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름, 서울은 누구나에게 무더웠다,  

 지금 난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했다가 B항공 여객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가는 중이다. 이번 서울 체류는 1주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 1주일은 내내 무더웠고 실망스럽기만 했다.그래서 원래 계획했던 20일의 일정을 앞당겨 서울을 탈출하기로 한 것이다.

 - 댄. 널 좋아했어.

 지은한테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다. 종로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그 과거완료형 문장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그러나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녀 인생은 그녀 것이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게 인생이라고 애써 자위를 했다. 사실, 뉴욕에 교환학생으로 왔던 지은이가 두 달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풍기는 걸 느끼고는 있었다. 그녀의 심경변화. 그 원인을 제공한 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나는 잘 안다. 그게 나를 우울하게 했다.

 - 넌 일부러 나한테서 달아나려 하는구나. 

 지은은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그건 오해였다. 난 다만 내 인생 계획을 얘기해주었을 뿐이었다. 지은은 화려한 인생과 그 영원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20대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법한. 그래서 탓하진 않기로 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건 지은만이 아니었다. 그제 가족 외식 자리에서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

 - 공부 말고 다른 데에 눈 돌리면 다리몽둥이 부러질 줄 알아!

 난 뉴욕주립대 올바니 캠퍼스 국제경제학부 2학년 생이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인 나한테 그렇게 말씀하신 건 충격이었다. 아마도 소문을 들으셨는지도 모른다. 내가 공부보다 락밴드에 더 열중한다는 것을. 난 주립대생이 중심인 한 락밴드에서 드러머를 하고 있다. 우린 매 분기마다 한 번씩 다른 밴드들과 함깨 브루클린에서 합동공연를 갖는다. 그 구체적인 걸 아는 이는 가족 가운데 어머니와 지금 가고 있는 소살리토의 미령 이모 뿐이다. 난 이번 3학년 학기에 등록하지 않을 예정이다. 등록금으로 할 일이 있어서다.

 대기업 임원인 아버지는 대학 시절 한때 열혈 운동권에 몸담았다고 한다. 운동권이었던 사람이 지금 대기업 통신사 임원노릇을 하고 있다면 그 운동권이란 것에 근본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난 생각해 본다. 지금 아버지의 나에 대한 기대는 오로지 내가 졸업한 뒤 미국 월가에 취직하거나 한국에 오더라도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젊은이의 이상과 꿈이란 이제 아버지 사전에 없다.

 비행기가 잠시 요동을 쳤다. 그러자 기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난 지난 7월의 대형사고를 떠올렸다. 아른 승객즐도 그런 듯 했다. 곧 기내방송에서는 에어포켓을 지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소란은 다시 잦아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옆좌석의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착석한 뒤로 줄곧 내 생각에만 빠져 그 여자를 의식하지 못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안경 속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사실 그건 예의가 아니다. 머쓱해진 내가 시선을 먼저 다른 데로 돌렸다.

 기내식이 왔다. 난 한식을 선택했지만 여자는 오렌지주스 한 잔만 달라고 했다. 식사를 끝낸 뒤 나도 후식으로 주스를 마셨다. 그리곤 구름이 가득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자를 곁눈으로 관찰했다. 검정 양복바지에 하얀 색 반팔 블라우스. 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보기싫은 것도 아닌. 적당한 크기의 눈코입. 전형적인 동양형 얼굴엔 별 특징이 없다. 긴 머리를 뒤로 한 번 묶었고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귀걸이를 하고 있다. 좁은 어깨와 긴 손가락. 오른 손 약지에 얇은 은색 반지를 끼고 있다. 결혼한 여자일까?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다시 안경 속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눈동자 속엔 아무 감정도 없다.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연다.

"익스큐즈 미. 잠깐 실례할까?"

 이런, 반말이다. 
 기습을 당하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내 통로로 나가는 길을 터준다. 그리곤 얼른 앞을 스치는 여자를 정밀분석한다. 낮은 굽의 회색 구두에 키는 175센티미터 쯤. 상체보다 하체가 발달되어 있는 육감형. 체격에 비해 작은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특징. 머리결과 피부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 

 화장실을 다녀온 여자의 손엔 물기가 묻어 있다. 다시 자리에 앉더니 손수건을 꺼내든다. 그걸로 입 주변과 손을 닦은 다음, 정좌하고선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다.
 이 쯤에서 여자에 대한 관심을 돌리고 시계를 보았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8시간이 지나 있다. 도착지까지 가는 소요시간에서 이제 반을 조금 넘긴 셈이다. 잠을 좀 자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곤 먼저 화장실을 다녀왔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여자는 담요를 목까지 덮은 채 눈을 감고 있다. 화장끼 없는 얼굴. 뭐하는 여자일까? 학생? 직장인? 아니면 직업(?)여성?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에 나도 담요를 꺼내 무릎에 덮고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깨에 닿는 감촉에 눈을 떴다.
 승무원이 승객들의 수면을 도우려했는지 기내 실내조명은 어두웠고 여자의 머리가 내 어깨와 머리 사이에 있었다. 그런 채로 아무 일 없다는 듯 태평하게 자는 여자.
 그러나 22살의 남자는 싱숭생숭하다. 그러나 일부러 어깨를 움직여 여자를 깨우진 않기로  한다. 코앞에서 새근거리는 여자의 체취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기사도정신을 발휘해 그냥 잠이나 자자.

 다시 눈을 감기 전에 나는 보았다.
 여자의 머리가 가발이란 것을. 가발 아래 연붉게 물들인 원래 머리가 있다. 눈을 한껏 흘겨 여자의 안경을 보았다. 도수가 전혀 없다. 조금 이상하다.
 그러다가 여자의 약간 벌려진 도톰한 입술에 내 시선이 가자 몸에 전류가 흘렀다. 이런 망할.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이러다간 도무지 잠을 못 이루겠다 싶어 어깨를 살짝 움직였다. 여자가 고개를 들며 내게서 떨어져나갔다. 텅 빈 어깨가 갑자기 쓸쓸하게 느껴진다.

 "어. 쏘리."

 여자는 그 말을 남기고 창 쪽으로 몸을 기대더니 다시 잠들었다. 하지만 난 더이상 잠들 수가 없었다. 여자 때문에 오감이 모두 깨어버린 탓이다. 통로 가운데기둥에 걸린 대형 LCD화면에선 '이블팝'이란 액션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영화제목도, 배우도 생소하기만 했다. 싸이보그 여자가 각종 무기를 들고 액션연기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어차피 잠이 깬 김에 생각을 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해 있을 때,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왜, 잠이 안 와? 나 때문인가?"

 내가 몸을 뒤척인 모양이다. 여자의 반말투에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나는 짧게 대답했다.
 "노우."

 "말을 알아듣는 걸 보니 한국사람 같은데 한국말 못 해?"

 여전히 반말. 교양 없이 막 자란 여자가 분명하다.

 "풉."

 그러나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자 입술에 묻은 침을 보았던 것이다.

 "왜 웃어?"

 "입술이나 좀 닦아요."

 그제야 여자는 손으로 입 주위를 만져보더니 손수건을 꺼냈다.

 "그, 그러지. 고마워."

 "천만에요."

 여자는 손거울과 화장세트를 꺼내 잠시 얼굴을 고쳤다. 그리곤 물었다. 

 "일본인인 줄 알았는데, 학생인가?"

 "하이 소오데스요(네 그래요)."

 "이런, 한국말로 해."

 난 갑자기 호기심이 돋았다.

 "이름이 뭐죠? 전 댄이라고 해요. 다니엘 고. 한국이름은 고영택인데 친구들은 댄이라고 불러요."

 "댄. 다짜고짜 여자에게 이름을 묻는 건 실례야."

 "다짜고짜 상대에게 반말하는 건 실례가 아니고요?"

 "기분나쁘면 너도 반말로 해. 그게 니들 좋아하는 미국식 아냐? 댄이라고 했지? 네가 댄이면 나는 엘렌이다. 엘렌이라 불러."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보이는 여자에게 초면에 말을 놓기는 어렵고도 생소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로 했다.

 "엘렌은 어디를 가는데?"

 그러자 여자가 미간을 살짝 지푸리며 안경 속의 시선을 강하게 보냈다.

 "야, 야. 촌스럽게 우리 서로 사적인 건 묻지 않기로 하자. 처음으로 돌아가자. 나 때문에 잠이 안 온 거야?"

 "아니. 그냥 잠이 온 올 때가 있잖어. 아까 조금 눈을 붙였고."

 "리얼리? 그럼 됐어. 올롸잇! 앤 굿나잇."

 여자는 다시 취침모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자리가 불편했는지 계속 몸을 뒤척인다. 어느 틈인가 독서등을 켜고 좌석선반을 내리더니 책을 읽기 시작한다. 안경을 계속 매만지면서. 그 모습에 한마디 했다.

 "엘렌. 도수 없는 안경은 왜 껴, 불편하게."

 여자가 안경을 벗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나 화난 눈길은 아니다.

 "참견하지마, 내 취향이야."

 그러나 난 계속했다.

 "읽고 있는 책은? 나에게 권할만한 도서인가?"

 그러자 처음으로 여자 특유의 부끄러움을 드러냈다. 말하길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왜 여자는 남자보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정작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으면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몽테 크리스토 백작." 여자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음사 완간본이야. 읽어본 적 있어?"

 "그럼. 알렉상드르 뒤마 작품이지? 복수극이지. 에드몽 당테스!."

 "꼬마가 제법이네."

 이 나이의 나를 애 취급하는 여자를 미령 이모 말고 처음 만났다.

 "꼬마? 풉, 하하."

 "내가 좀 웃겼나?"

 얘기가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난 이렇게 허물없이 얘기하는 여자가 좋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성격이 쿨한 미령 이모를 닮았다.

 "그러는 엘렌 아주머니는 대체 몇 살이신데요?"

 난 비아냥을 섞어 물었다.

 "먹을만큼 먹었어. 까불지 마. 가만 보아하니 내가 네 엄마 뻘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스물......여덟?"

 그러자 엘렌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점장이니? 종묘에서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내 친구 가운데 서른 두 살 먹은 여자하고 사귀는 놈도 있다구."

 그러자 여자가 배를 쥐면서 웃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혼자 헉헉거리던 여자가 숨을 고른 뒤 겨우 입을 열었다.

 "아이고 우스워 죽겠네. 너 좀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 여잔 뭐하는 여자라니? 과부? 이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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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 왜?"
 정화의 물음에 규영은 대답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한참 동안 그 자세로 있었다. 정화는 그의 얼굴 옆모습에서 낮에 최 과장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우울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 뒤 그가 얼굴을 다시 정화에게 돌렸다.
 "그런 얘기 재미없죠? 그만둘래요."
 "싱겁긴. 다음 달이 아이 돌이라며? 대체 무슨 일인데?"
 정화가 그의 빈 잔에 와인을 채우며 재차 물었다.
 "제 아이가 아니에요."
 그의 대답에 그녀는 하마터면 병을 엎지를 뻔했다. 그는 아내가 임신 6개월 되던 때에 결혼을 했다.
 "알고 있었어?"
 그가 얘길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는 몰랐죠. 낳고서 알았죠, 아이 혈액형이 이상하더군요. 저는 A형, 아내는 O형인데 아이는 AB형이니. 저도 그렇지만 아내도 당황했어요. 내 추궁에 그 진실을 얘기해 주더군요. 저와 잠자리를 하던 그 시기에 운전교습을 받았는데 운전학원 강사와 하룻밤 지낸 적이 있다고요. 산후조리를 마치곤 집을 나가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임신중독으로 상당 기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죠. 그런 처지인데 아내더러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지난 1년이 지옥 같았습니다. 아내가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기까지 1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거절했죠. 안됐지만 저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서요."
 정화는 갑자기 피곤해져서 그 얘길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거 참, 사람들 사는 모양새들이 왜 이래? 그래서 내가 결혼하기 싫은 거야."
 "죄송합니다. 한심한 얘길 해서."
 침묵 속에 둘은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게 나와 상의하고 싶은 것이었어?" 정화가 물었다.
 "아니요, 본론이 남아 있습니다."
 "뭐지?"
 "경찰을 떠나려고요."
 "그건 또 왜?"
 "어쩌다보니 박 란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둘 사이엔 전혀 그런 조짐이 없어 보였다. 아니, 정화가 부하 직원에게 세세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정화는 속으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도 별 수 없구나.
 "그렇군. 그런데 그게 왜 사직하는 이유가 되는 거지?"
 "경찰직은 남자에게 장래성이 없잖아요. 여자에겐 괜찮은 직업이지만요. 친구와 조그만 사업을 하나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 좋은 데로 옮긴다면야 내가 말릴 이유가 하나도 없지. 결심을 굳힌 건가?"
 "네." 그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기 전에 팀장님께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상의가 아니고 통보로구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해.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내일 사직서를 받아주시는 것과 제가 떠나더라도 박 란을 잘 챙겨주십사, 하는 겁니다."
 하마터면 정화 입에서 '박 란이는 너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인내심이 그녀를 꾹 참게 했다. 대신 와인 잔을 잡은 손이 조금 떨렸다.
 "그러지."
 정화가 짧게 대답하고 이번엔 그녀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왜 괜찮은 남자들은 다들 한심한 여자와 사랑에 빠질까, 정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를 탐하려던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미련이 남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 미련은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가 얼마 있으면 더 이상 자기 부하직원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와인 탓에 하체에 은근히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그 불꽃에 규영이 기름을 부었다.
 "팀장님을 속으로 참 좋아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싱거운 이야기가 계속될 것 같아 정화가 미끼를 던졌다.
 "지금은 안 좋아하고?"
 그러자 규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지금은 안 좋아하냐고?"
 강렬한 정화의 눈빛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와 박 란과의 애정전선에 영향을 끼치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게 그녀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손을 뻗어 그의 뺨에 갖다 댔다.
 "오늘 나하고 자 볼래?"
 그러자 규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아닙니다." 그러더니 홀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집으로 간 듯했다. 정화는 쓴웃음을 짓고는 병 바닥에 남은 와인을 남김없이 마시고는 레스토랑을 나왔다. 길 건너편에서 규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삼성동에서도 가장 후미진 골목에 있는 모텔로 들어갔다.
 규영은 거칠었다. 방에 들어서자마 그녀를 침대에 내던지듯 눕히고는 그녀에게 입술을 포갰다. 둘의 옷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정화는 눈을 감고 야수처럼 덤벼드는 규영에게 몸을 온전히 내맡겼다. 그의 입술과 손이 그녀의 목과 가슴, 배와 하복부를 지나 속살을 공략할 즈음엔 그녀의 몸은 이미 활쩍 열려 있었다. 애무의 농도가 진해지자 정화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규영은 입술을 그녀의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삽입을 해오기도 전에 그녀의 몸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곧 잠시 내던져둔 이성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지, 속으로 되뇌며 그녀가 몸을 뒤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 단계까지 와서 젊디젊은 남자에게 있어 정화는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더욱 거칠어지는 규영의 애무에 정화는 에라 모르겠다, 저항을 포기하고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철저히 즐기기로 했다. 규영의 힘과 정화의 기교에 모텔방은 곧 둘의 신음과 교성으로 가득해졌다.
 몇 차례의 격한 정사가 지나간 뒤 정화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큰 대자로 누운 채 정화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규영의 손을 잡으며 그녀가 말했다.
 "사직서 내는 것, 잠시  보류해."
 규영이 뭐라고 대답했지만 그녀에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잠에 빠져들었기 떄문이었다.

 

 

 다음 날 정화는 여느 때처럼 출근했다. 새벽 7시경 잠을 자고 있는 규영을 홀로 남겨두고 모텔을 나온 뒤 집에 들러 단장을 하고 탓에 그녀를 이상하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류를 훑어보고 있을 때 규영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 팀장님, 오늘도 화이팅.
 정화가 답신을 보냈다.
 - 사직서 보류?
 곧 메시지가 왔다.
 -넵.
 정화도 다시 보냈다.
 - 짜식. 수고해.
 정화는 미소를 짓고 잠시 간밤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오랜만에 맛본 돌발 섹스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는 것 말곤 구체적인 과정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편 섹스 이후의 허탈감이나 마음의 부담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다만 그와 함께 일하고 있을 박 란에게 은근히 질투심이 이는 건 사실이었다. 정화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서류철을 들추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결제서류를 들고 최 과장 방을 찾았으나 그는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부속실 직원 얘기론 오늘 결근을 할 것 같다고 했다. 정화는 어제 그와 나눈 김창호 건에 대해 자료를 부탁하려던 참이었는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 감식반의 마홍수를 몰래 휴게실 한구석으로 불러 일산 별장에서 가져온 체모와 캔과 스프레이 등을 건네주며 지문 감식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경찰 내규 상, 사적인 청탁을 해선 안 되었지만 마홍수는 흔쾌히 해보겠다고 했다. 정화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머지않아 그를 크게 쓸 날이 있을 것 같았다.
 오후에 서울청 감찰팀에서 연락이 왔다. 감찰실로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지난 번 이근우의 인질극 과정과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 진술을 들어볼 게 있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정화는 바쁜 업무를 핑계로 다음 주에 출두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감찰실 직원이 퉁명하게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박두호 서울청장의 심복인 감찰실의 양하섭 경감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그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으니 한두 시간이면 끝날 거라고 하며 잠깐 다녀가기를 권유했다. 이번에도 정화는 오늘은 시간이 없다며 출두요구를 거절했다. 양하섭이 전화를 끝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장만영 서장이 자기 방으로 오라는 연락을 보내왔다. 
 서장 방엔 서진욱 수사과장도 와 있었다.
 "고생 많지?"
 서진욱이 정화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고생은요." 정화가 활짝 웃었다. "과장님이야말로 고생이 남다를 걸요?"
 그는 세간에 큰 이쓔가 되고 있는 안철수 대선 예비후보의 강남 룸살롱 출입에 대해 은밀히 내사를 벌였다가 언론의 추적보도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안철수 씨가 소위 부유층 패거리들과 함께 관내 룸살롱을 드나들었다는 건 일선 의경도 다 아는 일이었는데 문제는 안 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과 경찰이 비밀내사를 한 데서 비롯되었다.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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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는 인물이지?" 최 과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정화는 정색을 했다.
 "왜 제가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죠?"
 "자네가 미국에 있을 때 놈을 처음 만난 걸로 알고 있어."
 "과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죠?"
 "우린 무서운 조직이야."
 정화는 입을 다물었다. 과장급 이상이면 부학 직원의 인사파일을 언제든 열어볼 수 있다. 정화 자신도 아직 모르는 내용. 아마 거기서 알아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소소한 사실까지 적시해 있나? 정화는 문득 '인권'에 대해 생각했다. 침묵에 싸인 찻집엔 노래만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 지난 밤에 내 님은 무슨 꿈을 꾸셨나 바람에 실려와 내 곁에 찾아...
 정화의 표정에 흐르는 어두운 기색을 최 과장은 놓치지 않았다.
 "자네 인사파일엔 없는 내용일세."
 "그렇다면?" 정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옛날 자네에게 놈의 미국행적을 추적해달라고 했던 게 바로 나일세. 기억 나나? 한동안 내가 놈 사찰담당이었지."
 "아아. 그랬군요.......아, 참. 그런데 그는 지금 교도소에 있지 않나요?"
 정화는 실은, 설희의 미국에서의 마지막 연락처를 김창호를 통해 알았다. 주변에 눈이 있어 직접 만난 건 아니고 후배 직원을 통해서였다. 그 몇 년 뒤 그는 살인미수와 불법 인신매매 건으로 구속되었다. 형기를 다 채우려면 아마 내년 말까지는 복역해야 할 것이다.
 "무슨, 특사로 풀려난 지 벌써 2년이 되어가는구먼."
 정화는 손으로 머리를 탁, 쳤다.
 "그랬군요."
 최 과장은 그녀에게 김창호가 관련된 신흥 폭력조직에 대해 대해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반은 아는 얘기고 반은 모르는 얘기였다.
 "놈들을 속칭 '태천파'라고 하지. 그들이 스스로 이름을 지은 건 아니고 조직 리더인 조태천이 이름을 따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거야. 조직의 발단은 옛날 동두천일대의 골목 양아치에서였다고나 할까? 아까 얘기한 김창호 등을 끌어들여 곧 그 일대를 평정했고 이후 안양으로 와 평촌에서 룸살롱 몇 개를 운영하며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지. 그런데 안양은 이미 OB파가 꽉 잡고 있는 지역이라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었지. 그러자 몇 년 전부터 강남으로 파고들기 시작해. 강남 일대 세력들이 하길 꺼리는 사업에 끼어든 거지. 그게 바로, 마약 공급과 청부폭력이야. 이 과정에서 행동대장인 김창호가 구속되지. 놈이 없는 동안 조태천은 김창호를 외면하고 자신의 측근 박시백이란 놈을 행동대장으로 임명했는데 썩 능력이 있는 놈은 아니었어. 그 세가 위축되면서 태천파는 결국 강남 최대세력인 창촌파의 밑으로 기어들어가 속칭 '시다바리' 역할을 맡게 되지. 다시 세를 불린 건 김창호가 촐소하고나서부터야. 교도소에서 절치부심으로 기획을 했던 겐가,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세를 불렸어. 6개월 전엔 조태천이를 형식적인 보스 위치로 밀어냈지. 행동대장 노릇을 하던 박시백이는 지금 행방불명된 상태고. 한편 창촌파 두목이 자살하고 행동대장이 실종된 틈을 타 기존 창촌파의 조직원들을 대거 흡수했어. 지금은 기업형 성매매오피스텔 두 개를 중심으로 과거 이현광 영역의 약 30%를 할당받아 차지하고 있지."
 "그렇게 성장한 비결이 뭘까요? 불법적인 것 아니면 그렇게 빨리 크질 못했을 텐데."
 "내가 생각하기엔......." 여기까지 말하고 최 과장은 물을 한 잔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새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저만치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살인과 살인청부업이야."
 "증거는요?"
 "불행히도, 없어."
 "없는 건가요, 아니면 묵인한 건가요. 예컨대 우리 안의 고위 내통자가 있다든지." 
 "내통자에 대해선 모르겠고......혐의는 있지만 아무튼 깊은 수사가 불가능해. 나 역시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주위의 충고를 자주 받았거든."
 "그 '주위'가 대체 누군가요?"
 어느덧 정화의 말투는 피의자를 심문하는 뉴앙스로 가고 있었다.
 "내가 무슨 용의자가 된 기분이군, 헛허. 다양해. 내 입으론 말할 수 없어. 자네가 맡게되면 스스로 알아내야 할 사항이지."
 그가 더이상 자세한 얘길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역시 깊숙히 들어가 있으므로. 정화는 입이 탔다. 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최 과장에게 양해를 구해 맥주를 한 병 주문했다. 주인이 가져온 병맥주를 따 한 잔 들이킨 후 물었다.
 "강지수 계장 실종과 공무원 남녀의 피살을 김창호 쪽에서 저지른 거라고 보시는 군요?"
 "그냥 느낌이야."
 그는 베테랑이다. 그 '느낌'이라고 말한 걸 과소평가할 수는 없었다.
 "창촌파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그 행동대장들을 처리한 게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추측 뿐이야. 그런데 경고하겠네. 너무 깊은 걸 물으면 곤란해." 최 과장이 미간을 지푸렸다.
 정화는 마지막으로 정곡을 찔러보기로 했다. 그가 인정하면 좋고, 인정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밑지야 본전이란 셈치고 질문을 던졌다.
 "과장님은.....소문대로 창촌파와 가까우셨나요?"
 "응."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정화도 그렇게 했다.
 정화는 그의 괴로운 기색을 눈치채고 더이상 민감한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그를 코너로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후배 직원에게 구태여 흉금을 터놓는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건 예의가 없는 짓이었다. 또한 경찰 생활을 하며 얻은 처세술이지만 많이 알수록 좋을 것도 없었다.
 한 시간 뒤 그들은 찻집에서 나왔다. 그동안 그들은 사소한 일상이야기만 나누었다. 최 과장은 마치 먼 나라로 떠날 듯한 사람처럼 회의에 찬 기색을 여러 번 비추었다. 정화가 위로했지만 그다지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길어져 저녁 여섯 시인데도 날이 환했다. 최 과장은 그녀를 서 근처에 내려주고 그대로 퇴근을 해야겠다며 자기 집이 있는 송파 쪽으로 사라졌다. 


 사무실로 가는 복도에서 감식반의 마홍수와 마주쳤다. 그는 "오 경위님 화이팅!"하며 주먹을 들어보이곤 곁을 지나쳐갔다. 
 규영은 자리에 있었다. 어디에 다녀오느냐고 묻길래 정화는 최 과장과 데이트를 하고 왔다고 농담을 건넸다. 이번엔 규영이 자신도 정화와 데이트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요즘 남자들이 왜 이래. 나하고 데이트 못해 환장을 했나?"
 "고민이 있어서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규영의 표정은 심각했다.
 둘은 택시를 타고 삼성역 부근의 한 카페로 들어갔다. 한때 코스닥 주가조작사범을 잡으러 잠복근무를 했던 곳이었는데 분위기가 괜찮았다. 종업원들은 둘이 경찰이란 걸 예나 지금이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여 주문했다. 주문한 걸 기다리면서 정화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규영의 모습을 살폈다. 수려한 얼굴에 오똑한 콧날, 지적으로 보이는 분위기. 남자로서 일의 능력도 있다. 그런 그가 왜 경찰노릇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새삼스러워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들은 여러 잡담을 나누었다. 와인이 몇 잔 들어가고 분위기가 좋아질 즈음, 정화에게 오늘 밤 그와 몸을 섞어볼까 하는 충동이 밀려왔다. 그건 동료 경찰과는 잠자리를 같지 않는다는 그녀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었지만 오랫동안 섹스에 굶주려 있었던 탓에 이성이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민이 뭔데?" 정화가 선배로서의 위엄에다가 살짝 애교를 곁들여 물었다. 그의 고민 속에 정화에 대한 흠모 같은 게 있었으면 하는, 어이가 없는 기대도 있었던 것이다.
 "이혼하려고요."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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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이근우가 죽었다. 인질극을 벌이다가 정화의 총에 맞아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지 일 주일이 지나서였다. 그 소식을 정화는 외근 중에 알았다. 그 동안 그녀는 그를 두 번 찾아갔다. 그 때마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녀린 숨결만 내쉬면서 정화의 손만 잡으려고 애썼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불가능했다. 설희와의 관계, 유에스비, 그리고 여죄와 범죄의 동기 등. 조연현 경정의 팀도 안타까워하긴 마찬가지였다. 세 건의 살인에 대해 아무런 진술도 받아내지 못했고 새롭게 등장한 관련 인물 두 명의 소재도 오리무중이었다. 그 와중에 그가 죽은 것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현장에서 죽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를 위해서도, 또한 해당 수사팀을 위해서도. 먼지 같은 인생. 정화는 존재의 무상함을 새삼 절감했다.  
 정화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울러 뒤따를 감찰반의 조사를 떠올리곤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인 검거엔 공을 세웠지만 경찰 총기가 아니라 개인 소유 총기를 사용한 점, 그리고 현장 제압 뒤 이틀 동안 보고 없이 무단으로 잠적한 게 상부의 눈에 거슬렸다는 이야길 들었던 터다. 서로 차를 몰았다. 마른 장마가 휩쓸고 있는 거리엔 먼지가 가득 휘날리고 있었다.
 강력팀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특별수사팀에 파견 나가 있던 규영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늘은 여기에 어쩐 일이야?"
 "형사가 한 가지 사건만 맡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미진한 건이 좀 있어서요." 정화가 자리에 앉자 그도 다시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근우 얘긴 들으셨죠?"
 "응." 정화가 애써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쪽에 진전은 좀 있나?"
 "전혀요."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 경정이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는 눈치예요."
 "어째서?"
 "그 속을 제가 어떻게 압니까? 무리해서 공을 세울려는 분이 아닌지라 마침 이근우도 죽었으니 특별팀을 해체할 빌미가 생긴 거죠. 팀장님도 그 사건에 미련이 없잖아요? 조 경정의 요청을 또 거절한 걸 보면."
 그가 정화의 눈치를 살폈다. 인질극 직후 조 경정은 그녀에게 재차 합류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왠지 께림칙해서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사건과 다시 조우할 것 같은 예감은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자청해 사건을 맡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규영은 그 이야길 계속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녀는 외면하고 미제사건 파일을 뒤졌다. 그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최재서 과장이었다. 서 안에 있는 그가 인터폰이 아니라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온 건 의외였다.
 "사무실인가?" 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도 서에 있네. 나하고 데이트 좀 할까?"

 

 최 과장은 정화를 태우고 어디론가 차를 몰았다. 잔뜩 굳은 표정이라 그녀는 행선지를 묻지 않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30분 뒤에 도착한 곳은 남한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한 찻집이었다. 여주인이 아는 체를 하는 걸로 보아 가끔 들르는 곳인 듯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는데 스피커엔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사랑의 빛들은 언제나 내 곁을 조용히 비
추겠지만...
 마주앉은 그의 얼굴은 많이 수척해 보였다. 검찰 조사와 아내의 불륜행각에 이은 중상으로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용기를 내서 물었다.
 "부인께선 어떠세요?"
 윤다정 경사는 모텔 창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친 걸로 알고 있다.
 "아직 병원에 있지. 일 주일 뒤면 퇴원인데 집으로 들여야 할지 고민이군. 그래도 조강지처인데 앞으로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 여자를 냉정하게 내쫓아버릴 수도 없고."
 "배신감 같은 건 안 드세요?"
 "왜 안 들겠어. 하루에도 이혼을 수십 번 생각하지. 그 연놈들을 당장 잡아넣고도 싶고 말야. 그러나 아이를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 없고. 내가 한심해 보이지?"
 "천만에요. 그냥 안쓰러워 보여요. 아무튼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이겨내라.....좋은 말이군. 그러나 운명을 이길 장사가 세상에 어디 있나? 훗." 그가 쓸쓸히 웃었다.
 그는 정화에게 요즘 맡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러나 크게 관심 있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얘기하는 도중 가끔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곤 했는데 무척 지친 표정이었다. 정화를 이곳까지 데려온 용건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가 얘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결혼은 안 할 건가?" 그가 물었다. 사적인 걸 묻는 건 처음이었다.
 "쓸만한 남자가 없네요."
 "그건 그래."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대로 쓸만한 놈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보니 아니더군."
 "딱히 과장님을 두고 한 소린 아니에요. 이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까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 신물이 나는 걸 어떡해요. 하긴 여자도 마찬가지죠. 남자에게 의지하려 들고, 이기적이고, 음험하고, 한심하고......그러고 보면 제가 아직 미혼인 것도 남자들이 저를 쓸만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일 테죠."
 "아니야. 오 경위는 누가 보아도 멋있는 여자야. 허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 남자들이 접근할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요."
 "난 남자잖아. 남자는 남자를 알아."
 "결혼을 꼭 해야 할까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그러나 혼자 늙으면 외롭지 않을까?"
 "혼자거나, 다른 이와 같이 있거나, 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거예요. 다른 이와 같이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이 더 치명적이라고 생각해요."
 "허허, 인생을 많이 살아본 사람처럼 얘기하는군. 하긴 인생에 정답은 없지. 적당히 살다 가는 거니까."
 하지만 정화는 적당히 살긴 싫었다. 그 때 냉방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오늘 왜 보자고 한 줄 아나?"
 "저야 모르죠. 오랜만에 젊은 여자 향기를 맡고 싶어서가 아닌가요?" 정화가 반문하며 미소를 지었다.
 "정답일세. 내가 좀 엉뚱하지? 자네에게 그동안 한 번도 친절하게 대해준 적이 없는 데도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넨 나를 상관으로 깎듯이 대해주었지. 그동안 그게 참 고마웠어."
 그동안? 정화는 갑자기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디 멀리 가는 사람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혹시 사표 내실 생각인가요?"
 "그래."
 "아......" 정화는 머리를 짚었다. "그렇군요. 꼭 그럴 필요까지야. 과장님은 나름대로 이 직업에 사명감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공로도 많고. 그런데도 왜 그런 결심을 하셨어요? 평생 후회하실 걸요?"
 "후회야 되겠지. 그러나 추하게 경찰직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아. 경찰에 누를 끼치고 싶지도 않고. 나 말야, 곧 구속될 것 같아. 검찰이 칼을 갈고 있어."
 "저런......"
 정화는 할 말을 잃었다. 이근우가 준 유에스비 파일엔 그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룸살롱 사건에 크게 연루되어 있는 건 틀림 없었다.
 "하지만 검찰도 비리에서 자유롭진 못하지. 내가 아는 검사장 몇도 관련되어 있어. 그러나 증거가 없는 게 한이야. 내가 그걸 찾아내려고 하니까 그쪽에서 선수를 치려는 것 같아."
 정화는 그 검사장급들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유에스비를 통해서다. 최 과장에게 그 사실을 알려줄까하는 충동이 몰려왔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개인 사정을 생각하는 건 금물이었다. 더군다나 그 유에스비 파일 내용이 사실이라는 확신도 아직 없었다. 그녀는 그 거대한 블랙커넥션의 실체에 대해 큰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있다. 해당 사건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다. 또한 굳이 그걸 파헤칠 의지나 욕심도 없었다. 새로운 세상이 와도 어차피 세상은 그런 약삭빠른 놈들끼리 손잡고 돌아갈 테니까. 갑자기 세상에 대한 환멸이 몰려왔다.
 "내가 사표를 내기 전에 장만영 서장에게 자네를 추천하려고 하네. 형사1계장으로 발령해 달라고. 보통 계장은 경감들이 맡지만 자네는 선임 경위니까 가능할 거야."
 드디어 그가 하려고 했던 얘기가 나왔다.
 "그건 왜죠?"
 "1팀에서 맡고 있던 수서동 모텔 사건을 처리하는 데엔 자네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윗선의 눈치를 안 보니까. 강지수 전 형사계장이 필리핀에서 사라졌어. 십중팔구는 죽었을 거야. 그리고 며칠 뒤 수서동에서 살해당한 공무원 여자가 강지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무슨 말씀인지....." 정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건엔 연관성이 있지. 자세한 얘긴 해주기 어려워. 내 치부와도 관련이 있으니까. 이해해 주게나. 마지막 자존심이지. 다만, 이 이야긴 해주지. 강지수는 룸살롱과 우릴 연결해주던 핵심고리였어. 그는 결정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었지. 아마 그걸 그 공무원 여자와 공유했을 테고. 그래서 제거당한 것 같아."
 "그건 지금 1팀에서 조사하고 있는 내용 아닌가요? 과장님이 통제 가능할 텐데....."
 "1팀장 그놈은 불행히도 윗선의 끄나풀이야. 비록 내게 불이익이 돌아와도 강지수는 내 혈육과 같은 녀석이라 반드시 그의 실종사유를 밝혀내라고 닥달을 했지만 수사 일선에서 멀어져 있는 나로선 역부족이었어. 나도 실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아. 내 추천에 장 서장도 동의할 거야. 자네와 가깝기도 하니까. 나를 위해 그 건을 맡아줄 수 있겠나?"

 정화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최 과장이 여주인을 불러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다.  잠시 뒤 맑은 여자 목소리의 노래가 나왔다.

 - 고요한 새벽에 찾아온 너는 내 님을 닮아서 아무 말이 없구나...

 "산이슬이란 듀엣의 '새벽안개'라는 노래야. 오래된 가수라 자네는 잘 모를 걸세."

 그가 말했고 정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슬. 아마 7, 80년대 가수인 듯했다.

 - 그리운 내 님의 소식이나 전해다오...

 "흠. 그런데 과장님은 그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한 자들이 누구라고 추정하시는 거죠?" 정화가 물었었다.
 "속단은 어렵지만 강남에 신흥 폭력조직이 뜨고 있어. 이현광 구속 뒤에 그 유산을 하나하나 접수해가고 있지. 아마 그들과 관련이 있을 거야."
 "그 조직의 핵심은 누구죠?"
 "김창호라는 놈이야."
 그 이름을 듣고 정화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근우에게서 설희 얘길 듣고 그를 떠올렸지만 최 과장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올 줄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위험한 동창생들 - 6. 낯선 재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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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12일의 연속노동 뒤에 모처럼 맞은 휴일. 오후부터 컴 앞에 죽치고 앉아 <마농의 샘> 1, 2부를 다 보았다. 그리고 티브이를 트니 이 영화 1부에서 주연한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세금폭탄을 피하려 러시아로 귀화했다는 소식이 뉴스로 막 나오고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던 그의 아버지와 평소 사회당 지지자였던 그를 떠올리면, 현 집권 사회당의 부자증세에 반기를 든 그의 태도를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한편 러시아 공산당은 그에게 입당원서를 보냈다고^^;;
 함편 <마노의 샘>은 이브 몽땅의 유작이기도...영화에서 죽음을 맞은 그의 손에는 젊은 시절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머리빗이..사랑이란, 참.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주연한 영화를 여러 편 본 기억이 나 꼽아보았다. <은행털이와 아빠와 나> <까미유 끌로델> <그린 카드> <마틴기어의 귀향> <제르미날> <이웃집 여인> <나탈리> <죽음의 침묵>..등등. 가히 프랑스 인민배우답다. <마농의 샘> 2부에 출연한 엠마뉴엘 베아르와는 <나탈리>에서 남녀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이 1986년 작품에 나온, 뇌쇄적인 미모(헤어누드 포함^^)의 엠마뉴엘 베아르를 어디에선가 봤더라니, 일전에 감상한 적 있는 <누드 모델(1991)>과 <미션 임파서블> <파리, 사랑한 날들(2010)>에서였다. 우..63년 생인 그녀도 이제 50줄인데, <파리, 사랑한 날들>과 재작년에 출연한 <바이바이 블론디>에서도 여전한 미모를 발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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