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름, 서울은 누구나에게 무더웠다,
지금 난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했다가 B항공 여객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가는 중이다. 이번 서울 체류는 1주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 1주일은 내내 무더웠고 실망스럽기만 했다.그래서 원래 계획했던 20일의 일정을 앞당겨 서울을 탈출하기로 한 것이다.
- 댄. 널 좋아했어.
지은한테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다. 종로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그 과거완료형 문장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그러나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녀 인생은 그녀 것이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게 인생이라고 애써 자위를 했다. 사실, 뉴욕에 교환학생으로 왔던 지은이가 두 달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풍기는 걸 느끼고는 있었다. 그녀의 심경변화. 그 원인을 제공한 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나는 잘 안다. 그게 나를 우울하게 했다.
- 넌 일부러 나한테서 달아나려 하는구나.
지은은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그건 오해였다. 난 다만 내 인생 계획을 얘기해주었을 뿐이었다. 지은은 화려한 인생과 그 영원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20대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법한. 그래서 탓하진 않기로 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건 지은만이 아니었다. 그제 가족 외식 자리에서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
- 공부 말고 다른 데에 눈 돌리면 다리몽둥이 부러질 줄 알아!
난 뉴욕주립대 올바니 캠퍼스 국제경제학부 2학년 생이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인 나한테 그렇게 말씀하신 건 충격이었다. 아마도 소문을 들으셨는지도 모른다. 내가 공부보다 락밴드에 더 열중한다는 것을. 난 주립대생이 중심인 한 락밴드에서 드러머를 하고 있다. 우린 매 분기마다 한 번씩 다른 밴드들과 함깨 브루클린에서 합동공연를 갖는다. 그 구체적인 걸 아는 이는 가족 가운데 어머니와 지금 가고 있는 소살리토의 미령 이모 뿐이다. 난 이번 3학년 학기에 등록하지 않을 예정이다. 등록금으로 할 일이 있어서다.
대기업 임원인 아버지는 대학 시절 한때 열혈 운동권에 몸담았다고 한다. 운동권이었던 사람이 지금 대기업 통신사 임원노릇을 하고 있다면 그 운동권이란 것에 근본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난 생각해 본다. 지금 아버지의 나에 대한 기대는 오로지 내가 졸업한 뒤 미국 월가에 취직하거나 한국에 오더라도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젊은이의 이상과 꿈이란 이제 아버지 사전에 없다.
비행기가 잠시 요동을 쳤다. 그러자 기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난 지난 7월의 대형사고를 떠올렸다. 아른 승객즐도 그런 듯 했다. 곧 기내방송에서는 에어포켓을 지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소란은 다시 잦아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옆좌석의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착석한 뒤로 줄곧 내 생각에만 빠져 그 여자를 의식하지 못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안경 속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사실 그건 예의가 아니다. 머쓱해진 내가 시선을 먼저 다른 데로 돌렸다.
기내식이 왔다. 난 한식을 선택했지만 여자는 오렌지주스 한 잔만 달라고 했다. 식사를 끝낸 뒤 나도 후식으로 주스를 마셨다. 그리곤 구름이 가득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자를 곁눈으로 관찰했다. 검정 양복바지에 하얀 색 반팔 블라우스. 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보기싫은 것도 아닌. 적당한 크기의 눈코입. 전형적인 동양형 얼굴엔 별 특징이 없다. 긴 머리를 뒤로 한 번 묶었고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귀걸이를 하고 있다. 좁은 어깨와 긴 손가락. 오른 손 약지에 얇은 은색 반지를 끼고 있다. 결혼한 여자일까?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다시 안경 속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눈동자 속엔 아무 감정도 없다.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연다.
"익스큐즈 미. 잠깐 실례할까?"
이런, 반말이다.
기습을 당하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내 통로로 나가는 길을 터준다. 그리곤 얼른 앞을 스치는 여자를 정밀분석한다. 낮은 굽의 회색 구두에 키는 175센티미터 쯤. 상체보다 하체가 발달되어 있는 육감형. 체격에 비해 작은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특징. 머리결과 피부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
화장실을 다녀온 여자의 손엔 물기가 묻어 있다. 다시 자리에 앉더니 손수건을 꺼내든다. 그걸로 입 주변과 손을 닦은 다음, 정좌하고선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다.
이 쯤에서 여자에 대한 관심을 돌리고 시계를 보았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8시간이 지나 있다. 도착지까지 가는 소요시간에서 이제 반을 조금 넘긴 셈이다. 잠을 좀 자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곤 먼저 화장실을 다녀왔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여자는 담요를 목까지 덮은 채 눈을 감고 있다. 화장끼 없는 얼굴. 뭐하는 여자일까? 학생? 직장인? 아니면 직업(?)여성?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에 나도 담요를 꺼내 무릎에 덮고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깨에 닿는 감촉에 눈을 떴다.
승무원이 승객들의 수면을 도우려했는지 기내 실내조명은 어두웠고 여자의 머리가 내 어깨와 머리 사이에 있었다. 그런 채로 아무 일 없다는 듯 태평하게 자는 여자.
그러나 22살의 남자는 싱숭생숭하다. 그러나 일부러 어깨를 움직여 여자를 깨우진 않기로 한다. 코앞에서 새근거리는 여자의 체취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기사도정신을 발휘해 그냥 잠이나 자자.
다시 눈을 감기 전에 나는 보았다.
여자의 머리가 가발이란 것을. 가발 아래 연붉게 물들인 원래 머리가 있다. 눈을 한껏 흘겨 여자의 안경을 보았다. 도수가 전혀 없다. 조금 이상하다.
그러다가 여자의 약간 벌려진 도톰한 입술에 내 시선이 가자 몸에 전류가 흘렀다. 이런 망할.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이러다간 도무지 잠을 못 이루겠다 싶어 어깨를 살짝 움직였다. 여자가 고개를 들며 내게서 떨어져나갔다. 텅 빈 어깨가 갑자기 쓸쓸하게 느껴진다.
"어. 쏘리."
여자는 그 말을 남기고 창 쪽으로 몸을 기대더니 다시 잠들었다. 하지만 난 더이상 잠들 수가 없었다. 여자 때문에 오감이 모두 깨어버린 탓이다. 통로 가운데기둥에 걸린 대형 LCD화면에선 '이블팝'이란 액션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영화제목도, 배우도 생소하기만 했다. 싸이보그 여자가 각종 무기를 들고 액션연기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어차피 잠이 깬 김에 생각을 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해 있을 때,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왜, 잠이 안 와? 나 때문인가?"
내가 몸을 뒤척인 모양이다. 여자의 반말투에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나는 짧게 대답했다.
"노우."
"말을 알아듣는 걸 보니 한국사람 같은데 한국말 못 해?"
여전히 반말. 교양 없이 막 자란 여자가 분명하다.
"풉."
그러나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자 입술에 묻은 침을 보았던 것이다.
"왜 웃어?"
"입술이나 좀 닦아요."
그제야 여자는 손으로 입 주위를 만져보더니 손수건을 꺼냈다.
"그, 그러지. 고마워."
"천만에요."
여자는 손거울과 화장세트를 꺼내 잠시 얼굴을 고쳤다. 그리곤 물었다.
"일본인인 줄 알았는데, 학생인가?"
"하이 소오데스요(네 그래요)."
"이런, 한국말로 해."
난 갑자기 호기심이 돋았다.
"이름이 뭐죠? 전 댄이라고 해요. 다니엘 고. 한국이름은 고영택인데 친구들은 댄이라고 불러요."
"댄. 다짜고짜 여자에게 이름을 묻는 건 실례야."
"다짜고짜 상대에게 반말하는 건 실례가 아니고요?"
"기분나쁘면 너도 반말로 해. 그게 니들 좋아하는 미국식 아냐? 댄이라고 했지? 네가 댄이면 나는 엘렌이다. 엘렌이라 불러."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보이는 여자에게 초면에 말을 놓기는 어렵고도 생소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로 했다.
"엘렌은 어디를 가는데?"
그러자 여자가 미간을 살짝 지푸리며 안경 속의 시선을 강하게 보냈다.
"야, 야. 촌스럽게 우리 서로 사적인 건 묻지 않기로 하자. 처음으로 돌아가자. 나 때문에 잠이 안 온 거야?"
"아니. 그냥 잠이 온 올 때가 있잖어. 아까 조금 눈을 붙였고."
"리얼리? 그럼 됐어. 올롸잇! 앤 굿나잇."
여자는 다시 취침모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자리가 불편했는지 계속 몸을 뒤척인다. 어느 틈인가 독서등을 켜고 좌석선반을 내리더니 책을 읽기 시작한다. 안경을 계속 매만지면서. 그 모습에 한마디 했다.
"엘렌. 도수 없는 안경은 왜 껴, 불편하게."
여자가 안경을 벗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나 화난 눈길은 아니다.
"참견하지마, 내 취향이야."
그러나 난 계속했다.
"읽고 있는 책은? 나에게 권할만한 도서인가?"
그러자 처음으로 여자 특유의 부끄러움을 드러냈다. 말하길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왜 여자는 남자보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정작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으면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몽테 크리스토 백작." 여자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음사 완간본이야. 읽어본 적 있어?"
"그럼. 알렉상드르 뒤마 작품이지? 복수극이지. 에드몽 당테스!."
"꼬마가 제법이네."
이 나이의 나를 애 취급하는 여자를 미령 이모 말고 처음 만났다.
"꼬마? 풉, 하하."
"내가 좀 웃겼나?"
얘기가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난 이렇게 허물없이 얘기하는 여자가 좋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성격이 쿨한 미령 이모를 닮았다.
"그러는 엘렌 아주머니는 대체 몇 살이신데요?"
난 비아냥을 섞어 물었다.
"먹을만큼 먹었어. 까불지 마. 가만 보아하니 내가 네 엄마 뻘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스물......여덟?"
그러자 엘렌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점장이니? 종묘에서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내 친구 가운데 서른 두 살 먹은 여자하고 사귀는 놈도 있다구."
그러자 여자가 배를 쥐면서 웃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혼자 헉헉거리던 여자가 숨을 고른 뒤 겨우 입을 열었다.
"아이고 우스워 죽겠네. 너 좀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 여잔 뭐하는 여자라니? 과부? 이혼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