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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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수다스럽다. 그는 지구상에서 한정된 조건 혹은 자원을 가지고 가장 많은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재능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중 일부는 보통이 만들어 내는 맛깔나는 문장들중 대부분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글을 계속 읽기 원할 것이다. 그는 가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 때때로 아주 깊은 수준의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대부분은 알지 않아도 굳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없는 잔가지들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특정 사실을 묘사하거나 해석할 때 보다는 그의 머리속에서 만들어 낸 상상의 작용들을 묘사할 때 그의 재능이 더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후 단 한번도 그의 책에서 특정 수준 이상의 감흥을 느껴보지 못했다. <여행의 기술> 은 무척 지루했고, <우리는 사랑일까> 는 진부했다. <행복의 건축> 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별로 읽어보고 싶지 않다. 그는 지적으로 늘 자극을 주는 존재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에게 삶에 유익한 지적인 자극을 받아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가보다 비싼 운송비를 지불해 가며 그의 에세이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 를 구입한 이유는 (아마 영어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내가 공항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인 보통의 손끝을 빌려 묘사된 공항의 모습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서 기술한 바 한정된 장소, 대상 혹은 시간에 구속되어 글을 쓰는 데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보통에게 공항만큼 흥미로운 도전도 없었을 것이다. 약간의 수고를 들여 찾아본 여러 블로그들에서도 꽤나 좋은 평을 받기도 했고.

하지만 책의 첫장을 넘기기 전부터 약간의 불쾌함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쓴 글과 리처드 베이커가 찍은 사진이 정확하게 절반씩의 지분을 가진 채 실려 있다. 베이커의 사진은 보통의 글과 유기적으로 얽히며 두페이지당 한페이지씩 공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표지에는 보통의 이름밖에는 없으며, 베이커의 이름은 보통이 쓴 감사의 말에서야 잠깐 등장할 따름이다. 이 책은 명백히 콜라보레이션이다. 누가 주도했든 간에 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보통의 글보다 베이커의 사진이 더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설사 보통이 시키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고 할지라도 베이커의 사진이 주는 울림의 폭은 보통의 건조한 문체보다 더 활발하게 살아있는 편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공항에서 받는 거의 대부분의 느낌들이 시각에 의해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공항의 높은 천장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각종 소음들과 친절하지 못한 냄새에도 익숙해져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도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낯선 풍경들에 먼저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베이커의 사진은 그 찰나의 순간들을 명민하게 포착해 낸다.

그에 반해 보통의 글은 여전히 수다스럽고 아주 유쾌하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지만 대부분은 지루하고 장황하다. 그는 일반 승객들이 갈 수 없는 공간에 고개를 들이 밀고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권한을 일주일동안 부여받았지만, 결국 관찰에 의한 사색이 아닌 관찰에서부터 출발한 상상에 의존한 채 글을 써 내려 간다. 나는 그점이 따분했는데, 또 어떤 이들은 그점에서 보통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쉽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받은 능력이다. 그리고 그 재능을 쓸데없는 곳에 쓴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보통은 여전히 대단히 좋은 글들을 쓰고 있으며, 소소한 재미를 전달할 수 있는 몇안되는 작가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이 역사에 기록될 만큼의 존재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러한 의구심은 그의 책을 한권 한권 더 읽어 나가면서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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