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에 알몸여자 시체 하나가 숲에 처박힌 채 발견됐다는 기사와 마주하고 싶지 않아. 다 큰 동양 여자가 오밤중에 여기서 어딜 간다고 그래? 여긴 미국이야."
 이모가 냉정하게 말했다. 정말 이 숲의 깊은 어둠은 남자인 나로서도 위험해 보였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드미트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모의 설명에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모를 차 밖으로 불러냈다. 그들은 차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엘렌은 잠자코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기도 했다. 잠시 뒤 이모가 차로 돌아왔다가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들고 다시 드미트리 쪽으로 갔다. 그러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1분, 2분......통화는 길어지고 있었다. 울창한 침엽수림에서 산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차 가까이에 도로표지판이 하나 보였는데 콘젤먼(Conselman) 로드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여긴 금문교국립휴양지로 가는 길목일 것이다.
 침묵하던 엘렌이 내게 이모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스포츠클럽 소유자이자 언론 자유기고가라고 대답해주었다. 엘렌은 실은, 학창생활을 할 때 이모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영화배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할 때였는데 당시 주정부의 문화정책관이었던 이모가 학교에 와 몇 차례 강연을 했다고 한다. 난 놀라면서 이모에게 그런 경력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모 집 거실에는 당신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포즈를 취한 사진틀 하나가 있다. 그렇다면 아마 그 당시 찍은 것일 게다.
 "그 때 학생들 사이에선 네 이모가 마피아 며느리라는 소문이 돌았지. 저 남자에게서도 그런 느낌이 풍겨. 남편은 아니지?"
 "응. 이모부는 3년 전에 차 사고로 돌아가셨어. 이모 시아버지가 주류도매상을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마피아라는 건 뜻밖인데? 진짜야?"
 아버지는 이모의 결혼을 말렸다. 이모 결혼상대가 미군이라서라기보다도 그의 아버지가 탈세로 감옥에 있다는 게 가장 큰 반대이유였다고 어머니한테서 들었다.
 "미확인 소문이지. 그러면 저 남자는 이모의 애인?"
 "글쎄. 잘 모르겠어. 그들 사생활이니까 알고 싶지도 않고."
 "하긴."
 엘렌이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이모가 차로 돌아왔다.
 "지금 소살리토로 들어가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작은 마을이라 남의 눈에 띄기 쉬운 데다가 고급주택이 많아 경찰 감시가 심하거든. 그래서 내가 아는 사람의 팬션을 하나 소개해 줄 테니까 오늘은 거기서 지내도록 해. 휴가시즌이라 빈 방이 없지만 다행히도 그 분 손녀가 쓰던 방이 하나 있대. 2, 3일 정도 묵는 건 괜찮다고 하더라. 엘렌 사정을 생각해 더 배려해주고 싶지만 복잡한 일에 말려들기기 좀 그렇구나. 이해하겠지?"
 "그럼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게 해주시는 것만도 제게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엘렌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차로 돌아온 드미트리가 숲 사이로 난 길로 차를 몰았다. 10분 정도 가자 큰 네거리가 나왔고 거기서 죄회전을 했다. 길은 비포장이었다. 차가 시종 덜컹이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엘렌의 몸이 내 쪽으로 엎어졌다. 젖가슴의 뭉클한 감촉에 난 소스라쳤다. 다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얼굴을 붉히고 말았는데 부끄럽게도 내 몸의 일부가 갑자기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 턱 없는 엘렌은 차 손잡이를 잡은 채 어두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차가 멈췄다. 아담한 팬션 몇 채가 보였고 잔디밭에선 숙박객들이 바베큐파티를 열고 있었다. 팬션 표지판엔 '글로리아캡'이라고 쓰여 있었다. 곧 나이가 칠순은 되어 보이는 뚱뚱한 중년여인이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이모와 드미트리가 그녀와 반갑게 포옹했다. 대화를 듣고 그 여인의 이름이 로잘린이란 걸 알았다. 우리도 차에서 내렸다. 로잘린이 엘렌의 가방 하나를 들어주었다. 
 "그럼. 기회가 닿으면 다시 뵙겠습니다." 엘렌이 말했다.
 "그래, 몸 조심해"
 이모가 그녀를 포옹했다. 엘렌은 드미트리와 악수를 나눈 뒤 내게 한 손을 들어 까닥해 보이곤 그 여인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밍크고래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다친 손가락 끝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발기는 어느덧 끝나 있었고 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이없는 놈. 어디선가 산비둘기가 꾸룩꾸룩 울었다.
 드미트리가 오던 길을 거슬러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다시 탔을 때 이모가 말했다.
 "영화 가운데 소살리토라고 있지. 장만옥 주연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영화 속 그녀 이름이 엘렌이야. 우연한 일치군."
 "이모는 한 때 주정부에도 계셨어요?"
 "그랬지. 어떻게 알았어?"
 "엘렌이 그러더군요. 버클리 다닐 때 이모 강연 들은 적이 있다고."
 "그래? 아깐 왜 그 얘길 안 했지? 아무튼 말야, 언제 뉴욕으로 갈 예정이니?"
 "원래는 내일 저녁 비행기를 타려고 했는데 병원 검진 때문에 며칠 더 묵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직 개강하려면 한참 남았으니 실컷 놀다 가려므나. 정원 잔디도 좀 깎아주고, 참, 3학년 등록 안한다고 했지? 지난 번에 얘기한 그대로 할 거니?"
 아버지는 이모에게 내 학비와 생활비를 부치고 있다. 내가 달리 전용을 하지 못하게. 이제 나는 그걸 역이용해 이모한테서 그 돈을 몫돈으로 받아내려고 하고 있다. 이모는 처음에 반대를 표시했다. 하지만 나의 구체적인 설명과 간곡한 부탁에 종내 손을 들고 말았다.

 우리 밴드의 목표는 플로리다의 한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젝트에 입상해 6개 도시 순회 콘서트에 참가하는 것이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우리 밴드의 존재를 만방에 알릴 수 있기에 이 기회를 놓친다면 크게 후회를 할 것 같다.
 "네. 이모가 꼭 도와주셔야 해요."
 "휴우......나도 모르겠다. 나중에 언니하고 형부한테 죽일년이란 소릴 듣겠지. 쩝."
 이모가 못미더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탈이 생기기 않게 잘 할게요."

 "그래, 그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 운동은 올해도 할 거니?"

 우리 밴드는 작년 9월 월 스트리트 점거 1주년 기념행사에서 연주를 했다. 다가오는 2주년 행사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물론이죠."

 "당국에 찍힌 너희들이 그 오디션 프로젝트에서 입상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본다."

 "지난 달 브라질 코파카바나에서 열린  카톨릭 세계청년대회에서 교황님은 이런 이야길 해주셨죠. 불평등한 사회에 맞서 거리로 나가 싸우라고요." 

 카톨릭 신자인 이모는 내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곤 드미트리와 이런저런 잡담을 했다.
 소살리토로 들어섰다. 밤거리에 사람들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비로소 휴가철이란 게 실감이 났다. 예상 밖으로 더운 바닷바람에 사람들 옷차림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잠시 뒤 차는 고급주택가로 들어서는 언덕 앞에 도착했다. 입구의 초소에서 경비원이 드미트리와 이모를 보곤 미소를 지으며 통과하라고 했다. 언덕의 경사는 꽤 높은 편이어서 자칫하면 차가 뒤로 구를 듯 했다.

 이모 집앞에 도착했다. 널찍한 잔디밭에 비해 집은 작았다. 이모가 디자인한 집으로, 너무 덩치가 크면 관리가 어렵거니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그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드미트리는 이모와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다시 차를 몰고 사라졌다.
 나는 너무 피곤해 씻는둥 마는둥하고 침실로 돌아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깨와 손가락의 욱신거림을 느끼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친이 주스잔을 내밀었다. 친은 40대에 접어든 베트남 출신 미국인으로, 하루 두, 세시간 씩 이모 집 일을 돌봐주고 있다. 나는 고맙다며 잔을 받아들었다. 그걸 마시면서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11시다. 거실로 나왔다. 이모 방의 열린 틈으로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그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 아래로는 회색바다와 푸른 하늘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 때 기재식을 먹은 뒤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 때 소파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났다. 이모의 폰이었다. 그걸 집어 이모에게 갔다. 이모는 약간 짜증을 내며 누운 채로 전화기를 받았다. 건 사람은 드미트리였다.

 그녀가 통화를 하는 동안 밖으로 나와 잔디밭을 걸었다. 수북이 자란 잡초와 잔디 속에서 무수한 풀벌레가 튀어올랐다. 의자에 앉아 샌프란시스코만의 페리를 감상하고 있을 때 이모가 나오더니 내 옆 비취 의자에 앉았다.
 "댄. 어제 그 여자애 말야, 엘렌. 좀 이상하다?"
 "뭐가요?"
 "아침에 드미트리 집에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찾아와 어제 차에 탔던 여자의 소재를 물었다는구나. 빨리 찾지 못하면 그 애 신상에 피해가 갈 지도 모른다면서."
 "그런데 엘렌이 드미트리 차에 탄 건 어떻게 알았대요? 그 놈들이 미행했대요?"
 "아니, 미행한 적은 없대. 캘리포니아 경찰국의 협조를 받아 공항 주차장 CCTV를 보고 수소문해 찾아왔다고 하더래."
 "경찰국요? 엘렌이 무슨 죄인가를 지었다나요?"
 "그냥 여권관리법 위반이라고만 하더래, 자세한 건 알려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런데 그 대사관 직원 급이 높더래. 부영사하고 정보담당 사무관. 우리도 평소에 잘 못 만나는 자들이지. 그들이 왔다면 아무래도 작은 일은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그 팬션에 있다고 알려줬대요?"
 "아니.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 둘러댔대. 소살리토로 오는 중간 교차로에 여자를 내려줬더니 택시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그런데 대체 무슨 광고기획사 일개사원한테 이런 일이 생긴다니? 좀 웃기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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