살 사건관 관련해 놀랍게도 조미란이 참고인 진술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미란은 유일한 현장 목격자라고 한다. 문제는, 진술 도중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수사에 진척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이시는 109경찰서로 와 조미란을 설득해달라고 했다. 자세한 얘긴 그리로 오면 해주겠다고 했다.
 정화는 영사에게 보고를 하고 109경찰서로 달려갔다. 제이시가 자기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조미란이 유일한 목격자라니?"
 정화의 질문에 제이시는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팩트는 간단해. 간밤에 그레이시가 플러싱의 '짐&벅'이라는 술집에 들렀지. 사건 당시 술집에 있던 이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거기에 조미란이 있었고 그녀가 화장실에 갔을 때 총성이 들렸다고 해. 사람들이 달려가 보니 그레이시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조미란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고 있었다고 하는군. 조미란은 범행을 부인했어. 그레이시가 여자화장실에서 자신을 폭행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있었고 곧바로 총소리가 났다고 해. 뒤를 돌아보니 용의자는 보이지 않았고 다만, 멀어져가는 발소리만 들었다는군. 그 말을 뒷받침하듯 과학수사반 조사 결과 그녀의 손에서 화약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어. 범행에 쓰인 권총은 스미스&웨슨 38구경이야. 그레이시는 즉사했어, 끝이야."
 "그녀가 어느 부분에서 진술을 거부하는데?"
 "술집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레이시가 들어온 뒤 한 10쯤 지나서 그녀가 혼자 들어왔다고 해. 그레이시와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았고 그에게 추파를 던지는 듯한 행동을 했다는군. 조미란 주거지는 맨하튼이야. 그녀가 왜 자정 무렵에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플러싱으로 혼자 왔느냐는 거야. 그 술집은 그 이전에도 문제가 많이 발생해 젊은 여자가 어지간해선 찾아오지 않는 곳이지. 그레이시가 비번 때에 자주 이용하는 곳이고."
 "흠......그게 사실이라면......그런데 잠깐, 제이시. 그가 비번이라고 했나? 신문에선 순찰 중이라고 했던데?"
 "망자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해 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흥. 좋아.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자, 그렇다면 그녀가 그레이시를 유인하려고 일부러 그 술집에 들렀다?"
 "확실한 건 아니고 다만 추정하고 있을 뿐이지."
 "그녀가 왜 진술을 거부하는데?"
 "먼저 병원 진찰을 받은 뒤에 조사에 응하겠다는 거야. 그건 핑계고 기자들을 만나 언론플레이를 할 의도인 것 같아."
 "병원 진찰이라니?"
 "그게......솔직히 말해주지, 정화. 그녀의 등과 옆구리, 그리고 둔부에 상처가 있어."
 "그렇다면 성폭행을 당했다는 건가?"
 "일보직전이었다는 군."
 제이시의 말에 정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젠장. 그 자식 죽어도 싸네."
 "동료 경찰관으로서 부적절한 얘긴 삼가해 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죽을 이유는 없어." 
 "좋아. 뭘 도와줄까?"
 "진술부터 하면 병원으로 데려가주겠다고 설득해 줘. 그리고 조미란이 그 범행과 관련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곧 풀려날 거라고 말해 줘. 그러면 안심할 거야."
 "그 전에 현장 사진을 보여 줘."
 그러자 제이시가 머뭇거렸다.
 "뭘 숨기는 거야?" 정화가 다그쳤다.
 제이시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파일에서 석 장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하나는 권총이 관통한 그레이시의 오른 쪽 머리를 찍은 사진, 다른 하나는 사건 뒤 피가 낭자한 화장실 전경이었다. 마지막 한 장이 정화를 경악시켰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레이시의 전신을 찍은 것이었는데 바지와 속옷이 발목에 걸려 있었다. 정화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사진을 제이시에게 돌려주었다.  

 

 조사실엔 풍채가 좋은 두 명의 백인 경찰관들이 조미란 앞에 앉아 있었다. 정화와 제이시가 들어가자 백인들은 방에서 나갔다.

 예상과 달리 조미란은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경찰 조사에 이력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조미란이 담배를 요구하자 제이시가 던힐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조미란은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미인이었다. 긴 머리에 큰 눈, 오똑한 콧날, 도드라진 입술, 그리고 갸름한 턱선. 미녀가 갖출 것은 고루 갖추고 있었다. 정화가 자신을 소개하자 조미란이 반색을 했다.

 "오 경위님? 주디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 말에 정화가 웃음을 지어보이고 제이시에게 들은 대로 병원에 가기 전에 먼저 진술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조미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좋아. 설리반이라고 했나? 시작하라구."
 당돌한 말투였다.

 조사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진행되었는데 조미란은 제이시의 질문과 추궁을 아주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십 분 쉬고 한 시간 더 조사를 했다. 그러나 별다른 혐의점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이란 나라에선 술을 마시는 시간과 장소가 반드시 정해져 있나? 참 fucking할 나라네."
 조미란의 이 말은 제이시를 당혹케 했다.

 조사 말미에 제이시 입에서 주디 림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사건 전날에 주디 림과 만나 적이 있나?"
 그 질문에 정화는 왜 이 대목에서 주디가 나오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끼어들진 않았다.
 "없어." 조미란이 짦게 대답했다.
 "전화통화는?"
 "두 번 걸어왔지. 한 번은 그냥 안부를 묻는 거고, 다른 한 번은 백화점 쇼핑을 가면 크리스찬 디올 속옷 몇 벌 좀 사달라고 부탁하는 것."
 "주디가 사건 발생 무렵 뉴욕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나?"
 "노우. 그 친구가 '짐&벅'부근에 있었나?"
 "그렇지는 않아." 제이시가 쌀쌀맞게 말했다. "자, 마치지구. 아직 조사가 다 끝난 건 아니야. 앞으로 한두 번 더 부를 테니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말길 바래."
 "불필요한 행동이라니?" 조미란이 일어서며 물었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판단해. 다른 건 재판도 남아있으니 신중히 처신하는 게 좋다는 얘기지. 조미란 씨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아픈 여자를 열여덟 시간이나 조사실에 붙잡아 놓고서도 나를 생각해준다고? 별 이상한 여자경찰 다 보겠네. 엿이나 먹으라구."
 제이시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조미란을 보고 정화는 킥킥 웃었다. 조미란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제이시는 얼굴을 금세 붉히면서도 분을 참는 모습이었다.
 
 잠시 뒤 정화는 조미란을 데리고 경찰서 정문을 나왔다. 저녁 여덟 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주디가 다가와 조미란을 포옹하더니 이어 정화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조미란에게 정화가 같이 있는 사연을 물었다. 조미란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주디가 정화에게 다가와 불쑥 악수를 건넸다.
 "언니, 수고 많았어요."
 이국 땅에서 언니라는 말을 들은 게 언제였던가, 정화는 그 손을 마주잡으며 반갑다는 생각에 눈물을 찔끔 흘릴 뻔했다.

 그러나 그 뒤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 보자면, 정화가 악마와 악수를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로빈이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왔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끊어버렸다.
 "병원부터 갈까, 밥부터 먹을까. 비용은 언니가 댈게." 두 여자에게 정화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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