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버클리'라는 대목에서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드미트리가 고개를 돌려 엘렌을 힐긋 쳐다본다. 그리곤 시선을 다시 앞으로 가져갔다. 그는 평소와 달리 백미러를 자주 확인하면서 차를 몰고 있었다.
난 이쯤에서 미령 이모의 호기심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미국 출입국관리소 직원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백인에겐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기타 인종에게는 안하무인으로 구는 그들은 총을 맞아도 싸다. 하지만 엘렌의 말투나 표정엔 불쾌한 기색이 없다. 그저 상관 없다는 식이다. 평소 성격인지 아니면 특정한 직업에서 단련된 건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이모는 숨김 없이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성격이라 주위에서 인기가 좋지만 프리랜서 기자 특유의 질문공세와 직설화법 때문에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기우였다. 이모가 반색을 한 것이다.
"그래? 내가 신혼 초에 버클리대 부근에서 살았어."
이윽고 두 여자의 수다가 시작됐다. 무슨무슨 동네가 어떻고, 맛집이나 미용실이 어떻고, 봄가을 캠퍼스가 어떻고, 학생들의 성향은 어떻고, 해 가며 약 10분 동안 그들은 조잘거렸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이모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엘렌이 하는 일은?"
"광고회사에서 홍보 일을 맡고 있어요."
응? 공무원이 아니고? 내 예상은 빗나갔다. 엘렌이 대답을 마치자마자 이모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이모가 "어, 여기 있어. 기다려 봐." 하며 내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어머니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콴이었다. 그녀는 뉴스를 들었다며 정말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난 행운이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언제 뉴욕에 올 거냐고 묻길래 병원 정밀진단 때문에 예정보다 며칠 늦어질 거라고 했다. 콴은 아쉬워하면서 하루라도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모는 콴의 전화가 오늘 벌써 다섯 번째라며 대체 무슨 사이냐고 물었다. 난 그냥 밴드 동료일 뿐이라고 대답했는데 이모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지은과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아무튼 묻는 데는 귀신이었다.
"헤어졌어요."
"잘 했다, 내 조카. 걔는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부동산 졸부 외동딸이라서 그런지 가정교육도 형편 없이 받았더구나. 난 사람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아인 정말 예의가 없더라."
이모가 그렇게 얘기하는 데엔 사연이 있다. 이모는 밤 늦도록 글을 쓰고 아침 11시 쯤 일어난다. 언제가 같이 이모집에 놀러갔던 지은이 그걸 보고 "자기가 무슨 공주라고 아직도 자고 있어?"라고 내게 속삭인 적이 있는데 잠결에 그 이야길 들은 모양이다. 그날 점심을 먹고 우린 이모 집에서 쫓겨났다.
이번엔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콴처럼 안부를 묻고 곧 아버지를 바꿔주었다. 아버지는 내일 당장 당신이 일하는 회사의 샌프란시스코 지사에 연락을 하라고 했다. 치료와 배상 문제에 대해 회사 고문 변호사의 자문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긴 얘길 하고 싶지 않아 그저 알겠다고만 했다. 아버지가 이모를 바꾸라고 해 그렇게 했다. 이모에게 호통을 치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언제부턴가 형부와 처제 사이는 좋지 않았다. 회고하건대 이모가 주한 미군 대위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무렵부터일 것이다.
- 걔가 왜 뉴욕이 아니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거야? 처제가 부른 거야?
이모도 지지 않고 큰 소리로 받아쳤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조카가 오고 싶어 온 거지, 걔가 어린 애예요?"
- 아무튼 걔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을 물을 거야!
"흥. 좋으실 대로. 오랜만에 통화하면서 처제에게 꼭 그런 식으로 얘기해야 돼요? 속물 같으니."
둘은 격하게 충돌했고 이모가 마지못해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버지는 평소 나를 옆길로 새게 만든 주범이라며 이모에게 비난을 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을 하게 된 게 순전히 이모의 격려 덕택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 왔던 이모와 대화를 하던 중에 학교 성적경쟁이 싫어 락음악을 해보겠다고 하자 이모는 뛸 듯이 기뻐했다.
- 그래. 젊음이란 게 뭐니, 꿈을 가져야지, 꿈을. 드디어 이 가문에 정신줄 제대로 박힌 애가 하나 나왔구나.
이모는 기타교습을 먼저 받으라며 내 손에 두둑한 현금뭉치를 쥐어주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 나는 기타교습을 받고 학교 밴드에 가입했다. 그리곤 드럼에 매력을 느껴 곧 그리로 전향했다. 학교 담임선생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격노했다. 아버지의 강력한 추궁에 난 사실을 고백했다. 둘은 그 때도 지금처럼 전화통화를 하며 대판 싸웠다. 모두 지나간 일이다.
이런저런 추억을 되살리고 있을 때 숨을 고른 이모가 다시 엘렌에게 관심을 보였다.
"엘렌?"
"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나?"
"제가 그렇게 보이세요?" 엘렌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왠지 어색했다. 그러자 이모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까닥였다.
"응. 그게 아니라면 미행 같은 것도 없겠지. 드미트리, 백미러 좀 봐. 우리 차 속도에 맞춰 차 한 대가 계속 따라오고 있어."
"나도 주욱 보고 있었어. 어떡할까?" 드미트리가 반문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나와 엘렌이 동시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과연 차량 한 대의 헤드라이트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따라붙고 있었다.
"일단 따돌려." 이모가 말했다.
드미트리가 차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뒤의 차도 그렇게 했다. 앞 차를 피해가며 차선을 계속 바꿔서 운전하는 드미트리. 뒷차가 계속 추격해 오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 순간 그가 핸들을 급히 꺾었다. 그리곤 간선도로를 빠져나갔다. 뒷차는 그대로 지나쳐 갔다. 어두워서 차에 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곧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떡갈나무가 울창한 숲 옆이었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후덥지근했다. 드미트리가 전조등을 끈 뒤 에어컨을 틀었다. 숲에선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자꾸 물어서 미안한데,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래?" 이모가 물었다.
"따지고 보면 죄 없는 사람이 있을라구요. 저는 그냥 미친 나라를 탈출했을 뿐이에요."
"한국이 미친 나라라는 건 인정해. 그러지 않고서야 전과 14범이나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겠어? 뭐, 이놈의 미국이란 나라가 더 미쳤긴 하지만. " 이모가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헌데 광고회사 홍보직원이 그저 '그냥' 탈출했을 뿐인데 무슨 미행이 붙고 그래?"
"저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그렇게 빠져나가려는 엘렌. 언젠가 디즈니랜드에서 만져보았던 밍크고래의 미끈한 감촉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모가 정곡을 찌르고 나섰다.
"거 참 이상하네. 카드가 안 된다고 하고, 모텔을 조카 이름으로 체크인 해달라고 하고 말야. 정상적인 여행자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여. 엘렌은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드디어 코너에 몰린 엘렌이 차 문 고리를 잡았다. 예상된 파국이었다.
"폐가 됐습니다. 저는 여기서 내리겠어요. 고마웠습니다."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지만 토라진 건 분명했다.
밍크고래가 내게서 달아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는 엘렌을 이모가 두 손으로 제지하고 나섰다. 역시 이모다웠다. 평소 이모의 지론은 '날개 잃은 새를 돌봐주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생긴다'라는 것이다. 이모는 언젠가 공원에서 다친 새를 보고 그대로 지나쳤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발목을 크게 다친 뒤부터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내가 '미신'이라고 하자 이모는 '터부'라고 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그런 게 있다며. 하긴, 나도 밤에 손발톱을 깎지 않는다. 들은 얘기지만 심리적으로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