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이 다가와 식사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걸어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정리할 틈도 없이 이모의 폰으로 수지가 전화를 해왔다.

 그녀 목소리엔 반가움과 걱정스러움이 물씬 묻어 있었다. 상처는 비교적 작은 것이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언제 뉴욕으로 돌아올 거냐는 물음엔 3, 4일 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어서 빨리 보고싶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충전기에 물려둔 내 폰을 거두었다. 전원을 켜자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무수한 문자메시지가 뜨기 시작했다. 대개 친구들이 보낸 것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수지의 것이 단연 많았다. 담담했던 목소리의 아까 통화와는 달리 내용은 매우 구구절절했다.
 식탁엔 닭고기 수프와 소시지계란볶음,그리고 야채샐러드와 라이스가 놓여 있었다. 구수한 된장찌개도 있었다. 맛있게 먹는 나를 보고 친이 마음에 든 듯 간간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렌이 그 팬션을 이미 떠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이모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통화하는 대상은 그 글로리아팬션 주인 로잘린이었다. 전화를 끊은 이모가 말했다.
 "엘렌. 얘는 천하태평인 성격인 것 같다. 아직 자고 있대. 그래서 그냥 놔두라고 했지. 어찌되든지 간에 내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알려주어야 할까요?"
 "신경 꺼라. 네가 말려드는 걸 원치 않는다. 느낌이 어쩐지 좋지 않아."
 이모가 냉정하게 잘라말했다. 나는 말없이 남은 접시를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개운치 않아 정원을 서성이고 있을 때 이모가 나와 자기가 아는 병원의 약도와 의사 이름,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를 건네주었다.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 있는 병원이었다.
 "전화 해 놨으니까 서둘러서 가보도록 해라. 대중교통이 없으니 내 차를 이용하렴."
 이모가 건네준 차 키를 받아들었다. 욕실로 가 세수를 한 다음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모의 차는 새것이었다. 닛산 알티마 2013년 형. 화살촉 모양의 헤드램프가 인상적이었는데 적극적인 이모의 개성에 딱 들어맞아 보였다.
 태양은 뜨거웠고 바다는 회색이었다. 차를 몰고 소살리토 간선도로로 나왔다. 거리는 벌써 관광객들의 들뜬 움직임으로 술렁이고 있었고 교통은 혼잡했다. 거길 빠져나오는 데에 10분 넘게 걸렸다.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접어드는 길목을 벗어나 국도로 빠져나왔다. 그 팬션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오후 1시의 팬션 주변은 조용했다. 차를 세우자 일하는 이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로잘린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그는 대꾸도 없이 관리동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로잘린이 나왔다. 나를 알아본 그녀가 용건도 묻지 않고 그저 따라오라고만 했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관리동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아담한 1층 목조주택이었다. 현관 문은 열려 있었고 어딘가에서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은 더웠고 젖은 나무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는데 마루바닥엔 나방이며, 메뚜기며, 이름 모를 별레며, 그런것들이 여러 마리 죽어 있었다.
 "이제 일어난 모양이군. 들어가 봐."
 로잘린은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드라이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거실 한켠의 작은 방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한 여자가 경대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팬티만 입은 차림새였다. 드라이어 소음에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엘렌은 머리 치장에 열중했다. 손가락으로 방문을 똑똑 두드려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문설주에 기대 서서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계면쩍어져서 거실로 되돌아 나오려고 할 때 그녀가 말했다.
 "왔어?"
 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헤어드라이어를 끈 그녀가 내 앞으로 서슴 없이 걸어왔다. 예상대로 그녀의 젖가슴은 건장한 몸매에 비해 작은 편이었고 곤두서 있는 유두가 젖가슴 끝에 앙증맞게 매달려 있었다. 날씬한 허리에 육감적인 엉덩이 곡선은 볼 만 했고, 팬티로 가린 삼각주는 꽤 깊어보였다. 다행인 것은 어제처럼 내 바지 앞섶이 부불어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옷이나 입어."
 "왜, 벗은 여자 처음 봐?"
 "실제로는 처음."
 내 말에 그녀가 깔깔대고 웃었다. 난 그녀가 옷차림을 갖출 때까지 거실로 나와 기다렸다.
 "왜 왔어?"
 이윽고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그녀가 물었다. 회색 반팔 스웨터에 연두색 면바지 차림이었는데 왠지 더워보이는 느낌이었다.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알려줄 게 있어서."
 "뭐지?"
 난 이모가 얘기한 내용을 정리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길 듣는 동안 엘렌은 손으로 턱을 괴고 시종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끔 미간을 찡그리기도 했다. 이야길 마치자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떡갈나무 아래에 나무벤치가 있었다. 우린 그리로 가 나란히 앉았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는데 그제야 내 얼굴이 땀으로 범벅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소매로 땀을 훔치며 엘렌을 바라보았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어제보다 청초해 보였다. 루즈를 바르지 않은 입술이 창백해 보이는 걸 빼면 남자를 매혹하기에 괜찮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제부터의 매너를 보건대 그녀의 실제 나이는 내게 얘기한 것보다 서너 살은 더 될듯했다. 우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내가 깼다.
 "위조여권인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동생 것."
 "사촌동생이 스물 여덟?"
 "응."
 어쩐지. 그렇다면 이 여자 나이는 서른이 넘었을 것이다.
 "당신은 참 알수없는 여자네.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이진 않고."
 "사람은 겉만 봐선 몰라."
 "그럴지도."
 난 구체적인 건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왜 내게 알려주러 왔어? 너완 상관이 없는 일인데."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부담되면 이제 갈게."
 난 자리에서 일어나 팬션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안 가서 엘렌이 나를 멈추게 했다.
 "댄, 부탁이 하나 있어."

 20분 뒤, 난 엘렌을 태우고 고속도로로 다시 접어들었다. 그녀를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까지 태워주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거기까지만 가면 이제 자기 갈 길을 가겠다고 했다.
 "장례식엔 안 가?"
 내가 물었다.
 "이미 동선이 드러났는데 가기가 좀 그렇군. 그들이 찾아올 정도면 저들은 이미 한국에서의 내 통화내용까지 다 알아냈을 거야."
 "그들은 알겠는데 '저들'은 또 누구야?"
 "더 맨(The Man)."
 "'더 맨'이라니?"
 "몰라? 뒤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이지."
 "무슨 초현실주의 소설 얘기를......"
 엘렌의 격과 맞지 않는 듯해서 난 피식 웃었다.
 "그래. 더 이상 알 것 없고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을 뿐이지."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을 뿐이라고? 그 말엔 수긍이 갔다. 엘렌을 쳐다보자 내 전화기를 빌려달라고 했다. 자기 것은 한국에 두고 왔다면서. 난 그렇게 했다. 엘렌은 가방에서 꺼낸 메모지를 손에 들고 여러 군데에 통화를 했다. 국제전화는 아니고 주로 미국에 있는 지인들과 연락을 하는 것 같았다. 대화 내용은 평범했다. 잠깐 미국에 들렀는데 만날 수 있느냐는 얘기, 어느 교수 장례식 얘기,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얘기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상대는 줄리앙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는데 교수 장례식이 잘 끝났다는 얘길 전해주며 그녀에게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고 한 듯했다. 엘렌은 잠시 대답을 미루다가 나를 힐긋 쳐다보더니 그러겠다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이어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내 메시지함을 여는 게 보였다. 난 그녀에게서 전화기를 낚아챘다.
 "왜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그래?"
 "미안. 수지 콴이라는 애가 문자를 많이도 보냈구만. 여자친구야?"
 "아니. 밴드 동료야."
 "밴드? 너 딴따라하니?"
 난 더이상 얘길하고 싶지 않아 대답없이 운전만 했다. 드디어 샌프란시스코로 접어들고 있었다. 몇 번 드나들었기에 나름대로 익숙한 도시다. 대도시치곤 아름다운 편이었지만 도시는 도시였다. 공기도 안좋고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곳곳에서 교통정체가 벌어지고 있었다. 번듯한 외관의 고층빌딩 뒷골목에선 살인, 강도, 강간, 마약거래, 매매춘이 횡행하고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표정을 살핀 엘렌이 다시 말을 붙였다.
 "딴따라라고 해서 미안해. 무슨 밴드인데? 넌 거기서 무얼 맡고 있고?"
 "언더그라운드 락밴드야. 난 드러머고."
 그러자 그녀가 손으로 내 어깨를 탁, 쳤다.
 "드러머? 야, 너 보기보다 멋진 구석이 있구나? 나도 옛날에 드럼을 쳐볼까 했던 시절이 있었지. 밴드 이름은?"
 "나우온더런(Now, On the Run). 공중파를 안타서 엘렌은 잘 모를 거야."
 "지금 질주 중. 그거 괜찮은 이름이네. 그런데 어딜 질주하는데? 엄마 치마폭? 아니면......수지 사타구니?"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내가 호탕하게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러더니 손뼉을 쳤다.

 "아, 그 노래가 생각난다. Fox on the run. 너도 알지?"

 그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Fox on the run~
 And hide away~

 그 떄 스포츠카를 타고 지나치던 흑인 두 명 가운데 하나가 우릴 보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보였다. 엘렌이 똑같이 맞상대를 하자 그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쌩하고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엘렌이야말로 '관심을 받자 어디론가 몸을 숨겨버리는 여우'같았다. 난 그 소절을 같이 따라불러주다가 밴드 이름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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