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카페 여주인. 독신주의자라나 봐."
그건 사실이었다. 친구 민규의 여자 얘기다. 민규. 멍청하면서도 여자 잘 다루는, 미스테리한 놈.
"하긴 요새 능력 있는 여자가 어디 결혼을 하겠니? 천지에 다 빌빌거리는 녀석들 뿐이라. 쓸만하다 싶으면 짐승이고. 돈 있으면 걍 적당히 연애하다가 적당히 가는 게 여자에게 정답."
엘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투엔 다소 허무함도 배어 있다. 연애 경험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도 슬픈 연애.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동정이 갔다. 잘 모르지만 공감을 해주기로 했다.
"나도 남자지만 그 대목에서 찬성."
"헛. 쬐그만 게."
그러면서 그녀는 책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심심하던 차에 더 말장난을 하고 싶었지만 독서를 방해하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돌아오니 그녀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안경을 벗고. 안경 벗은 얼굴을 보니 제법 매력이 있는 얼굴이다 싶었다. 대체 무얼하는 여자일까? 나눈 대화로 미루어 보면 학생은 아닌 듯했다. 유흥가 여성은 더욱 아닌 것같다. 그녀가 아마 직장인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공무원.
지은이는 행정고시 준비를 할 거라고 했다. 그녀가 고시를 패쓰해 공무원 사회에 들어가면 이 여자처럼 당당해질까? 그러나 그 전에 내가 아는 지은인 결코 행정고시에 합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왕자 밖에 모르는 멍청한 신데렐라가 머리마저 좋다면, 그건 신이 불공평하다는 증거 아닌가? 지은이를 보면 신은 참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난 어느새 옆자리의 잠든 여자를 공무원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수지 콴. 그애 생각이 났다.
그래, 그 애도 공무원, 특히 연방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했지.
수지는 밴드의 리드싱어, 보컬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유명 피겨스케이터 미셸 콴의 먼 조카다. 신은 그 가문에 큰 재능을 부여했다. 미셸에겐 스케이트를, 조카 수지에겐 더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수지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여러 번 전화를 걸어 왔다. 작곡 부분의 진척상황에 대한 재촉이었지만 난 그녀 마음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키보드를 맡고 있는 스테판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어느 무렵이었다.
옆좌석에서 약하고도 지속적인 진동이 이는 걸 몸에 느꼈다. 눈을 뜨고 엘렌을 보니 한 손을 머리에 짚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다. 다른 한 손은 가슴께에 가 있었는데 호흡이 정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러자 엘렌이 빈 물병을 내민다.
"물, 물 좀......"
마침 좌석을 지나치는 여승무원이 있어 도움을 청했다. 물이 오기까지 그녀는 자주색 배낭에서 이런저런 약들을 꺼냈다. 종류가 제법 많아보였다, 승무원이 물을 가지고 오자 그녀는 차분하게 몇 알 씩 나누어 약을 삼켰다. 다 삼킨 뒤에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가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는 나와 몇 몇 승무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승객 몇 명도 무슨 일인지 일어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진정이 됐는지 그녀는 그제야 승무원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중세를 계속 물어보는 승무원들을 설득해 돌려보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천만에. 시체 치우는 줄 알았어." 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가 정상으로 돌아와 다행이었다. 이어 물었다. "무슨 약을 한웅큼이나 먹어?"
아까의 알약 수는 족히 열 개는 넘어 보였다.
"신경안정제야."
"그게 전부는 아니지. '신지로이드'라고 쓰인 약봉지를 봤어. 그거 갑상선호르몬저하증 치료제지?"
엘렌이 눈을 크게 떴다.
"관찰력 진짜 좋네. 그래, 그것도 있었어. 그 약을 어떻게 알아?"
"어머니가 한때 복용했던 약이지. 왜, 그 쪽이 안 좋아?"
"여성에게 흔한 증상이야. 너무 신경쓰지 마. 난 좀 더 자두어야겠어. 미안."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다시 담요를 깊이 덮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를 더 귀찮게하지 않기로 했다. 가방에서 휴대폰과 이어폰을 꺼냈다. 미리 저장해 둔 음악을 찾아 들으며 나도 어느 틈에 잠이 들었다.
곧 착륙할 테니 안전벨트를 매달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에 잠을 깼다.
창 밖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은 맑았고 대지엔 태양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바다엔 유람선들이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었다. 엘렌은 벌써 짐을 챙기고 있었다. 저만치에 샌프란시코 중심가가 보인다. 꽤 큰 도시다. 서울은 무척 더웠는데 이곳은 어떨까 궁금했다. 서울의 무더위 같은 건 다시 겪고 싶지도 않다. 엘렌이 나를 보고 빙긋 웃길래 어깨를 으쓱, 해주었다.
귀에서 이어폰을 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쾅, 소리가 났고 자세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중심을 잡으려고 앞죄석을 잡았지만 헛수고였다. 모서리를 놓친 손가락 끝에 통증이 왔다. 배행기의 요동은 금세 멈췄지만 이미 기내는 이리저리 쏟아진 여행객들의 소지품들로 엉망이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었다.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승객은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일부는 정신을 잃고 있었고 머리에 피를 흘리는 남자도 보였다.
엘렌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좌우로 흔들어보고 있었다. 나도 목이 뻣뻣했다. 그 때 고무 타는 냄새가 심하게 풍겨오기 시작했다. 행여 테러가 아닐까하는 공포가 기내를 엄습했다. 기내방송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승객들이 저마다 짐을 챙겨 일어나 탑승구로 향하는 바람에 기내는 혼돈, 그 자체였다. 짐을 챙기고 있을 때 방송이 나왔다. 기체에 경미한 결함이 있었을 뿐 테러나 화재 위험이 없으니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승무원들도 승객들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제야 내 청바지와 티셔츠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른 손 중지의 손톱 아래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엘렌이 그걸 보곤 얼른 손수건을 꺼내 감싸주었다.
"이런, 괜찮니?"
"응. 이 정도야 뭘. 엘렌은?"
"무릎이 아프지만 괜찮은 듯 해. 일단 나가자."
우린 거의 마지막으로 랑공기를 탈출했다. 밖은 땡볕이었지만 서울만큼 무덥진 않았다.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엘렌이 다리를 조금 절룩였다.
"저런. 많이 아파?"
"아니, 조금."
엘렌은 개의치 않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먼저 내린 승객들이 여기저기에 모여 웅성거리거나 주저앉아 있었다. 앞바퀴 하나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거기와 동체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승무원들이 구급차가 올 때까지 일단 기체에서 멀리 벗어나 풀밭으로 가기를 권했다. 우린 거기에 따랐다. 곧 경적소리가 났다. 저만치서 소방차와 경찰차, 그리고 구급차가 엄청나게 몰려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전원은 꺼져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이다. 서둘러 집을 나오느라 보조배터리도 충전하지 못했다. 이모가 나를 맞으러 공항에 나오기로 했던 터라 전화를 해야만 했다. 엘렌에게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그녀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모 전화번호를 기억할 수가 없다. 다른 그 어느 친구도. 그냥 저장해서만 쓰고 기억을 안 해둔 탓이리라. 폰맹. 이런 낭패가 따로 없었다.
그로부터 약 두 시간 뒤. 난 아직 입국수속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부상자로 분류되어 공항 내 교육장 같은 곳에서 의료진의 검진을 받고 항공사 직원들로부터 이런저런 질문에 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250여 명의 승객 가운데 나 같은 이가 50명 정도 됐다. 중상자는 없는 듯했다.
엘렌은 다친 데가 없다고 하며 다른 승객들과 함께 먼저 빠져나갔다.
손수건만 남기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마음이 텅 빈 걸 느꼈다. 사람은 가도 손수건은 남는가. 난 픽, 하고 혼자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