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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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문학동네, 초판, 2010년.

한국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살다 보면 한국과 관련된 것들이 그리워 진다. 순대국부터 청주까지. 혹은 마을 버스부터 찜질방까지. 그 중에 언어가 있다. 나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받아 들였고, 한국어로 말하는 법을 배웠으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속에서 약 25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내 생각의 상당 부분이 한국어를 통해 이루어 진다. 때문에 아무리 연습을 통해 단련한다고 해도 영어를 비롯한 제2 외국어들을 접할 때 느끼는 불편함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 “좋은” 이라는 앞에 붙이면 한국어에 대한 굶주림은 더 커진다. 한국인과 수다를 떨거나 쓰잘데기없는 글 따위를 쓰는 것으로 말하기와 쓰기에 대한 갈망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으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좋은 문장을 충분히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꽤 많이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그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한국의 인터넷 서점을 통해 가끔 책을 주문하는데, 그 비용은 한국에서 책을 구입할 때의 배를 넘어선다. 가끔은 배송비가 책값보다 더 많이 나오기도 하고, 주문 후 도착까지 일주일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요즘 내 소원중 하나가 퇴근하고 교보문고에 들려 책을 한권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언제쯤 가능할런지!) 책을 읽는 버릇이 달라진 이유가 여기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어렵사리 도착한 책들에 박힌 한글자 한글자를 소중하게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읽는 즐거움, 아름다운 문장을 접했을 때의 쾌감은 내가 가질 수 없는 재능이 실현되는 장면을 목격할 때 느끼는 대리 만족과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 느끼는 질투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경우에는 이런 감정이 더 커진다. 한국어로 써진 소설은 꾸준히 읽어 오지 않았다. 가끔 어떤 우연한 기회가 닿아야 읽을 수 있는 장르였다. 한국에서 살 때에는 한국어 소설을 읽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같고, 사실 공부와 관련된 것들을 읽기에 바빠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미국에 와서야 비로소, 그것도 최근에서야, 한국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문장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권여선의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는 그러한 나의 한국어에 대한 굶주림과 열망을 적절히 채워주는 책이다. 일곱편의 단편 소설들은 이름이 없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이름이 없는 주인공들은 때로는 타인 앞에 세워진 관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타인들의 행위를 관찰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뒤틀린 관계속에서 인물들은 각자 부족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상처를 받는다. 그렇게 벌어진 간극은 결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내가 이 단편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들을 표현하는 단어를 세개로 추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아포리즘,  기억, 반성.

그의 소설은 아름다운 문장들의 연속이다. 그런데 가끔은 소설의 서사가 주는 구성의 매력보다 한두 문장이 주는 강렬함에 더 끌릴 때가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이 바로 그런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모든 단편 소설들은 각각의 주제를 함축하는 한두개의 문장을 가지고 있고, 그 문장들은 읽기를 끝마친 뒤에도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며 새로운 생각들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가끔은 작가가 그 문장을 드러내기 위해서 스토리 라인을 구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몇개의 문장들로 그의 소설이 대변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의 소설들이 가지는 서사적 구성의 탄탄함은 단지 몇개의 문장에 함몰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을 자랑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소설들은 단지 현상을 묘사하는 데에 치중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고 뒤틀어져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 더 집중하는 듯 보인다. 즉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상황에 항상 중요하게 작용할 뿐더러, 과거가 없이는 현재도 존재할 수 없다는 통시적인 관점이 곳곳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끝은 항상 현재에 머문다. 현재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으며, 가끔은 그 어떠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 무책임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 희망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이다. 능동적인 희망의 경우에 그렇다.  그의 소설은 인물로 하여금 항상 과거를 반추하게 하고 그에 따라 현재를 다시 돌아 보게 한다. 다시 생각하게 된 현재는 분명 그 전과 다를 것이다. 후회와 절망을 뛰어 넘어 새로운 현재를 가능케 하는 반성,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다른 소설들은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글쓰기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길이 없다. 아마도 나는 그의 다른 소설들을 주문할 것이고, 그렇게 또다시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에 도착하는 책들을 소중하게 다루며 읽을 것이다. 그의 문장들은 허투루 쓰이는 법이 결코 없기 때문에 허투루 읽을 수도 없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때 잘 쓰인 한국어를 읽는 참다운 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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